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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푠 명퇴당한이유


BY 억울해 2001-12-25

●이 글은 "앤티디제이(anti DJ)"에서 퍼온 글입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독자들의 몫입니다.

본기사는 안티DJ운영진에서 입수 최초로 올리는 것입니다.
월간조선사에는 미안하지만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월간조선 많이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朴正勳 前 민주당 의원 부인
金在玉씨 증언
『나는 金宇中 회장이 보낸 돈을 보관했다가 金弘一 의원에게 전달했다』
禹 鍾 昌 月刊朝鮮 취재 2팀장

〈남편에게서 『집에 중요한 게 간다. 앞집에 연락 잘 해줘』라는 연락이 옵니다. 배달된 사과 상자는 보료와 책장 하나뿐인 서재에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천장까지 가득했는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려 버렸어요. 돈 냄새 때문에 어지러워서 잠을 못 잤으니까요. 金弘一 의원이 우리 집 건너편 한신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아파트 앞 공중전화로 뛰어가서 弘一씨 집에다 『우리 집으로 전화하세요』라고 짧게 전화하면 弘一씨가 집 밖의 공중전화 있는 데로 나가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어요. 「도착했다」고 알려주면 弘一씨가 새벽 한두 시쯤 차를 갖고 와 싣고 갔습니다〉

金弘一 반박:『나를 음해 하는 것. 사실이 아니다』
●金宇中 대리인:『확인해 줄 수 없다』


金弘一 의원 반박

金大中-金宇中 연결고리

전북 임실 출신인 朴正勳(박정훈·61) 前 민주당 의원은 維新(유신) 때 金大中씨를 도우며 反독재운동을 펼친 朴世俓(박세경·작고) 변호사의 장남이자 大宇그룹 金宇中 회장의 경기고 5년 후배다. 3代, 4代 민의원과 국회사법위원장을 역임(1956년)한 朴世俓 변호사는 1980년 봄에 아들과 함께 新군부에 구속, 수감되었다.
朴 前 의원은 1963년 고려대 학생회장 시절, 구국항쟁 전국대학생총연맹위원장을 맡아 韓日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했고, 1970년에는 4·19 세대와 6·3 세대를 망라한 汎민주청년위원회 대표 최고위원으로서 재야 운동을 펼쳤다. 계엄포고령 위반 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1981년 크리스마스 때 刑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여년 간 운동권에서 활동한 朴 前 의원은 1983년 大宇그룹 이사로 입사했다. 1987년에 상무가 되었고 대우그룹 기조실 상무를 끝으로 1992년 大宇를 떠나 그해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등원했다. 金大中 총재의 민주당에서 원내 부총무를 지낸 그는 4년 후, 1996년 총선에서는 국민회의 지역구(전북 임실?순창) 의원으로 재선했다.
그는 金大中 정부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위원과 民主黨 총재 특별보좌역을 지냈으나 2000년 16代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2000년 2월 민주당을 탈당, 지금은 6·3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중이다.

