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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찡하네요...(퍼옴)


BY pyy78 2002-05-10

저 아래에도 시장후보에 관한 글이 있네요....
우연히 김민석 후보 홈페이지에 가서 구경하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치인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김후보가 다시 보이네요. 길지만 한번 읽어보세요.

www.goodseoul.or.kr -My Story에서 퍼옴.

민웅(民雄), 민화(民話), 민석(民錫). 우리 삼형제는 백성 민(民) 자(字) 돌림이다. 삼형제!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이 단어가 이제는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의미로 다가온다.

작은형은 내가 교도소에 있던 1987년 초, 스물 아홉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형은 큰형이나 나와는 달리 소극적이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면만 부각시켜 강조하려는 주위의 시선이 작은형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강한 의지나 적극성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여덟 살 위인 큰형이 내게 ‘학구적인 자세와 진지한 인품, 그리고 대쪽같은 기질’의 상징이었다면, 여섯 살 위였던 작은형은 ‘섬세함과 재치 있는 순발력’의 모델이었다. 작은형은 주위의 여학생들에게 늘 인기가 좋았고 어릴 때부터 잡기(雜技)를 싫어했던 내게 내기에서 딴 구슬을 한 웅큼씩 가져다주기도 했다.

“너같이 둔해서 어떻게 연애를 하겠냐?”

작은형은 여자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를 내 앞에서 흔들며 나를 약올리곤 했다. 별 무리 없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던 큰형과 나와는 달리, 작은형은 유난히 학교 운이 없어서 일찍부터 사회 생활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에서 작은형은 비로소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일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어 얼마 뒤에는 집에서 독립해 나갔다. 그래서 내가 대학생이 된 뒤로는 가끔씩밖에는 작은형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런 형을 86년에 재판정에서 언뜻 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민석아, 건강하니?”

“응, 괜찮아, 형.”

호송차로 끌려가면서 이렇게 안부를 주고받은 이후, 병원 영안실에서 영정으로 마주 대하게 된 것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와 친하게 지내던 주임이 갑자기 빨리 나갈 준비를 하라면서 구속 전에 입었던 사복을 내주었다. 아무도 내게 사복을 입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그저 잘 다녀오라고만 했다. 나는 차를 타면서 주임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그는 나의 외출이 ‘사회 참관’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사기 충천하여 교도소 밖으로 나갔다.

‘야,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이게 웬 횡재인가? 어디를 참관하러 가든 밖으로 나온 게 어디야.’

달리는 차의 속도감이 기분 좋게 와 닿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속도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나는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주 교도소를 떠난 지 두 시간도 못 되어 서울 성동 구치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은 후 다시 출발해 도착한 곳이 광진구에 있는 방지거 병원이었다. 병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일들은 한 편의 슬라이드 영화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차가 병원 정문을 들어서서 모퉁이를 돌아간 순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사촌형이 나를 발견하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흰색 철문에 ‘영안실’이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 그고 그 문에는 ‘고(故) 김민화’라는 글씨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써 붙여져 있었다.

내 머릿속은, 돌아가던 필름이 갑자기 끊겨 버려 하얀빛만 쏟아지는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처럼 텅 비어 버렸다.

“민석아! 네 형이 죽었다.”

양옆에서 나를 잡고 있던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영안실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고 달려와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슬픔과 고통으로 스러져 가시는 어머니…….

‘정말로, 정말로 작은형이 죽었단 말인가!’

무언가 말을 해야 될 텐데 가슴만 답답할 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작은형은 그날 아침에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형은 택시 뒷자리에 탔다가 합승하기 편하도록 기사 옆자리로 바꿔 앉았는데, 달려오는 차와 정면으로 부딪쳐 형 혼자만 변을 당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달려들어 상복으로 갈아입혔다. 그제서야 나는 나의 ‘사회 참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상가에 가 본 일도 없는 내가 작은형의 영정 앞에서 상복을 입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형에게 분향을 하고 그 영 정 앞에 머리를 숙이면서, 나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앉아 머리 숙여 묵념만 하고 싶었다. 이게 정말 현실이란 말인가? 여기에 와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는데, 낯선 얼굴들이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보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 무기징역 받은 이태복이 어미다.”

“난 재일교포 이철이 장모야.”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내 건강을 묻고, 슬픔을 위로하고, 눈물 흘리는 그분들은 징역을 선고받고 10년, 20년씩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는 장기수의 어머니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위로받아야 할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해야 할 입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교도소로 돌아온 나는 낮에 그토록 바라던 독방에 들어앉아, 비로소 밀려오는 슬픔과 두려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했다. 형의 영정 앞에서 그토록 멍청하게 굴었던 나 자신이 죄스러웠고, 형에게 미안했다.

이틀 뒤에 나는 다시 교도소를 나와 서울로 향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교도소 수감자는 부모상을 당해도 한 번 나왔다 가기가 어려운데 내가 두 번씩이나 외출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머니의 읍소에 응하여 애써 주신 김수환 추기경의 덕택이었다고 한다. 지금 까지도 그 일에 대하여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지만 마음만은 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다.

형은 벽제에서 화장되어 절두산 성당 곁에 있는 한강에 뿌려졌다. 나는 형의 유골을 뿌리면서 그동안 내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바보야!”

“우리 형제 중에 돈벌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내가 돈벌어서 형하고 민석이 밀어줄게.”

사고가 나기 바로 전 해, 작은형은 미국에 출장갔다가 큰형 집에 들러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큰형은 81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지금까지 정치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작은형의 장례에도 못 온 큰형은 미국에서 나를 만났을 때 작은형 얘기를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시간이 갈수록 형을 기억하는 시간보다 잊곤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다. 서너 해 전만 해도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보름에는 한강에 거북이와 붕어를 방생하기도 했는데……. 내가 결혼하기 전 에 형에게 꼭 맞는 형수감을 찾아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리라는 다짐도 결국은 못 이루고 말았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세상에 덕이 되는 일을 한다면, 그 바탕에는 분명 일찍 세상을 떠난 작은형의 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형의 영혼이 편안히 쉬기를 다시 한 번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