소녀시절....(1)
나는 외톨이었고 스스로 그것을 원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고민하고..
그러나 마음에 맞는 아이가 있으면 언제라도
다가갈 용기는 있었다.
미술시간은 그림을 잘 못 그렸지만
푸른 들판에서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끝없는
공상을 펼 수 있어서 좋았다.
봄이면 보리싹이 돋는 밭둑에서
크레용을 골라 들여다보고 색깔을 분석하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 되기도 했다.
나는 분홍색이나 초록색, 노란색을 좋아했다.
셋중 하나만 고르라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제각각 예쁜 색을 뽐내기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소문을 만들어 냈다.
변소엔 달걀 귀신이 있고 땅 속엔
왜놈들의 죽은 귀신이 있어서,
소풍때나 운동회 때 비가 온다는 것 이었다.
순옥이는 공부도, 글짓기도 잘해서
장차 문학도가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손버릇이 좋지 않았다.
나 역시 피해자 중의 한 명이다.
신옥이는 여중을 다니면서 알게 된 아이인데,
도도하면서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멀리서도 시선을 강하게 끄는,
그러니까 놀수 있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아이였다.
사복을 입으면 배우 처럼 거리가 훤해지는,
그리고 동작 하나하나가 멋이 깃든 개성이 있는 아이였다.
계모인 엄마를 둔 영심이는 정말 내 놓고 노는 아이였다.
교복을 유행에 맞게 변형하고, 결석을 밥먹듯 하고
자살 소동을 벌이고, 문병온 학생 주임이랑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
화려한 경력의 아이였다.
난 그애의 어쩔 수 없는 자유분방한
끼와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워낙 문제아여서 그 앤 진급을 못한 채
2년 후배인 우리랑 한학급에서 공부를 했다.
극장에서 읍민 노래자랑에 나가기도 했는데
중간에 "땡!" 소리가 나왔고 즉시 그애는
" 땡해도 나는 좋아..." 하고 익살을 부려
읍내가 들썩 거렸다.
신00선생님...가정 선생님이다.
하얀 얼굴에 청초한 남빛 원피스를 입고,
같은 천으로 된 긴 상의를 덧 입어
정말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감기든 목소리 처럼 젖어 있어서
듣기에 싫지 않았다.
우린 걸핏하면 가정시간에 머리 검사를 하러
양지바르고
환한 곳으로 줄을 지어 나갔다.
머릿속에 생물이, 곤충을 키웠기 때문이다.
체육선생님...약간 불안정한 외모에..
.아니..이 선생님을 두고 애들은
"매력구덩이"라고했다.
야성미가 가미된 검은 얼굴에 우수가
깃들었기때문이다.
무용 선생님...보통의 키에 발걸음도
가벼워 뵈는 날씬한 선생님이
" 원스텝!!
투스텝!!"
하면서 멋있는 동작을 지어 보이셨다.
그런데 매력구덩이 체육선생님이랑
약간의 스캔들이 나돌았다.
체육선생님은 기혼...무용선생님은 처녀선생님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여름에 하얀 파라솔에다
직접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쓰고 다니셨다.
소녀시절 (2)
가을 운동회가 끝난 끝난 며칠 후...
비가 내렸습니다.
그날 밤, 나는 ,깡체를 만나러 역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내린 비는 병아리 눈물만큼 조금이었지만..
지난번 편지의 말미에...오빠...비오는 날 밤
여덟시에 역으로 나와 주세요....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벽 안개가 하얗게 피어 오르는 강변에서
만나길 원했으나,
그가 별로 내키지 않아 했어요.
아침부터 여자랑 있으면 남들이 수상쩍게 본다면서요..
여자라니요.
그의 눈에 내가 여자로 보였고
나 역시 여자행세를 했던 거예요.
나는 가사시간에 만든 연두색 옥스포드지에
수를 놓은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고 겁도 없이
역으로 갔습니다.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그가 먼저 나와 있었는지
내가 기다렸는지 몰라도 우리는 어쨋던 만났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그는 걸을 때 몹시 건들거렸고
좀 특이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습니다.
철길이 나왔습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걸었습니다.
정말 까만 어둠 만이 그곳에 길게 놓여있었습니다.
하늘도 땅도 까맸습니다.
그가 나더러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에 대해 그다지 몰랐던 나로서는 의아해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건물이 나왔습니다.
그교정이 차라리 무서웠습니다.
건물에 불빛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치 유령들이 사는 빌딩 같았거든요..
그곳에서 그는 소변을 보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여자랑 데이트하다 생리를 해결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았을까요?
나 같으면 참았을 텐데...
왠지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는 그때 펄시스터즈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았던지 나에게 되물어 왔습니다.
이시스터즈 만큼 인기 있느냐고.
나는 이시스터즈는 비교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나는 그때 날마다 친구네 집에서 거울을 놓고,
친구의 나팔바지를 빌려 입고
펄시스터즈나 김추자의 노래와 춤을 흉내내었지요.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레퍼토리를 바꾸었어요.
바로 깡체의 건들 거리는 걸음을 흉내내는 거 였어요.