『이 정권이 끝나면 공개할 생각』

기자를 만난 朴 前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金宇中 회장이 야당 시절의 金大中씨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사실입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大宇그룹에 있을 때 그 돈 심부름의 일부를 제가 했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을 밝힐 수 없습니다』
―돈 심부름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 데도 왜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까.
『1997년 여름, 국민회의 전당대회 때 저는 미국식 자유 競選(경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통령 후보로 鄭大哲(정대철) 의원을, 총재 후보로 金相賢(김상현) 의원을 밀었습니다. 공동 선거대책본부장을 제가 맡았습니다. 이 분들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제 생각에도 희박했어요. 그럼에도 그 일을 추진한 것은 체육관에서 박수나 치는 풍토에서 탈피하자는 것입니다.
韓光玉(한광옥) 의원이 저를 찾아와 金총재 지시라면서 「金相賢 의원은 경선에서 제외시켜라」고 요구했어요. 거절했더니 李鍾贊(이종찬) 의원과 韓光玉 의원이 번갈아 찾아왔어요.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기에 아태재단에서 金총재를 만나 제 취지를 말씀드렸죠. 金총재는 「金相賢이 나에게 흠집을 내지 말게 하라」고 했어요. 金총재는 金相賢 의원을 굉장히 싫어했지요. 그 일로 金총재 눈 밖에 났습니다』
―大宇에는 어떻게 입사했습니까.
『1981년 감옥에서 풀려난 후 안기부에서 민정당 입당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대신 직장 알선을 요청했더니 「金大中씨와 인연을 끊고,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어요. 1년 동안 쓰지 않고 버티다가 국회의원 출마 가능성도 희박하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 각서를 썼더니 大宇에다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朴 前 의원이 회갑을 맞이한 지난 12월4일, 기자는 朴 前 의원의 부인 金在玉(김재옥)씨가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응접실에는 朴 前 의원의 생신을 축하하는 난 화분과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보낸 祝電(축전)이 놓여 있었다. 金대통령은 祝電에서 「회갑 맞으심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건강한 마음으로 가정의 행복과 나라의 큰 장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부인 金在玉씨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金大中 내란음모사건 때 집을 에워싼 新군부 군인들이 남편의 소재를 말하라며 무릎을 꿇리고 목에 총부리를 겨누는 수난을 당한 이후 20여년 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외출하다가 갑자기 실신해 허리를 다쳤다고 했다. 탁자 위에는 약 봉지가 수북했다.
金씨는 기자가 자기 남편과 인터뷰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찾아왔다는 사실도 알았다.
기자가 大宇그룹 金宇中 회장의 이름을 거론하자 金씨가 반응을 보였다.
『제가 건강이 심상치 않아요. 죽기 前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해야 제가 살 것 같아요. 가슴에 묻어 놓으니 살 수가 없어요. 머리 속에 담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두통이 더 심해졌습니다. 金宇中 회장은 우리 가족을 정말로 따뜻하게 해준 분입니다』

『돈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어요』

잠시 숨을 가다듬은 金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마어마한 돈을 金宇中 회장은 사과 상자 같은 박스에 담아 우리 집에 보냈어요. 1988년 무렵입니다. 그 돈을 金弘一(김홍일)씨가 한밤중에 찾아갔어요. 저는 그 돈이 전달되는 현장을 본 사람입니다. 그 돈에서 풍기는 퀘퀘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어요. 그 냄새를 생각하면 지금도 골치가 아파요』
증언자 金在玉씨는 전남 麗水(여수) 출신으로 부흥부 장관을 지낸 金우평씨 손녀다. 김우평씨의 부인은 진명여고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金在玉씨의 아버지(金鎭煥)는 서울大 상대를 나온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다시 미술을 전공한 만석꾼 집안의 한량이었고 金씨 어머니는 高建(고건) 서울시장과 같은 집안이다.
이화여대를 나온 어머니의 강권으로 金在玉씨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서울大 음대 鄭鎭宇(정진우) 교수를 사사했다고 한다. 그후 지휘법을 배워 1968년에 제1호 여성 지휘자가 되었다고 했다.
金씨는 1972년 朴正勳 前 의원과 결혼했다. 朴 前 의원이 柳珍山(유진산)씨의 신민당에 입당,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내 한 몸을 불사르겠다」는 남편의 정치적 신조 때문에 金씨는 결혼 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남편이 일주일쯤 집에 안 들어오면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있고, 일주일을 넘으면 서대문 교도소장에게서 「옷 가지고 오라」는 전보를 받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쫓기거나 잡혀가는 게 남편의 직업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大宇에 입사하고, 국회의원이 되면서 金씨의 형편은 달라졌다. 국회의원 부인 시절엔 전공인 음악을 살려 국회의원 부인과 장관 부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연말에 남편들 앞에서 노래하는 파티를 주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金大中 대통령 당선 후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민주당 국회의원 부부동반 연말 모임에서 독창을 해 주목을 받았다.

