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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 그 女子---3회


BY 토마토 2001-03-20

1993년에 인쇄된 소설입니다.
★나....서울 문리대 불문학과<63학번> 신청원, 덕만이를 줄곧 곁에서 지켜보고 도와 준답니다.
★김덕만....노동과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공부만 하려던 서울대 복학생,
찰거머리 같은 동숭동 하숙집 주인 여자에게 당합니다.
김덕만에게는 펜팔로 사랑을 교환하는 아가씨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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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영장을 받아본 그날, 그는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지더니 매우 침통한 어조로 나에게 "난 서울을 떠난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겠다." 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실천했다. 그 다음날 바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는 며칠 후 서울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가 아마 5월 중순쯤 이었을 것이다. 그가 떠나던 날 과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조촐한 송별회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날 그렇게 활달했던 그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비장한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다. 송별회가 끝나고 그는 즉시 용산역에서 부산행 완행열차를 탔다. 나는 역까지 전송 나갔다.



그는 열차에 올라타기 직전에야 비로소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돌아온다. 꼭 돌아온다. 신세는 잊지 않겠다. 잘 있거라."그 말만 내뱉고 그는 즉시 열차위로 휑 올라가 버렸고 , 그 뒤에는 열차가 떠날 때까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열차가 떠날 때까지 서 있었지만 그는 어디에 앉아 있는지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열차 안에서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 그가 울고 싶어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포기한 그 신입생 시절이지만 그는 미련만 듬뿍 안고 떠났고, 누구에게나 즐겁기 짝이 없는 신입생 시절이지만 그는 남이 상상도 못할 고난 속에거 헤매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밥을 굶고도 학교에 와서는 즐겁게 보냈었다.


즐거운 흉내만 낸 건지...... 그는 입대하기 전에 한번 부산에서 편지를 보내왔고, 입대하고 논산에서 또 한차례 편지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원래 편지 답장에 성의가 없는 사람이라 답장을 차일피일 이뤘더니 나중엔 편지가 뚝 끊겼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느 부대에서 근무하는지 조차 모르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교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내 뇌리에 깊은 영상을 남겼었다.무엇보다도 그는 내 나이 그때까지 내가 본 사람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기맑은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고, 감탄을 연발하는 그 순진성과 은근히 풍기던 우월감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더 잊지못한 것은 그가 이불이 없이 서울에서 2년을 살았고 이불이 없어 가정교사 집에서 쫓겨난 일이었다. 나는 1학기를 마치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 대학생활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때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꼭 했었다. 그때마다 내가 빼놓지 않고 했던 그의 이야기는 그가 적수공원으로 서울에 뛰어 올라와 2년을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며 대학입시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과 이불이 없어 가정교사 집에서도 쫓겨났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의 모친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안쓰런 표정을 지으시며 나에게 왜 친구가 이불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연락을 안 했느냐며 책망하셨다. 모친께서는 "세상에 이불이 없는 사람도 다 있구나. 이불이 없는 것만도 서러운 일인데, 그것 때문에 가정교사 집에서 쫓겨났다니 그 학생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느냐"고 하시고, 연락만 했다면 당신께서 이불을 만들어서라도 보내 줬을 것이라며 나의 불찰을 나무라셨다. 하여튼 내 모친은 그 말씀을 나에게 서너번도 더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있던 내 친구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가 혀를 찼었다. 어떤 녀석은 "웜매! 서울이 겁나게 춥다는디 이불도 없이 잔단말이여? 겨울에도......?" 하고서 입을 쩍 벌렸고, 어떤 놈은 "서울에 난다긴다 하는 놈들은 다 모여 버렸군! 그놈은 잠을 아예 안 자버리는 놈 아니냐? 겨울에 이불도 없이 어떻게 잔다냐? 허기야 저그 집이 가난한께 이불이 없겠지만, 그놈도 난놈은 난놈이다" 하기도 했다.


