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무릎을 베개삼아 누워 잠들면 바람이 솔솔 시원했다.
엄마는 한손으로 이마를 쓰다듬어 주셨고
한손엔 부채 바람을 주셨다.
나어릴적 울엄마가 부채질해 바람이 솔솔 시원한거 모르고
엄마는 바람을 몰고 다닌다 생각했었다.
울엄마 언제나 자식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울엄마 가정이란 울타리 잘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우리 사남매 모두 그덕에 잘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사남매 울엄마 마음 조이는 문제아 없이 모두 반듯했다.
울엄마는 정도에 맞게 언제나 사람의 도리를 강조했었다.
울엄마는 남들에게 신세지기 보다는 베풀며 지내왔다.
나 어릴적 우리집 아래 반장 아저씨네 벙어리 딸이 있었다.
그벙어리 이름은 영자였다.
영자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우린 "영자야"불렀고
영자는 우리가 불러주고 함께 놀아주는게 좋다 했다.
우리동네 반장 아저씨는 오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제대로 건사한 자식이 없었다.
아저씨 또한 배움에 대한 의욕이 없어 자식들 교육은 딴세상 이야기였다.
서울서 내려와 정착한 동네는 시내가 아니었다.
우리집이 망해서 중앙시장터에 살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시내와 그다지 멀지않은 곳이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유일하게 농사를 안짓는 집은 우리집 이었다.
우리집엔 전화와 텔레비 냉장고가 다있어
언제나 사람들이 북쩍였다.
여름날이면 난 영자네 얼음 날라주러 다녔다.
울엄마는 영자 엄마가 농사지어 부식하라 주시면 대신 줄께 없다며
시원한 어름을 양재기에 담아주셨다.
난 어름이 녹을까 달려라 하니였다.
"아줌마!!!!!안나에요.울엄마가 얼음같다 드리래요"
난 얼음 양재기를 던져 놓고 영자 방으로 들어가
영자에게 손짓 발짓하며 내가 유치원에서 배워온 노래와 춤을 가르쳐 주었었다.
영자는 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기를 바랬었다.
그러던 어느날 울엄마는 영자를 충주에있는 성심농아원에 입학시켜주었다.
성당 단체에서 운영하고 수녀님들이 교사라 안심할수있는 기관이라 했었다.
말못하던 영자는 농아원 입학해 글씨도 배우고
성격도 명랑해졌다.
영자엄마는 울엄마에게 큰 신세를 졌다며 매년 배추와 옥수수를 한소쿠리씩 주었다.
울엄마는 언제나 남의 일에 앞장섰다.
난 어릴적 이런 엄마가 싫었다.
난 엄마의 조수라 심부름 할께 너무 많았다.
우리동네 외상 장부부터
중앙시장 외상장부까지 모두 이름은 안나네였다.
나보다 어린 애들도 안나라했고
아니 지금도 친정가면 사방 십리안에선 안나네로 통한다.
우리옆집에 살던 미자네도 울엄마에게 큰신세를 졌었다.
미자네는 형제가 칠남매였다.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모두 집에서 빈들거렸다
울엄마는 신부님께 부탁해 요셉오빠와 마지하오빠를 취직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리아 언니는 서울연희동 성당에 신부님 밥해주는 찬모로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마리아 언니가 잘있나 궁금해 아줌마랑 서울에 왔는데
촌시럽던 마리아 언니는 서울물 먹어선지 때국물 빠졌고
깡통에 들어잇는 맛난 쿠키와 켄으로된 야채쥬스를 주었었다.
난 나중에 그쥬스 이름이 v8이란걸 알았다.
울엄마는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처럼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
봉사햇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육열을 불붙였다.
울엄마 덕에 미자엄마는 까막눈 신세를 면해서 지금은 책도 읽으신다.
영자는 농아원을 졸업하면서 꽃꽃이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영자네 화원을 한다 들었다.
그리고 집에서 바보처럼 굴던 영자는 이제 신여성이 되었다 들었다.
영자네 집은 현찰이 없는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지금은 땅값이 올라 돈방석에 올랐다한다.
가끔은 반장 아저씨 옛정 잊지못해 울아버지를 찾아오신다.
우리는 그동네를 이사한지 이십오년이 훨씬 지났지만
당시 울엄마의 정열에 감동받아 새로운 인생을 사는 영자가 아저씨는 대견하다 했었다.