『金회장이 우리 집을 사주었다』

金씨는 金宇中 회장의 고마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0년 金大中 내란음모사건이 터졌을 때 수경사 헌병 30~40명이 우리 집을 에워쌌어요. 서울 봉천동에서 전세살이를 하며, 애들 피아노 가르치며 근근이 먹고 살던 때였어요. 부잣집 딸이라고 도와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손도 벌리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셋방살이를 열네 번 했는데, 호남 갑부로 알려진 朴世俓 변호사의 아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믿지 않을 겁니다.
가회동(서울 종로구)에 살았던 제 아버지가 고생하는 딸이 걱정돼 봉천동으로 이사 왔다가 군인들의 핍박을 받아 그 해 돌아가셨습니다. 1981년 크리스마스 특사 때 남편이 刑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먹고 살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저는 친정으로 가기로 합의했어요. 그러던 중 大宇에서 일자리를 주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理事로 대우해 주고 승용차에 17평짜리 과천 아파트를 주었습니다. 참 고마웠어요. 金회장은 우리를 살려 준 분입니다』
―金宇中 회장을 만난 적도 있습니까.
『金회장은 임원들을 위해 부부동반 파티를 자주 열었습니다. 저도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어요. 경기고 후배인 남편을 신뢰했던 金회장은 저에게도 참 잘 해주었습니다』
―金宇中 회장이 특별히 잘 해 준 이유가 뭐라고 봅니까.
『남편 덕이죠. 남편을 예쁘게 보니까 가난하게 사는 저를 측은하게 생각했겠죠. 저를 만나면 金회장은 생활이 어렵지 않은지를 꼭 물었고, 연말이면 떡값 하라고 돈도 주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金在玉씨는 다시 한 번 金회장에게서 받은 경제적 도움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大宇에 다닐 때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피아노 가르쳐서 겨우 마련한 30평짜리 아파트를 날리게 되었습니다. 오갈 데가 없게 되니까 우리 가족에게 잘 해준 金회장 생각이 퍼뜩 납디다. 염치불구하고 길거리에 나가 살게 되었다고 전화로 하소연했죠. 회장실로 오라는 거예요. 갔더니 아파트 사라고 1억원을 줍디다. 그때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후 살던 집을 팔고 은행 융자를 얻어 좀더 넓은 아파트를 계약했다가 사기꾼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金회장을 다시 찾아갔지요. 집을 넓혀 보려다 사기당한 이야기를 다 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고 하기에 애들 학교 근처에 집이 있으면 한다고 하니까 大宇 계열사에서 짓고 있는 아파트를 알아본 후 지금 살고 있는 이 빌라를 준 것입니다.
저도 돈 많은 사람을 만나봐서 알지만 돈 내놓을 때는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가까스로 줍니다. 金회장은 상대방을 도와 줄 때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金회장 앞에 가면 절로 울음이 나옵니다. 金회장 앞에서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집에 중요한 게 간다. 앞집에 연락 잘 해줘』

