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406

이후보 '부친 정신대 동원설' 해명


BY cimano 2002-08-22

<이후보 `부친 정신대 동원설' 해명>


(대구=연합뉴스) 민영규기자 =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가 21일 일제때 군대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로부터 `부친이 정신대 동원에 앞장섰다는 얘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맞지 않다"고 해명하며 어이없어 했다.

대구를 방문중인 이 후보는 이날 성서공단을 둘러본 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인근의 작은 호프집을 찾았다.

이때 군대위안부 할머니 두명이 이 후보 일행이 앉은 자리로 찾아와 이 후보에게 "이산가족 상봉때 북한에 갔다 왔는데 북한 사람들이 `이 후보의 부친이 북한에 근무할때 정신대 동원에 앞장섰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이 할머니들은 또 "이번 8.15 행사때도 북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부친이 북한에 근무한 시점은 제가 태어난 1935년 전후"라며 "정신대는 40년 이후 있었던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말하고 "북한이 그런 식으로 (음해)한다"고 해명했다.

이 후보는 군대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이같은 대화 내용을 자신과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기자들에게 스스로 소개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youngkyu@yna.co.kr

그럼 이건 또 무신얘기?

<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실체 >

수많은 자료에 의하면 일본 육군은 군인들에 의한 빈번한 강간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상해에 위안소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육군의 위안소는 일본 해군의 위안소 제도를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1932년 3월 이전에 이미 상해의 일본 해군에 의해 해군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2년 경부터 일본군 점령지에 설치되기 시작한 위안소는 1937년 말에 질적인 전환을 맞아 종전시까지 계속되었다. 점령지의 확대와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위안부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일본군 및 육군성의 체계적 정책이 시행되었고 그것은 파견군 수준의 지시에서 다시 일본군 및 육군성의 지시로, 나아가서 육군성의 총체적 기획으로까지 수준이 높아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가 급증하였다. 상해사변이 종료되고 일본군에 의해 남경이 점령되면서 군의 명령체계를 통해 조직적인 위안소 설치와 관리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위안부 징집에는 일본군과 경찰이 조직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들은 조선과 일본, 중국 그리고 대만 등 각지에서 다각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1938년 말까지 상해, 항주, 구강, 무호, 한구, 남창, 아모이 등에 70여 개가 넘는 위안소가 설치돠었고 1000명 이상의 위안부들이 있었으며 이중 다수가 조선인 여성들이었다.일본이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 입안한 비밀문서인 '조선민족대책'에는 조선의 청장년을 일본 내지에 연행하여 탄광 및 군수공장 기타에 분산시켜 사역한다.'는 조항과 함께 '조선의 미혼 여자를 군대의 특수요무에 충당한다.'는 항목이 있다. 육군성이 주도하고 내무성, 외무성, 일본의 정부 기관들과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가 적극 협력하는 체제였다. 1941년 7월부터 일본군은 對소전을 준비하면서 조선에서 2만명의 위안부를 모을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8,000 명 가량의 조선인 여성을 징집하여 중국 동북으로 보냈다. 이들 위안부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인신매매와 취업을 미끼로 한 유혹 등 다양하고도 비인간적인 수법을 동원함으로써 위안부 당사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전장이 확대되면서 위안소 설치도 늘어났다. 전투가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지 위안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위안소는 군대 주둔지 어디에나 위안소가 설치되었다. 1943년 1월 현재 일본군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북부 중국에 100개소, 중부 중국에 140개소, 남부 중국에 40개소, 동남아시아에 100개소, 남해에 10개소, 사할린에 10개소 등 모두 40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 일본군 1개 사단에는 5내지 6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일본 및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다. 전선이 확대되면서 일본의 매춘부나 일반 여성 동원만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게 한 것이다.

194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량의 조선 여인들이 남방 지역으로 파송되었는데, 1943년 당시 무한 병참 위안계장의 회고에 의하면 한구(漢口) 적정리에는 육군 위안소가 20개소가 있었으며 그중 11개소는 조선인 경영으로 조선인 위안부 15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조선인 위안부 대부분이 매춘 경력이 없는 18~19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1943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물자 및 인력 동원이 힘들어지자 민간에 맡겨서 위안소를 만들기가 힘들어졌다. 오키나와와 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일본군은 직접 위안소 설립에 나섰고 이에 따라 위안부 동원도 더욱 더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 조선에서의 강제동원뿐이 아니라 점령지에서의 현지인 위안부 강제동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