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에서 펌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부친 이홍규 옹(97·변호사)의 '친일논쟁'이 이번 대선에서도 다시 쟁점으로 부각될 조짐인 가운데 이 후보의 부친이 일제말기 '마루야마 아키오'(丸山晃生)라는 왜색이 짙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된다.
이 후보 부친의 친일시비는 97년 대선 당시 '괴문서 파동'을 겪으면서 이미 논란이 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옹의 일제하 검찰서기 경력 정도만 거론됐을 뿐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이 옹의 창씨개명이 공식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이 후보가 한나라당 총재 시절 부친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 부친의 생가를 복원하겠다고 밝히면서부터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후보 부친의 창씨명('마루야마')과 검찰서기 경력 등을 거론하며 반대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 옹의 구체적인 창씨개명 관련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 1942년판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등장한 '丸山晃生(마루야마 아키오)'. <역사비평>은 가을호에서 이 이름이 이회창 후보의 부친 이홍규 옹의 창씨개명이라고 잠정결론내렸다. 당시 이 옹은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했는데 월급은 70원이었다.
최근 발간된 계간지 <역사비평> 가을호는 1942년판(발행은 1943년도임) '조선총독부 급(及)소속관서 직원록'(조선총독부가 해마다 발행했던 관리명부)을 근거로 "마루야마 아키오가 바로 이회창 아버지 이홍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잠정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1942년판 <조선총독부 직원록>과 '이홍규=마루아먀 아키오'
<역사비평>은 '지도자와 검증'(이회창-노무현-박정희)을 주제로 한 시평(時評) 형식의 글('책머리에')에서 "친일파의 개념규정이 다양하니 이홍규가 친일파인가의 여부도 논외로 하자. 이런 것들을 논하기 전에 먼저 가장 기초적인 사실, 즉 일제강점기에 이홍규가 어떤 지위에 있었고,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이회창 후보 부친의 '과거검증'에 들어갔다.
<역사비평>은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발행했던 관리명부인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근거자료로 이 후보 부친의 일제시기 '지위'와 '행적'을 쫓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월간 <말>지를 통해 밝혀졌던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이 후보 부친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홍규는 해주지법 판임관(현 6급 이하 공직에 해당함) 견습(1930∼31)으로 출발하여 해주지법 송화지청(1932∼34)과 서흥지청(1935∼37), 광주지법 검사국 장흥지청(1938∼39)과 광주지법 검사국(1940) 등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그동안 국내에는 1941년 이후 조선총독부 <직원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월간 <말>의 당시 취재기사도 1940년까지의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역사비평>은 "이홍규의 친일행위 여부를 구태여 가리려면 더 중요한 시기 즉 1941년부터 해방되기까지의 기간이 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대해서는 근거 있는 설명을 발견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최근 발굴한 1941년판과 1942년판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제시했다.
▲ 조선총독부가 매년 발행한 산하 기관의 직원 명부인 <직원록>. 사진은 1942년(소화 17년)판으로, 이듬해 3월에 발행됐다.
<역사비평>은 이 후보 부친의 창씨명이 '마루야마'라는 설이 제기된 것에 착안해 이전 자료들과 이번에 발굴한 자료들을 대조한 결과 "광주지법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으로 월 70원의 봉급을 받는 '마루야마 아키오'(丸山晃生)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회창은 자신의 책인 <아름다운 원칙>에서 부친이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줄곧 장흥, 광주, 순천 등지의 지법 검사국에 근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1941년 이후 직원록에 이홍규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1940년부터 창씨개명이 대거 행해졌던 역사적 사실과 1941년 이후판 직원록에서 이홍규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유추해보건대 이홍규는 창씨개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1940년판 <직원록>의 이홍규 관련 기재사항(광주지법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 봉급 70원)과 이홍규와 이회창의 창씨명이 '마루야마'라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는 것에 착안, 일본식 인명의 관리들을 대조해본 결과 1942년판 직원록(1942년 7월 1일 현재. 1943년 3월 25일 발행)에서 광주지법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으로 월 70원의 봉급을 받는 마루야마 아키오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이라면 이홍규는 창씨도, 개명도 한 유별난 조선인"