―직접 만나본 金宇中 회장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머리가 비상한 분이에요. 파티 때 보면 계열사 임원들의 특징을 하나하나 거론합니다. 워낙 자주 비행기 여행을 하다 보니 고공병으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며 고생했어요. 金宇中회장이 남편에게 金大中 총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우리 집이 중간 연락처가 되었지요. 야당 탄압이 철저했던 全斗煥 대통령 시절이었으니까 첩보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아주 비밀스럽게 연락을 취한 끝에 두 분이 호텔에서 처음 만났어요. 남편은 자기한테 있었던 일은 다 저에게 말해 주기 때문에 알게 되었죠』
―金宇中 회장의 돈을 집에서 전달받을 때 어디 살았습니까.
『(서울 강남구) 신반포 한신3차 아파트 34동 10×호예요. 그 주소는 지금도 잊지 않아요. 남편이 맨날 도피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는 항상 아파트 1층을 얻었죠. 1층은 잡으러 올 때 도망하기가 쉬워요. 51평짜리 아파트였어요』
―그때 남편의 직책은 뭐였습니까.
『大宇그룹 연수원 담당 상무를 거쳐 부평 대우자동차 상무로 있었습니다』
―그 돈을 金宇中 회장이 보냈다는 것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남편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집에 중요한 게 간다. 앞집에 연락 잘 해 줘」 하면 알아들었지요. 이 전화를 받는 날은 너무나 무서워서 아무 일도 못 했어요. 남편은 돈이 전달되는 날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정치자금이 오가는 현장에 입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돈이 배달된 시간은 몇 시쯤 됩니까.
『밤입니다. 저녁 먹고 애들 재우고 난 뒤니까 밤 열한 시에서 열두 시 사이로 기억해요. 저는 방에서 부들부들 떨며 돈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너무 밤늦은 시각에 사과 상자가 배달되면 주위에서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도로 옆에 붙은 아파트였기 때문에 차가 들어오고 나가기가 쉬웠고, 아파트 출입구에 바싹 차를 댈 만큼 공간이 넓었어요. 경비실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걸 얘기하는 경비원은 없었어요.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大宇의 거물이 사는 집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도착한 돈은 어디에 보관했습니까.
『현관에서 들어서자마자 바로 왼쪽에 있는 서재였어요. 크기는 이 응접실의 반쯤 되었어요(7~8평 추정). 서재에는 보료와 책장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그 나머지 공간에 차곡차곡 사과상자를 쌓았습니다. 천장까지 가득했는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려 버렸어요. 그 시절 저는 우리 가족을 잘해주는 大宇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저렇게 돈을 주고도 大宇가 살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과 상자는 어떻게 운반되었습니까.
『컴컴한 밤인데다 무서워서 밖에 나가 보지를 못했어요. 들키면 죽는데요. 밖에서 누가 사진이라도 찍을까 봐 겁이 많이 났어요. 현관문만 열어 주고 운반하는 동안에는 불을 끄고 안방에 숨어 있었어요. 「사모님, 갑니다」 하면 운반이 끝난 거예요』
―사과 상자를 운반한 사람들 중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둘 내지 셋이 왔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나이로 볼 때는 과장급 정도의 직원이라 생각해요』
―돈이 배달된 날짜는 기억납니까.
『한신아파트에 살았던 1988년 무렵입니다. 선거를 전후해서 돈이 왔습니다. 1988년 총선 前에 온 것은 확실히 기억합니다. 돈 배달이 있은 후 집에 들어온 남편이 「이번에는 H, K씨를 도와 줘야 하는데」 하는 말을 했어요. 총선 때면 남편은 친구나 후배들을 도왔습니다. C 前 의원, L 現 의원도 남편이 大宇 다닐 때 도와 주었습니다』
―金宇中 회장으로부터 돈은 모두 몇 차례 배달되었습니까.
『세 번이에요』
―한 번에 온 돈이 얼마쯤 된다고 봅니까.
『쌓아 놓은 상자의 규모로 볼 때 어마어마한데 액수는 가늠할 수는 없어요. 그 어마어마한 돈 뭉치는 앞으로도 못 볼 거예요. 아녀자 입장에서 「저렇게 많은 돈을 나도 가져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안방에서 숨어서 했어요. 정치인의 아내가 된 지금, 쌓아 놓은 상자들의 규모를 생각할 때 상당한 금액이었어요』