나도 2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여름방학 때 입대했다. 그해는 그 유명한 3.24에서 6.3으로 이어지는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거세게 일어났던 해이다. 한학기 내내 한쪽에서는 강의를 하고 한쪽에서는 데모가 계속되더니, 6월 3일의 문리대 단식데모를 기점으로 계엄령이 펼쳐졌고, 급기야는 조기방학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고향에 내려가 빌빌대다가 7월에 입대해 버렸다.


군복무 중 나는 학교 소식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휴가 중에는 학교에도 가 보았고 몇몇 친구들에게 김덕만의 소식을 물어보았으나 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개는 군복무기간 중에도 학교에 한번 정도는 나타나게 마련인데 그는 어쩐 일인지 학교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계산으로 그의 복무기한이 분명히 끝났을 무렵의 학기에도 그는 복학하지 않았고 그 다음 학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학교를 영영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장래의 진로를 바꿔 버렸든지, 아니면 다시 그 고달픈 생활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복학을 단념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생활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내가 복학한 해인 67년 신학기에 학교에 나타났다. 그에게는 근 4년 만의 복귀였고, 우리의 상봉도 그렇게 되는 셈이었다.


나는 복학수속을 위해 교무과에 갔다가 거기서 어정대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의 모습은 4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지만, 첫눈에도 꽤 늙어 보였다. 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본 뒤 그가 틀림없는 김덕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야, 김덕만!" 하고 그를 불렀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며 나를 보더니 "야! 친구.....너 신청원 아이가?" 하고 모두가 우리를 쳐다볼 정도로 크게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즉시 악수를 했고, 그 자리에 선 채 매우 빠르게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 했다.


그는 내가 제대를 하고 복학한다는 말을 듣고 적지에서 동지를 만난 듯이 기뻐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그럼, 나하고 같이 학교 다닌다 말이재? 잘 됐구나"하고 싱글벙글 웃어대며 내 손을 놓을 줄 몰랐다. 그 자리에서 내가 안 것은 그가 복학이 늦어진 이유인데, 그것은 그가 제대에 임박했을 때 월남 근무를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월남 파병 선발대에 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가 돈에 유혹된 것이라고 직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판단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그 얘기를 끝내다마자 "가만 있자. 내가 옛날에 니 신세 많이 졌었쟤? 오늘은 내 그신세를 갚으마"하고 한턱 내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이 돈을 꽤 벌어 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끄는대로 교문 밖으로 따라 나섰다. 하지만, 그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키는 것으로 한턱을 때웠고, 그래서 나는 그걸 보고 그가 아직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 중이었는데, 그는 자장면을 먹으며 학교 뒤 동숭동에 하숙을 정했다는 말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사람을 서넛 보았지만, 졸병들이야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어서 현지에서 쓰다 보면 귀국하여 겨우 오입 몇 번하고 술을 몇 차례 마시면 없어지는 만큼의 돈을 가져오는 게 고작인데, 그가 하숙을 정했다는 것은 어쨌든 상당한 저축을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 돈 많이 벌어 온 모양이구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신세를 갚는다고 하고서 자장면 한 그릇만 샀기 때문에 그 말을 하면 그가 난처해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저 "응, 그래? 잘됐구나"하고 말했을 뿐이다. 식사 후에 그는 자기 하숙집에 가서 밀린 얘기나 하자고 해서 나는 그말에 응했다. 그리고 그의 하숙방에서 나는 그가 서울생활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상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그는 연말까지 하숙할 수 있는 돈과 두 번의 등록금, 그리고 1년간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잡비를 월남에서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액수는 말 안했지만, 내 계산으로 대략 10만 원쯤 되는 돈이다. 그런데 그의 준비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입샌 시절에 그를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던 이불 대용으로 미제 군용 닭털침낭을 하나 준비했고, 3년간은 넉넉히 신을 수 있는 미군 장교용 단화 한켤레, 만년필 하나, 스위스제 탁상 자명종 시계, 그리고 여름용 남방셔츠와 바지, 추운 겨울에 신을 수 있는 옷도 한 벌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완전무장을 갖춘 셈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겨울에 입을 수 있다는 옷은 미군용 파카였다. "1년간은 공부만 할끼다. 그래서 저 시계를 사왔다. 하루에 4시간만 자며 공부만 할끼다. 난 다 잊어먹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까 하숙할 수 있는 1년 동안에는 오직 공부만 할란다." 하숙집 소유인 듯한 조그마한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가리키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그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동안 4년 전 용산역에서 그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나는 돌아온다. 꼭 돌아온다."고 했던 말이 생각되었고, 그래서 나는 경위야 어찌 됐건 완전무장을 갖춘 그의 복학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는 신입생 시절의 그 처절한 좌절을 근에서도 잊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남들 같으면 하루가 백날 같은 군복무 기간을 오직 최소한의 학자금을 벌기 위해 1년이나 연장했던 것은 그것을 충분히 말해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의 부대가 월남파병에 선발됐을 때 그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지만 제대를 한다해도 뾰족한 수가 없어기 때문에 복무기간을 연장하여 부대를 따라 월남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가 월남에서 가지고 온 닭털침낭은 마치 군 내무반에서 하듯이 잘 정돈되어 방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방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구석이 많은 것이었지만, 정처가 일정치 않은 뜨내기 생활에 대비한 것으로는 그것은 훌륭한 침구였다. 나는 그가 준비한 몇 가지 물건들을 둘러보다가 그 닭털침낭에 시선을 멈추고 "이제 이불 걱정은 없겠군. 입주 아르바이트를 해도 쫓겨날 염려도 없고...."라고 말했는데, 내 말에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나 그 소리 없는 웃음은 말하자면 회심의 미소였다.



