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줄일 것인가, 끊을 것인가?
창비게시판에서 펀글임다. 글쓴이 햐암
지금 아내는 빨간 투쟁복을 입고 상경, 투쟁 중이다. 임대 아파트 분양가를 낮춰달라는 서민들의 행렬이 관광버스 아홉 대로 이어졌다. 없는 집안에 시집 와서 악착같이 살면서도 남편 이름으로 당당히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하고 13년을 같이 살고 있다. 선생 생활 15년 내내 집 한 채 없는 팔불출이 글 쓴다, 술 먹는다, 전교조 투사한다 변죽대고 다니니 아내의 불신임에 이의가 없다. 어쩌랴. 밖에 나가 알량한 대접받는 것을 은근하게 즐기고, 밖에 나가 하는 일이 집에서 하는 일보다 재미 있으니 이 타고난 역마살에 남일 하는 재미로 사는 것 어쩌랴.
그러면서 항상 집에서는 무기력한 모습 보이고 이불 한번 제대로 개지 않고, 청소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윗도리나 바지나 벗었다 하면 파충류 허물처럼 방바닥에 남겨 놓으며 산다. 양말은 벗었다 하면 참새집이 된다. 양말 좀 제대로 펴서 세탁기에 넣어달라는 아내의 요구는 애절하다. 아이들과 동물원 한 번 안 가고, 아들 녀석 개울 가자, 딸 아이 스케이트장 가자, 아무리 졸라대도 한방제제 숙취약만 들입다 쟁여대며 이리 핑계 저리 핑계 오후 핑계 저녁 핑계 다음 핑계 핑계만 일삼는데, 여섯 살 난 늦둥이가 "아빠는 술퇴보! 아빠는 약속도 안 지키고!"하며 흑흑거릴 때면, 반성은커녕 저토록 세뇌시킨 마누라만 탓하면서 억장이 무너지고 아랫도리 늘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사는 아파트에 분양가 낮추라고 추워서 못 살겠다고 빨강 파랑 형형색색 플래카드가 붙었던 것인데, 그때서야 내 사는 곳 임대 아파트라는 걸 뚜렷하게 인식하고 주제 넘게 촐랑대던 지난날을 탓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 사람들이 다운타운을 좋아하고 넓은 평수를 좋아하고 가진 것보다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지를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니, 늦었다고 한탄한들 뉘 도와주며, 지금부터 시작한들 나아질 것 뭐 있겠느뇨. 허나......그러나......
그래, 다짐한다. 아내가 투쟁복 챙겨입고 아침 일찍 상경하는 모습에서 나의 자화상을 보았다. 조금 전 전화했더니 아내는 동지들과(?)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다. "여보, 나 지금 바쁘니까 끊어. ……산 자여 따르,,, 뽀로록" 전화는 왜 그리도 냉정하게 끊어지는 것인지. 그러나 저러나 허구헌날 집안에서 때론 직장에서 일만 해 오던 아줌마가 투쟁가도 못 부르고 입술만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 하긴 지 또한 질곡의 80년대에 대학물 먹었으니 좀 갑갑하긴 해도 부를 만은 할 것이다.
그래, 술을 줄이는 거다.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못 만나게 되겠지만 일단은 돈이 굳을 것이다. 그 돈으로 책을 사야지. 그만큼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그 시간은 아이들과 신나게 노는 거다. 그만큼 건강해질 것이다. 술만 마시면 화끈하게 야하게 침대를 부술 거라고 너스레를 떨어놓고 샤워까지 다해 놓고 누웠다 하면 코를 골고 마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그만큼 정력도 강해질 것이다. 그만큼 독서 시간도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술을 줄이는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 오늘 만큼은 아내에게 낮아지고 싶다. 서울에서 돌아올 아내를 위해 놀랄만한 사건을 만들자. 양말을 벗어 예쁘게 펴서 세탁기에 넣어야 한다.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 바지를 벗어 꼭 바지걸이에 걸자. 막내에게 밀린 수백 권의 동화책을 천천히 읽어주자. 언니 오빠의 수학 문제도 풀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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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늘 그랬던가요? 아, 예...예... 알겠습니다. 그럼 있다가 뵙겠습니다." 하마터면 오늘 저녁에 있을 노동 운동사 강의를 잊을 뻔 했다. 술을 끊어야 하는가, 줄여야 하는가?
햐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