金弘一씨는 새벽 한두 시쯤 돈을 갖고 갔다

―돈이 집에 도착하면 金여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金弘一 의원이 우리 집 바로 건너편의 한신아파트에 살았습니다. 金弘一씨는 그때 직업이 없어서 주로 집에 있었습니다. 弘一씨도 돈이 온다는 연락을 받아 대기하고 있었어요. (우리 집으로) 돈 배달이 끝나면 나는 아파트 앞 공중전화로 뛰어가서 弘一씨 집에다 「우리 집으로 전화하세요」라고 짧게 전화하면 눈치 챈 弘一씨가 집 밖의 공중전화 있는 데로 나가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어요. 서로 목소리를 아니까 이름은 밝힐 필요가 없었고요. 「도착했다」고 알려주면 弘一씨가 새벽 한두 시쯤 차를 갖고와 싣고 갔습니다. 그만큼 보안을 요했어요. 한밤중에 공중전화기 앞까지 뛰어다닌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많은 사과 상자를 金弘一씨는 어떻게 갖고 갔습니까.
『문만 열어 주고 내다보지를 않았어요. 운전기사에 운반자까지 합치면 몇 사람이 왔을 거예요. 옮기는 것을 기다리는 데 걸린 시간이 한참 되었어요』
―金弘一 의원과는 평소에도 아는 사이였습니까.
『金大中 내란음모사건 때 구속된 金弘一, 韓和甲(한화갑), 李協(이협), 咸允植(함윤식)씨와 죽은 오대영씨의 부인과 저 등 여섯 명이 감방 멤버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수없이 만나고 면회를 같이 다녔으니까 金弘一 의원과 그 부인을 잘 알지요. 저보다 나이 어린 弘一씨는 저를 형수라고 불렀어요』
―돈이 전달되고 난 뒤 金弘一 의원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습니까.
『그런 건 일절 없었어요. 한 번은 金弘一씨가 이른 새벽에 우리 집을 찾아와 「어제 갖고 간 100만원 다발에서 몇 장이 빈다」며 찾으러 왔던 일이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어요. 몇천만원이나 몇억원이 빈다면 배달사고라고 이해했을 거예요. 화가 나서 당장 나가라고 했어요. 분해서 눈물이 나는데… 억장이 무너져서 말이 안 나와요. 그런 일이 쌓이다 보니 제가 병이 안 나고 견딜 수 있었겠어요.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물어야 합니까』
―金弘一 의원이 돈이 빈다고 찾아온 사실을 朴 前 의원도 알고 있습니까.
『돈 전달이 끝나고 나면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다 얘기했어요』
―돈 전달은 왜 세 번으로 끝났습니까.
『우리가 한신아파트에서 이사를 갔기 때문입니다. 그후 우리 역할을 대신한 사람이 金모 의원입니다. 남편 말로는 金의원 시절엔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이 전달되었다고 했습니다』
―민감한 정치자금 심부름을 金회장은 왜 朴 前 의원에게 맡겼다고 봅니까.
『金大中씨와 친한 朴世俓 변호사의 아들이란 집안 배경과 남편이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삶을 믿었기 때문일 거예요. 金회장은 저 보고 「朴상무(朴正勳)는 明鏡(명경)처럼 맑은 사람이다」고 했어요』

