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엄마를 뒷정리나 맡아주는 가정부쯤으로 여기고 직장과 사회에서 바쁜 남편은 가정을 하숙집쯤으로 여기는 듯하다.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주부로서의 역할이 점점 초라해지기만 한다”
어머니. 누구에게나 가슴뭉클함과 포근함으로 다가오는 말. 남편을 위해,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행해온 여성. 여성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 모성애에 있다.
흔히 여성의 모성애는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자녀들이 행복해질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희생과 가족의 행복을 맞바꾸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통했다.
그러나 현대의 어머니들은 더 이상 가족의 행복이라는 수식어의 뒤편에 자신의 희생이 놓여지길 원치 않는다. 적극적으로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하고,그것이 곧 가족의 행복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새로운 등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요즘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모든 어머니가 다 그렇지는 않다.특히 자녀를 다 키워놓고 이제 중년으로 접어든 어머니들의 자화상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어느새 눈가엔 잔주름이 잡히고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버린 이 시기의 어머니들은 항상 가슴 한 구석이 몹시 허전하다.
이 시기 어머니들이 흔히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의 혼돈’이다.이제까지 익숙해있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현실로 느끼기 시작하는 시기. 주부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정체성의 혼돈에 직면한 어머니들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방식에서 변화하길 원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을 이제부터라도 나만을 위해,보란 듯이 살아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실제로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그러나 이중에는 취업이나 운동,각종 강습 등 자아실현을 위한 것도 있지만 종종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들은 “어머니들의 지나친 일탈은 곧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여성차별 구조와 가부장적 가정문화에서 비롯된 정신적 공황으로부터의 그릇된 탈출방식”이라고 말한다. 여성으로서 겪는 숱한 차별이 어머니가 되면서부터 모성이라는 미명에 가리워지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들이 겪는 고통은 사소한 마음고생 정도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를 묵묵히 견뎌온 어머니들이 어느날 정체성의 혼돈과 맞닥뜨리면서 일탈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겪는 고통의 유형은 가정폭력에서부터 시댁과의 갈등,남편의 외도 등등 다양하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1300만 전체가구 중 8.7%인 113만가구에서 가정폭력이 자행되고 있으며 이중 남편에 의한 부인폭력은 72만8000가구에 달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자녀들을 생각해서 계속되는 폭력에도 그대로 참고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구타남편의 70∼80%가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보고 자라거나 부모에게 맞으며 자란 이들이라는 통계에서 보듯 가정폭력은 대물림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고질적인 고부갈등 역시 어머니들을 괴롭힌다. 지난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은 여성 가운데 4.1%가 고부갈등에 대한 상담을 의뢰했다.이외에도 시댁과의 갈등(2.6%),생활양식 차이(0.9%),혼수시비(0.2%),마마보이(0.1%) 등을 합치면 8%에 이르는 내용들이 시어머니로 대표되는 시댁과 연관돼 있다.
이같은 갈등은 가정내 어머니의 위치를 뒤흔들어놓는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못한 어머니 중 일부는 끝내 이혼법정을 찾게되고 고부간 갈등은 종종 시댁과의 결별로 이어진다. 심한 경우 성적 일탈로 치닫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현대 어머니들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활발한 사회진출,즉 직업을 갖는 일이다. 어머니들은 끊임없는 가사노동에서 과감히 뛰쳐나와 직업전선에 합류하는 것을 통해 사회속의 나,직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나를 발견함으로써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김없이 육아부담이 발목을 붙잡는다. 또 턱없이 모자라는 보육기관은 대부분의 어머니로하여금 친정부모 혹은 시부모들에게 아이를 맡기도록 강요한다.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각종 차별적 관행이 여전히 존재하고,직장생활 중 아이라도 가질라치면 어김없이 회사와 남성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 일쑤다.
최근 모성보호법 입법과정에서 보듯 기업과 정치권에게 모성보호는 인류의 미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이익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흥정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재웅기자 jw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