<2. 4년 후>

어쨌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김덕만의 대학생활은 표면상으로는지극히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선 그해 연말까지 하숙할 수 있는 돈과 두 학기 등록금은 확보돼 있었고 신체는 어느 누구보다 건강했으니까 아프지도 않았고, 그리고 학교 뒤쪽에 있는 하숙집과 학교 사이를 도보로만 왔다갔다 했으니까 재수없는 교통사고 당할 염려도 없었으니 그의 대학생활이 평탄 할 것같이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이 보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약간의 돈을 마련했다고 해서 그가 가난에서 해방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그의 대학생활이 평탄할 수는 없었다.


복학 직후, 그가 맨 처음 곤란을 받은 일은 군복무기간 동안 손놓아 버린 공부였다. 그 문제는 복학생이면 대개 누구나 겪는 문제였지만, 그의 사정은 조금 특이했다. 그는 사실상 1학년이었는데도, 원칙을 무시하고 2학년인 내 수강과목과 비슷하게 강의 시간표를 짰다. 그가 시간표를 그렇게 짠 의도는 전적으로 친구인 나와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그의 공백기간이 4년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아무래도 무모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그가 2학년인 내 수강과목을 수강하려고 했을 때 잘 생각해서 처리하라고 은근히 만류했었는데, 그는 "당분간 밥 걱정 없고, 잠잘 곳이 있는데 뭐가 힘들겠노? 걱정하지 마라. 난 그동안 공부하고 싶어 몸살이 났던 놈이다.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 좀 할란다"


하고 내 말을 일축해 버렸다. 그가 그런 결의를 표명했을 때 나는 그가 노동을 하면서도 대학입시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그를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그런 경력을 가진 그라면 강의를 따라가기가 조금 벅차더라도 그것을 능히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몹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아마도 그는 복학 직후의 두 학기 동안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기면서 공부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부에 대한 그의 결심은 실제로 대단했었다. 그는 거의 매일 4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공부했다. 그해 10월쯤 나는 그와 한방에서 하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보니까 그는 정말 4시간 이상은 자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행동반경도 하숙집과 강의실과 도서관을 잇는 삼각지점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서울에 그 흔한 친척 한사람 없었고,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외출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오직 그 삼각지점을 시계추처럼 외롭게 왔다갔다 하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나도 복학 직후 한동안은 강의를 쫓아가기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우리는 거의 매일 학교에서 얼굴을 대했지만 피차에 그 지경이었으니 차분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 우리들이 나누었던 말이라곤 그저 내가 그에게 "어때 해볼 만하냐?" 하고 물으면 그는 씩 웃으며 "쫌 하면 되겠지" 하고 대꾸하는 정도였다. 어떤 때 나는 농담으로 그에게 "난 똥누며 0 쳐다볼 시간도 없다. 너도 군대말로 번개가 0 하듯이 정신 없지야?"하고 말해보았는데, 그는 아무 대꾸 없이 훗훗 웃기만 했다.