전국구 공천에 23억원 냈다

―大宇에 근무하던 朴 前 의원은 어떻게 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까.
『金회장이 金大中 총재한테 「朴상무는 지역구를 원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얼마를 주면 朴상무에게 금배지를 달아 주겠느냐」고 물었대요. 金총재는 처음엔 지역구를 주겠다고 했어요. 전국구에는 낼 돈이 없으니까 우리도 지역구를 원했죠. 서울 동작구에서 출마한 적이 있고, 전북 임실이 고향이니까 두 군데 중 하나는 줄 걸로 믿었어요. 그런데 공천 발표 전날 金大中씨가 남편에게 「지역구가 꽉찼다」고 했다는 거예요. 남편에게서 지역구 공천을 못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金宇中 회장은 전국구로 바꾸면 된다고 했어요.
黨에서는 전국구 代價로 20억원을 요구했답니다. 우리 형편에 기가 막히는 액수지요. 金회장이 20억원을 주었습니다. 그 돈을 갖고 갔더니 黨에서는 남편에게 「아버지(朴世俓 변호사)한테 말해서 5억원만 더 구해오면 영수증을 써 주겠다」고 했다고 해요. 남편이 그 문제로 걱정을 하기에 저도 그 내용을 알았죠. 날짜도 없는데 5억을 어디서 만듭니까. 퇴직금 찾고, 이리저리 쫓아다녀 겨우 3억을 만들어서 갖고 갔어요. 남편은 이것밖에 못 만든다고 했대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전국구로 들어갔어요. 기막힌 일이었지요』
―전국구 공천을 받기 위해 3억원을 더 내놓았다는 것은 믿겨지지 않는데 金宇中 회장도 알고 있습니까.
『어느 사석에서 제가 그 말을 했더니 金회장은 「나는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며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朴 前 의원은 金회장한테 고마움이 많겠네요.
『남편은 15代 마지막 국회에서 신상발언을 통해 金회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남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몰락 당시 大宇그룹의 부채 비율은 現代그룹보다 적었다고 합니다』
―2000년 총선에서 朴 前 의원은 왜 공천에서 탈락했습니까.
『공천 탈락 발표 전에 남편은 金大中씨와 독대를 했어요. 이 자리에서 金大中씨가 남편에게 「네가 왜 金相賢을 따라다녀. 그래서 밉다니까」라고 했대요. 金相賢씨를 도와 준 게 결정적으로 눈 밖에 난 거예요』
기자는 金在玉씨를 여러 차례 만났다.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만날 때마다 질문을 거듭했다. 金씨는 집권 실세들의 신상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金씨는 이렇게 말했다.
『金宇中 회장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처음 입을 열었습니다.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만약 金弘一 의원 측에서 제 인터뷰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공개적인 기자회견을 가질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치인인 남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한 내용 중 金宇中-金弘一 두 사람 간의 정치자금 부분 외에는 보도하지 말아 주십시오』

金회장 대리인:『확인해 줄 수 없다』

198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이고, 1988년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金大中 총재의 평민당은 金泳三 총재의 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었다.
大宇그룹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이었던 金宇鎰(김우일) 前 상무는 『大宇 기조실 출신의 두 임원이 각각 여당과 야당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달았는데, 그 중의 한 명이 朴正勳 前 의원이었다』고 말했다.
金상무는 金회장과 金大中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金大中 비자금 사건이 터진 1997년 시점에서는 두 분의 사이가 원만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1997년 대통령 선거 무렵 金大中 후보가 金회장을 찾아 온 적이 있는데 나갈 때 보니 金후보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고 화가 나 있었다』고 말했다.
大宇 기조실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은 『朴正勳씨는 大宇그룹이 1980년대 초, 운동권 출신과 해직기자들을 받아들일 때 입사한 경우다. 金회장이 경기고 출신의 정계, 관계 인사들을 초청한 연말 모임에서 朴正勳씨 부인이 노래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金宇中 회장의 법률 대리인인 石鎭康(석진강) 변호사는 金在玉씨 증언에 대해 『金宇中 회장과는 연락이 안 된다.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金弘一 의원 반박
『누가 나를 음해하는 것. 사실이 아니다』

