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억지-뻔뻔/ 홍세화
“1. 피고는 원고에게 금 500,000,000원 및 이에 대한 소장 송달 익일부터 완제일까지 연 2할5푼의 비율에 의한 금 원을 각 지급하라. 2. 소송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3. 위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원로 언론인 정경희씨에게 건 손해배상 소송의 청구취지 내용이다.
마침내 물리적 탄압의 시기를 넘기고 있다는 역사 진보의 낭보일까? 권력자와 사용자들이 가압류 처분을 이용하여 노조의 취약한 물적 토대를 흔듦으로써 노동운동의 분쇄를 획책하고 있듯이, 한나라당은 자기들의 입맛에 쓴 ‘죽비 소리’에 재갈을 물리려고 ‘5억원 손해배상’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그들은 칼럼을 실은 〈한겨레〉는 건드리지 않고 칼럼을 쓴 개인만 공격하는 교활함을 보였다.
손해배상 청구 소장에서 한나라당은 정씨의 칼럼 ‘대쪽-귀족-언론’(한겨레 6월3일치)이 “전혀 허위사실이거나 추측성 비난에 불과하여 오로지 한나라당 및 그 대통령 후보를 비방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 다수를 차지하는 제1당이 합리적 논거에 기초한 토론을 통해 칼럼 내용의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법의 강제력을 요구했다는 점은 그들이 힘의 논리에 기댄 극우의 성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소장은 특히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사유화하여 선거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못박고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세풍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은 서상목 전 의원에 대한 체포, 수사를 막기 위해 1년 동안 방탄국회, 식물국회를 만들었던 정당은 한나라당이 아니고 ‘딴나라당’인가. 공격을 ‘최선의 수비 전략’이라 하지만, 히딩크의 그것이 기본을 갖춘 합리성에서 비롯되었다면 한나라당의 그것은 억지에 기초한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나라당의 소송 행태는 징계되지 않는 오만이 공격적인 뻔뻔스러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적확한 예를 보여준 것이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탈세한 언론사를 ‘언론 자유’의 미명 아래 비호했던 그들이 일 개인에 대한 거액 소송 행태가 언론 탄압이 된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또 이회창 후보의 100평짜리 빌라 사용에 대한 지적도 문제삼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후보의 대국민 사과 발언은 선거용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던가.
어느 사회나 엘리트는 양성된다. 문제는 엘리트들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한국의 ‘국가귀족’들에게서는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은 찾기 어려운 반면 특권의식만 발견된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또한 그 전형을 보여준다. 대권에 도전하는 국가귀족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응당 며느리가 한국사회 상층 일부의 원정출산 유행을 따르지 않도록 했어야 마땅했다. 이미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의 풍파를 거쳤음에도 다시금 며느리의 원정출산 의혹을 사는 것은 이 후보가 어떤 시선으로 국민을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5년 전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가 불거졌던 당시 한나라당이 대책회의를 열었다는 의혹과 함께 당시 이 후보의 특보가 병무청장을 만났다는 사실이 〈오마이뉴스〉와 〈신동아〉 최근호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그런 적 없었다”고 부인했다가 “만나기만 했을 뿐이다”라고 말을 바꾼 한나라당이 두 매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도 유분수’인데, 오직 깨어난 시민 의식만이 그 뻔뻔스러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 정경희씨에 대한 한나라당의 소송이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추신 : 이 칼럼은 몇억원짜리 소송감이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