그것을 우리는 리사이틀이라고 했지요.
친구네 집은 지은지 오래 된 한옥이었고
꽤 넓었으므로 분위기는 서당집 같았어요.
마당구석에는 푸른 이끼가 돋아있었고,
할머니도 한 분 계셨거든요.
그리고 그때가 무슨 특별한 날이었는지
다식을 만들고 있었어요.
결혼해서 이웃에 사는 우리 큰언니는
이미자나 나훈아의 레코드를 사서
매일 들었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레코드점에 가서
한창 인기 있었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가사를
베껴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흥분을 했던지 걸음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라디오 가지곤 따라 적을수 없을
만큼 곡이 빨랐으니까요.
깡체는 우리 뒷집 아줌마의 동생이면서
나보다 한살 적은 경자의 오빠이기도 했어요.
나이는 스물 셋이었습니다.
나보다 일곱살이나 많았지요.
한마디로 그는 건달에 불과했어요.
무슨 문제로 교도소에 잠시 들어가 있기도 했었어요.
그리고 결혼한 누나집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시맨트를 삽으로 섞는 그의 손가락이
하얗고 길었습니다.
깡체란 별명은 내가 지었어요.
그는 키가 크면서 마른 몸을 가졌고,
불량기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책을 좋아했어요.
잡지건 소설이건 잘 끼고 다녔지요.
그래서 깡체에게 "구라마뎅구"라는
두꺼운 일본 사무라이
소설을 빌려 줬어요.
우리집엔 언니나 오빠들이 읽던 책이 좀 많았어요.
전쟁과 평화,쿼바디스,빙점..등등이 꽂혀있었는데
나도 한두줄 읽은 기억이 나요. ...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문장이 기억나고
"전쟁과평화"의 끄트머리 쯤가면 키스인지 포옹인지
그런 내용이 있는데 그 부분만 가끔씩 몰래 보곤했어요.
아직 시집 안간 작은 언니는
음악도 많이 들었는데 큰언니와는 수준이 달랐어요.
부베의 연인이나 검은 상처의 부루스,
젤소미나,솔베이지송등등을 좋아했지요.
아무튼 구라마뎅구라는 책을 나도 안 읽었지만
그도 아마 읽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면 내가 돌려 받지 못했으니까요.
책을 좋아했다면, 적어도 내 성의를 생각했다면
제때 읽고 돌려줘야하는 것 아니겠어요?
깡체가 제안을 해 왔습니다.
00날 밤0시에 00학교 정문 앞으로 나와 달라고.
그러나 난 그날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 가셨기때문입니다.
예전에 과부가 된 이모는, 너무 적적하셔서
나를 집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집에서 버스로 30분 가량걸리는
외가집에서 발이 묶여 버렸지요.
이모랑 자는데 잠을 설쳤어요.
이모가 잠결에 묵직한 허벅지를
자꾸만 내 다리 사이에 끼우는 거였어요.
기분이 이상했어요.
명쾌하게 떨쳐버릴수 없는 후텁지근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아무튼 하루인지 이틀인지 지난 다음에
나는 우리집으로 돌아 왔지요.
그리고 깡체를 만났는데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던 것 같았어요.
며칠후 그가 다시 지난번 처럼
00학교로 나오라고 했어요.
난 또 편지를 썼어요.
이제 그만 만나자고 나는 공부를 해야하니까
오빠랑 끝내고 싶다고.
지금 생각하니 무척 당돌하고
제멋대로인 계집애였어요.
학교앞에 가니 그는 술에 취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길쭉한 키의 검은 모습이 어쩐지
정말 무섭게 느껴졌어요.
나는 편지만 주고 휙,하고 돌아서서
집으로 냅다 뛰어와 버렸어요.
아아,
그리고 그 다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가 우리집에 와서 대문을 두들겼어요.
나는 무서워서 숨었어요.
아버지가 야단치러 나가 셨어요..
2년전에 어머니를 잃었고
게다가 난 막내라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었거든요.
아버지에게 혼날 염려는 없는데,
문제는 그가 대문을 발로 뻥 차버려
오래되고 삭은 나무대문이,
동그랗게 부서져 내렸어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나는 간이 콩알 만해 졌어요.
정말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방안에 들어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눈앞이 정말 노랬습니다.
일은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었어요.
깡체는 언제 담장을 넘어 왔는지 아무도 모르게
마당에서 밤을 꼬박 새우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늦은 가을이었고 감나무 잎이 마당 가득
떨어져 쌓이고 또 떨어지고 했거든요.
나의 귀에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른 감나무 잎사귀 위로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바스락거릴때 마다 나는 공포를 느꼈어요..
그리고 날이 밝은 다음 밖으로 나가보니
그가 머물다간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담배꽁초 여러개와
내가 그동안 보냈던 편지가 찢겨져
모래성 처럼 쌓여 있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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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길죠.?..
이젠 더 이상 안 쓸 거예요...
쓸 것도 없구요...
에구 영자님 께도 죄송하구...
또이렇게 긴글 몇개나 써서 아마 싫어하시는
분도 틀림없이 계시겠죠...
그분들께는 .정말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