마리아 언니는 신부님 밥해주는 찬모로 있으며 신여성이 되었고 지금은 고향으로 내려와 과수원을 경영한다 들었다.
울엄마는 울가족들 뿐만 아닌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친절했고
언제나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여자였다.
지금은 건강 때문에 큰활동 못하지만
교도소 무기수 상담자와 양로원 청소 봉사를 오래하셨다.
자식들 교육비에 늘 쪼들려 허덕여서
엄마에겐 금전적인 봉사는 어려웠다.
울엄마는 언제나 가슴으로 봉사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추운 겨울 양로원 이불 빨래와 노인들 목욕을 시켜드렸다.
교도소에서는 상담자로써 오랫동안 활동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울엄마의 스트레스 탈출구가 봉사였는지 모른다
난 아이 돌보며 지친 피로를 인터넷으로 풀지만 엄마는
몸소 체험하며 봉사로 스트레스를 풀었던것 같다.
울아버지 월급은 언제나 부족했을텐데
우리들 등록증이 만만치 않았기에 엄마의 스트레스는 과중했을거다.
울엄마와 동지격인 비슷한 처지의 성당 아줌마들은
언제나 형님 아우하면서 금반지 계를 했다.
현찰이 오가는것도 아니고 언제나 금반지 계를 했었다.
멤버도 바뀌지 않고 울엄마는 계주 ,난 곗돈 심부름꾼이었다.
대여섯명 엄마 동지들은 한달에 한번씩 계태워주며 그반지를 모았고 등록금이 모자를때면 언제나 금반지를 팔았다.
팔았다 또 만들었다 울엄마는 우리가 모든 학위를 마칠때까지 반복했다.
울엄마와 함께 계를 이끌어온 아줌마들은 지금 모두 박사님 어머님이시다.
인고의 세월을 거친 대단한 아줌마들!그녀들은 이제 박사님 ,교수님어머님으로 대접받고 사신다.
울엄마 친구들 보면 모두 똑같다.
수수한 외모에 전도부인 같은 커다란 가방!
육십이 지나 칠십을 바라보믄 나이,그녀들의 스타일은 변함이 없다.
나 어릴때 엄마 친구집 돌아다니며 반지 곗돈값 받아오는거 정말 싫었는데 울엄마는 꼭 나한테 시켰다.
그리고 아줌마들은 내가 가면 무척 좋아하셨고 언제나 머리 쓰다듬어 주셨다.
금방에 심부름 갈때도 그랬다.
금성당 아저씨는 안나는 이담에 여장군 할거라며 심부름 잘한다 칭찬했었다.
지금 내가 울엄마 입장이라며 난 울엄마 처럼 살지 못한다.
아니 자신이 없다.
울엄마 가진거 없었지만 언제나 당당하셨다.
공무원이 울아버지 월급날은 매달 이십일!
이십일일은 외상값 값으러 중앙시장을 돌아야했다.
울엄마는 내게 돈지갑을 만들어 주어
도시락 반찬은 철도상회,속옷은 성심양행,부식은 형제상회
난 엄마가 시키는 대로 심부름 했었다.
매달 내가 만나는 명단이었다.
어릴적부터 난 작은 사회를 배우고 자랐다.
내게는 사회와 타협하는 융통성을 외상값 값으며 배웠다.
"울엄마가 짜투리 남겨야 또간다고 조금씩은 남기랬어요"
난 너스레를 떨정도였다.
울엄마 기초 생활비는 언제나 외상이었지만
자식들 교육비는 일등으로 처리하셨다.
울엄마 오빠들이 유학가있는동안 "콩밭메는 아낙네야~~~"
난 이노래가 정말 싫었다.
엄마에게 나름대로 한이 많으셨나보다.
울엄마 이제는 다양한 선곡으로 노래한다.
그리고 당당한 할머니로 멋진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엄마는 항상 자신있는 멋진 당당한 여자였다.
난 울엄마 반쪽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작년 울엄마 한국대표로 포크댄스 공연을 다녀오셨다.
이제 엄마의 고생은 끝난지 오래되었다.
울엄마 자식들 뒤바라지 모든걸 희생했지만
버팀목이 되는 아들과 딸이 있으니 언제나 행복하다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