복학 후에 숨을 먼저 돌린 것은 당연히 나였다. 교정의 개나리와 라일락이 피고 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도서관을 부리나케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신록의 계절인 5월이 시작되고 있었고, 그때쯤에야 나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래서 나는 혼자 학교 앞 다방에 들어가 커피도 마셔 보았고, 교정을 슬슬 돌아다니며 입대 전보다 훨씬 늘어난 여학생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살펴보았고, 좀 괜찮은 여학생이 보이면 그 여학생의 콧구멍이 큰지 작은지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시선은 김덕만에게로 옮겨졌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눈에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김덕만은 눈이 나빴기 때문에 강의실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강의를 듣다가 나는 그의 뒤통수를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그가 신입생 시절에 비해서 굉장히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4년이라는 세월의 경과 속에 그가 조금 늙어 보인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서 풍기는 전체적 인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신입생 시절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꼈는데 처음에 나는 그것을 그가 점잖아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날, 나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그가 대학천을 끼고 혜화동 쪽에서 학교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먼발치에서부터 목격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내가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커다란 가죽 책가방을 손에 들고 물들인 군복을 입은 황소만한 커다란 몸이 성큼성큼 걸어오며 앞머리가 이마에 내려오면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옆으로 넘기곤 했는데 나는 그 모습에서 문득 외로움을 발견하고 "저 자식, 외롭구나!" 하고 중얼거린 일이 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의 모습에서 언제나 그 외로움을 발견했고, 세월이 사람을 참으로 많이도 바꿔 놓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신입생 시절에 나에게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패기 넘친 활달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대신 그의 얼굴 전면에는 외로움과 강한 자존심의 표징(表徵)이 부상해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변화냐! 내가 그의 하숙방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쯤부터였다.


때로는 도시락을 까 먹기 위해 갔고, 때로는 쉬고 싶을 때도 찾았다. 물론 찾아가서도 나는 그의 공부를 방해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방에 누워 학교 신문을 읽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숨자기도 했다. 내가 그의 하숙방을 '외로운 비둘기집'이라고 명명한 것은 몇 차례의 그러한 방문 뒤였다.


내가 그의 하숙방을 '외로운 비둘기집'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뭐 비둘기 같이 보였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고, 단지 그??하숙방은 동숭동 낙산(駱山) 중턱의 비탈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지대였고, 그의 방에서 보이는 전경에는 창경궁과 비원의 녹지대가 포함되어 그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비둘기 집이라고 지어본 것이다.