그런데 <역사비평>은 "이상하게도 1941년판에서는 이홍규 혹은 마루야마 아키오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1941년판과 1942년판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발굴한 현대사연구자 A씨는 "아마 실수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1941년판 누락에도 불구하고 <역사비평>은 "그 기재내용(1942년판)은 1940년판에 있는 이홍규의 기재사항, 즉 근무처와 월급액이 완전히 일치한다"며 이홍규와 마루야마 아키오가 동일인물이라는 데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1940년판 이전 직원록에서 법원서기로서 통역생을 겸한 경우를 보면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판검사와 변호사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는 데 반해 재판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법에 밝고 일본어에 능한 조선인 서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마루야마 아키오가 통역생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조선인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그 이름을 1941년 이전판들에서 확인해 보았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서기라는 전문직에다 월 70원이란 고액(당시 초임서기와 훈도가 40원 정도)을 받는 관리가 1942년에 갑자기 등장하기 어렵다. 이홍규와 함께 당시 전남지법에 근무했던 이들의 창씨명과 자리이동도 대체로 확인했다. 이와 같이 여러 가능성을 두고 다각도의 확인을 통해 마루야마 아키오가 바로 이회창 아버지 이홍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만약 동일인물인 것이 사실이라면 이홍규는 창씨(創氏)는 물론 개명(改名)까지도 일본식으로 했던, 유별난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중 열에 아홉은 창씨는 했지만 개명까지 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비평>에서도 지적했듯 이 후보의 부친이 '창씨'뿐만 아니라 '개명'까지 했다는 점이다. "조선인 중 열에 아홉은 창씨는 했지만 개명까지 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창씨개명이 자발적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후보의 부친이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의 하급관리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943년 조선인변호사시험 합격' 허위이력일 수 있어
<역사비평>은 물론 '이홍규=마루야마 아키오'의 등식이 성립하기에는 조금 미진하다고 생각해 1943년 조선변호사시험(조선변시) 합격자 명단을 추적했다. "만약 1943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에서 마루야마 아키오란 이름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이홍규의 창씨명이라는 위의 추정에 신뢰도가 더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 그동안 이규홍 온은 1943년 이 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각종 인명록에 나와 있는데 <관보>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그런데 <역사비평>은 조사과정에서 이 후보의 부친이 1943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고 기록해온 각종 인명록의 기재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우연히 확인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매년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 최종합격자 명단은 물론 예비합격자, 구술시험 합격자 명단도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1943년을 전후한 수년간의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들을 어렵게 확보했지만, 이홍규 혹은 이홍규로 추정되는 마루야마 아키오는 물론 마루야마라는 성(씨)을 가진 인물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역사비평>은 "이홍규의 1943년 변호사시험 합격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잠정결론을 내리고 "그의 구(舊)호적을 입수하여 창씨 여부와 창씨명을 확인할 수 있다면 더 사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인물정보와 '한국법조인 대관'(1997년판)을 보면 이 후보의 부친 이홍규옹은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특히 '한국법조인 대관'의 경우는 자필이력서를 바탕으로 경력사항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비평>의 문헌고증 결과와 비교할 때 이('1943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는 '허위이력'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비평>은 이 후보 부친과 관련된 글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또 확인과정에서, 일제가 패망하기 불과 이틀전인 1945년 8월 13일자 관보에 실린 조선변호사시험 예비합격자 명단을 발견하고 씁쓸한 감회를 맛보았다. 일제와 조선인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던 마지막 순간까지 변호사 자격 따위를 취득하고자 매진하던 군상들이 실재했다는 것과 그 군상들이 대한민국 법조인으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해 부친의 친일의혹 논란이 일자 이회창 후보는 8월 23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부인 한인옥 씨가 어버이날인 8일 오전 명륜동 본가를 방문, 노부모 이홍규, 김사순씨 내외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있다.
ⓒ 연합뉴스
"아버님은 일제 때 대학을 졸업하고 젊어서 검찰 일반직 서기로 취직해 있다가 해방 후 검사로 임용됐다. 친일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고, 오히려 공무원으로서 곧은 자세로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소문이 나 주변의 칭송을 받던 분이셨다. 검사 재직중에는 빨갱이라는 모함을 받아 구속돼 옥고를 치른 후 무고함이 밝혀져 복직된 일이 있다.
한편 <역사비평>은 이 후보의 부친을 둘러싼 친일시비와 관련, "과연 이회창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지목한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말한 것인가"라고 묻고는 "이홍규가 법원 서기직에 오래 있었으므로 분명히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일에 관여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지만, 이런 문제에는 더 치밀한 고증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특정집단이 이미 이후보가 부친과 함께 일본옷 차림을 하고 찍은 사진을 입수했다느니, 북한에서 이옹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를 입수했다느니 말들이 많다.
이 후보 부친의 친일의혹 논란은 이번 대선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는 한 '5년전 얘기'로 치부돼 '약효'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논쟁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구체적이고 제대로 된 근거자료를 대는 자가 바로 승자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