『할 말이 없다. 만나고 싶지 않다』

朴正勳 前 의원 부인 증언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12월8일 金弘一 의원의 서울 서교동 집을 찾아갔다.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金의원을 만나려면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밤 여덟 시 반에서 아홉 시 사이에 찾아가면 기자들에겐 문을 열어 준다』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의 조언에 따라, 여덟 시 조금 넘어 서교동에 도착했다.
집으로 통하는 골목 양쪽에 戰警(전경)들이 서성대고, 집 담벼락에 경찰 임시 초소가 설치돼 찾기는 쉬웠다. 집 비서(의원회관의 비서진과 별도로 집에 상주하는 비서가 있었다)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며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명함을 건네주고 기다렸더니 『할 말이 없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연락이 왔다.
집 비서에게 『金의원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다』고 했더니, 『용건을 말해 주면 대신 전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1987년 무렵 大宇 金宇中 회장이 朴正勳 前 의원의 한신아파트로 거액의 돈을 보냈고, 이 돈을 金弘一 의원이 밤에 찾아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고, 증언자가 있는데 사실 여부를 알고 싶다』고 말해 주었다. 그날이 12월9일 일요일이었다.
보고 후 바로 연락을 주겠다는 그 비서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12월10일 밤 여덟 시쯤 다시 서교동을 찾아갔으나 『귀가하지 않았다』며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밤 열 시쯤 다시 벨을 누르려고 하는데 마침 방문객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 틈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문 앞에서 두 명의 집 비서가 기자를 제지했다.
『의원님의 심기가 불편하다. 방금 온 손님도 쫓겨 나갔다. 오늘은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 달라』(비서)
『질문지를 金弘一 의원에게 전달만 하고 돌아가겠다』(기자)
『질문지는 의원회관에 갖다 달라. 우리는 받을 수 없다』(비서)
문 앞에서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金의원이 기자를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金의원은 응접실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발을 의자 위에 올리고 있었는데 불편한 듯했다. 그 옆에 앉은 기자는 질문지를 꺼내 金의원에게 건네주려고 하는데 金의원이 질문지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질문지는 金의원과 기자 사이의 탁자 위에 놓였다.
기자는 질문지를 읽었다.
① 의원님께서는 1987년 무렵 서울 강남구 신반포에 있는 한신아파트에 거주한 적이 있습니까?
『예』
② 한신아파트 거주 당시 朴正勳(前 민주당 의원. 1987년 당시에는 大宇그룹 상무)씨가 그 근처에 살았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같이 살았어요』
③ 그 무렵 金宇中 大宇그룹 회장은 평민당 金大中 총재에게 보내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朴正勳 당시 大宇그룹 상무 아파트로 보냈고, 이 돈을 의원님께서 찾아 갖다는 목격자와 증언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부인하는 취지의 말 같았으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④ 증언자에 따르면 大宇그룹 직원들이 밤 열 시경 朴正勳 상무 아파트에 돈을 내려 놓고 가면, 그 몇 시간 뒤에 의원님이 朴正勳 상무 아파트에 찾아가 돈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사실입니까?
『왜 밤에 남의 집에 가요』

『대통령 귀국 후 보고하고 말하겠다』

기자는 호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녹음 스위치를 누른 후 탁자 위에 올렸다. 金의원이 한 말을 정확히 기록하려면 녹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질문을 시작했다.
―목격자와 증언자의 진술은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민감한 사안이므로 金의원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주십시오.
『누가 나를 음해하는 거요. 사실이 아니에요』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비서가 기자에게 『녹음하는 거냐』고 물었다. 『사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녹음하고 있다』고 말하자 金의원이 『녹음기를 뺏으라』고 비서들에게 지시했다. 기자는 녹음기를 빼앗겼다. 기자는 녹음기를 빼앗아간 비서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金의원도 부엌으로 따라 들어 왔다.
기자는 『녹음기를 돌려 주지 않는 한 이 집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부엌에 있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金의원은 『당신의 질문과 관련해 모씨(이름은 밝히지 않는다)에게 협조를 구했다. 연락이 갈 거다. 그 사안은 어른(金大中 대통령)께서 귀국한 후 먼저 보고를 드린 후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화가 난 순간의 金의원 발음은 분명했다. 대통령께 보고 후 대답할 테니 오늘 인터뷰한 내용은 지워 달라는 것이 金의원의 요구사항이었다. 녹음기는 돌려줄 수 있지만 녹음 테이프는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녹음 테이프에는 기자가 다른 사람과 인터뷰한 내용이 녹음돼 있었다. 기자가 『녹음 시간은 1분도 되지 않는다. 정 원한다면 金의원 부분은 지우겠다』고 하자, 金의원은 『그렇다면 내 비서 입회下에 녹음을 지우라』고 말했다.
기자는 金의원에게 사과했고, 金의원도 미안하다며 악수를 청했다. 이날 밤 기자는 金의원 비서진이 보는 가운데 녹음을 지웠다. 비서진은 녹음 테이프 앞뒷면을 다 확인한 뒤 테이프를 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