그리고 '외로운'이라는 말은 그에게서 떠더 붙였다. 그의 하숙집 건물은 낡고 볼품없었고 방들도 하숙생을 많이 두기 위해 비좁고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으나 그 방에서 바라보는 전경만은 일품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전경을 바라보고 난 뒤 "외로운 비둘기집에 황소가 들어앉아 밤마다 고독을 씹겠구나"하고 중얼 거렸는데, 그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책만 보고 있었다.하여튼 그는 외롭게 보여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외로움은 '고립(孤立)'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립감(孤立感)이라는 게 더 옳을 것인데, 그의 고립은 당시 대학생 사회의 풍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복학해 보니까 대학 분위기는 우리가 입학했던 시기의 그것에 비해서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냐하면, 우리가 입학했던 시기의 대학풍조는 가령, 의복은 교복이나 물들인 군복이면 족했고, 군화를 신은 학생이 많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가난했으니까 순전히 깡 하나만으로도 허심탄회하게 어울리며 대학생활의 멋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였는데 복학해 보니까 그 분위기가 말끔히 없어지고 새 풍조가 완전히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새 풍조란 더럽게도 사회의 사치성향 풍조의 침투였다. 더욱이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학과는 그러한 변화가 더욱 심했다. 벼락부자나 벼락감투를 쓴 자들의 영양들이 대거 진출하여, 패션 쇼를 하듯이 날마다 옷을 갈아입고 강의실에 나타났고, 남학생들도 돈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간에 덩달아 회사원들처럼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강의실에 앉아 고급 담배를 피우며 강의를 기다렸고 강의가 끝나면 우루루 다방에 몰려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외형적인 그러한 분위기는 당연히 고급 사교장에서처럼 대인관걔에서 긴장을 유발시키고, 그리고 약점을 안 잡히려고 은연중에 노력하는데, 그 약점 중에는 가난도 포함되는 것이다. 나 자신도 처음에 그 분위기가 상당히 곤혹스러웠는데 그러나 그것에 대한 김덕만의 소감은 한마디뿐이었다. "4년 만에 돌아와 보니 모두가 부자 같구나. 세상이 발전한 기가, 아니면 부자가 아니면 이젠 대학에 못 들어오는강?" 하여튼 그런 분위기속에서 김덕만의 의복은 50년대 대학생의 유물인 물들인 군복이었다.


이른바 대망의 시대라고 선전되던 70년대를 눈앞에 둔 1967년에 그는 그 옷을 입고 학교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시대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았다면 그도 월남에서 돌아올 때 하다못해 잠바라도 하나 사 입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알고도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사내가 까짓것 의복에 신경쓸 수 있느냐. 학업을 계속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판에 남이 뭐라 하든 의복은 상관없다. 나는 단돈 10원이라도 아껴야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물들인 군복을 입고 학교에 복귀했는지 모를 일이다. 좌우지간 그의 그런 의복은 내가 보기에도 지극히 초라했다. 그러나 그의 고립은 의복에서 유연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학생사회가 그 정도로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그런 풍조 속에서의 그의 의복은 선뜻 호감을 안 주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이 경제사정이었다. 그의 예산편성표에는 하숙비와 학용품비는 있어도 그의 기타 잡비니 용돈이니 하는 항목은 없었다. 용돈이 없다니! 그는 스스로 고립을 원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대인관계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해 연말까지는 하숙하며 공부해야겠다는 사실이 더 절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한된 예산으로 그 계획에 집착하다 보니 스스로 극기(克己)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예산편성이 아닐 수 없었다.


돈 한푼 안쓰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하숙집에서 자고 먹고, 학교에서는 강의만 듣고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공부만 하겠다는 것이냐?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실천해 나갔다. 그는 그가 편성한 예산을 집행하는 일에 법에 의한 집행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했다. 그는 담배도 안 피웠고, 술도 안 마셨고, 커피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그는 마치 지독한 구두쇠처럼 남에게 단돈 10원도 안 썼다.


내가 신입생 시절의 그의 험한 생활과 처절한 좌절을 몰랐다면 나도 아마 그를 경원했을 것이다. 사내자식이 돈 쓰는 일에 뭐 그렇게 벌벌 떠느냐고 침을 뱉아 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절박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나는 그의 생활에 오히려 머리가 숙여졌다. 나는 그의 투철성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학 분위기와 그의 생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 아닐 수 없었고 그는 당장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드러났다. 학기 중반 쯤에서는 복학생들도 재학생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복학생들끼리는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생활처럼 되다시피 했다.


그런 풍토속에서 그는 외롭게 하숙집과 강의실과 도서관만 왔다갔다 했다. 그는 누가 권하더라도 다방에 따라가지 않았고 심지어 내가 권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속으로 '그래, 공부나해라. 고독도 약인 것이다. 네 처지에 다방 맛알아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다방 가자는 따위의 일은 권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나는 그의 하숙방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하숙방을 외로운 비둘기집이라고 명명한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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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여기서 끝 맺습니다.
4회...25세의 童貞...다음에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토마토.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