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비리 수사, 왜 하필 지금이냐고?
오히려 지금이 적기, 시시비비 반드시 가려놓아야
김정란/ 시인, 상지대교수
왜 하필 지금?
이회창 대통령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비리 문제가 다시 불거져나와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5년 전에 나왔던 얘기를 왜 이 시점에 또 문제삼느냐고 말한다. 정치적 목적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5년 동안 검찰은 대체 무얼 하다가 이 시점에 와서 다시 문제를 들추어내고 있냐고 힐난한다.
그 힐난에는 일면 수긍할만한 타당성이 있다. 민주당은 분명히 이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검찰은 그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올랐던 당시에 엄정하게 수사해서 분명하게 밝혔어야 한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의 말을 통해 판단해 보면, 검찰은 이 사건을 자체적으로 수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같다.
수사 대상이 거대 야당의 총수이고 보면, 검찰이 단호한 수사 의지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이 사안은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수사 착수 자체가 힘들었던 것처럼 보인다. 약체 정권과 거대 야당. 검찰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약체인 김대중 정권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호령하고 있는 한나라당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사건을 종결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물론, 5년 전과 지금의 상황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5년 전에는 <고의감량> 여부가 문제였다면, 이번에 떠오른 문제들은 부정한 청탁에 의한 범법 여부, 그리고 그 범법을 숨기기 위한 조작이 있었느냐의 여부, 또한 둘째 아들 수연의 병역비리 의구심까지 덧붙여져 있다. 따라서, 사안의 경중 자체가 5년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들이 5년 전에 검찰이 단호한 수사의지를 가졌더라면 밝혀낼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중요한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지 못하는 대한민국 검찰이 정말로 걱정스럽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한 한나라당의 태도 역시 <정치적>이지 않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당의 대응 역시 정치적이기는 매한가지이다. 한나라당은 떠오른 문제들을 엄정하게 수사하는 데 협조하기보다는 새로운 의문점들을 속속 제기하고 있는 김대업씨의 과거 전력을 문제삼아서 <정치적>으로 이 사안을 어물쩡 넘겨보려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서 법을 다룬다는 의원들이 개인의 비리를 캐내기 위해 흥신소 직원들처럼 우르르 김대업씨의 고향으로 몰려가는가 하면, 수사중인 사건 담당 검사를 바꾸라고 압력을 행사하고, 연일 김대업씨에 대한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의 입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는 막말을 듣고 있자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전과자에게는 인권이 없는가? 그가 설사 천하의 말종이라고 할지라도, 공당의 대변인이 그렇게 인권유린적인 발언을 마구 쏟아내도 되는 것인가? 한나라당은 고발 당사자인 김대업씨가 파렴치한이기 때문에 <신성한> 국감장에 부를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들이대며 김대업씨의 증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식이라면, 과거의 숱한 범죄자들은 왜 그 자리에 세웠는가?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면, 증인이 도덕적으로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그를 불러서 증언의 진실성 여부를 가려야 한다. 한나라당의 주장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 눈가리고 아웅하려는 정치적 제스추어에 불과하다.
나는 김대업씨의 인격에 관심이 없다. 그가 천하의 몰염치한이든, 또는 과거를 뉘우치고 살신성인의 심정으로 병역비리 근절에 몸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든, 나는 그것을 판단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나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가 제기하고 있는 의문점들이 실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밝혀내는 일이다.
따라서 국감에서 그의 증언은 반드시 필요하다. 대체 고발 당사자의 증언을 빼고, 무엇을 어떻게 밝히겠다는 것인가?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하기 바란다. 그러나 공당의 논평에서 도덕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짜증나는 일은 없다. 한나라당의 논평을 듣고 있으면, 마치 중세의 신권재판(神權裁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죄가 있으면, 뜨거운 물에 들어간 죄수의 손이 델 것이며, 죄가 없으면 손이 델 리가 없다. 하느님이 보호해주실 테니까. 한나라당의 태도가 이러한 중세적 몽매와 대체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이 일은 엄밀하게 말해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개인 문제이다. 왜 그 자신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선언 한 마디만 툭 내던지고, 일체의 해명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한나라당 의원들 전체가 나서서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나?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의 사조직인가? 이 정도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으면, 사건 당사자인 이회창 후보와 정연씨와 수연씨 그리고 한인옥 여사가 나서서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한나라당이 정치적으로 막아주면, 있었던 일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저지른 범죄 사실이 무죄가 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나로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이 사안에 정치적으로 접근하든 말든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병역비리를 저지르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해서 서류를 조작했다면, 그것은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중요한 사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밝히는 일은 정치적 역학관계와 상관없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시점이 언제가 되었든, 떠오른 김에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는 것이 공익에 도움이 된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왜 하필 지금이라도 상관없다. 또는 오히려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출마하려는 지금이야말로 시비를 분명하게 가려놓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그냥 넘어간다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이회창 후보는 끊임없는 의혹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한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회창 후보 자신을 위해서라도, 떳떳하게 수사를 받고 의구심을 없애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김대업씨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회창 후보는 대통령 후보직 사퇴는 물론이고, 자신의 행위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의 아들들조차 비리가 확인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라고 해서, 정치적 지평 안에서 어물쩡 넘길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한나라당은 병역의무 2개월 단축이라는 얄팍한 정치적 선심쓰기로 사태를 호도하려 들지 말라.
그해 봄, 바람, 그리고 아들
이회창 후보의 병역비리 공방을 지켜보면서,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남편은 석사 학위 논문을 끝낼 무렵에 영장을 받았다. 그때 착잡해 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무력함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남편은 논문을 끝내놓고, 입영한 뒤 열흘이 지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논문 인쇄를 맡겨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글쎄, 운이 좋으면 귀향 조치될지도 모르지. 혈압이 정상치를 한참 넘으니까." 남편은 "울지 말고 잘 있어"라고 말했다. 남편이 떠난 다음날,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논산훈련소로 가보았다. 그냥 남편이 있는 곳을 눈으로라도 가늠해 두고 싶었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남편의 힘겨움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느낌이라도 들 것 같았다.
기차를 어디에서 탔는지, 기차에서 내려서 어떻게 훈련소에 찾아갔는지, 그 모든 것은 내 기억 속에는 하얗게 지워지고 없다. 그냥 훈련소 담벼락이 다락처럼 높았다는 것, 그 아래 서서 그 높은 담장을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남편이 어디쯤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거기 그냥 망연히 서 있었다는 것, 서 있다가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부탁이야, 잘 버텨내"라고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던 것, 그리고 바람이 무지 많이 불었었다는 것만 떠오른다.
아니, 정말은 잘 모르겠다. 그 바람은 바깥에서 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불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냥 그렇게 멍하니 서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학력이 높은데다가 키까지 크면, 하사관 차출되기 딱 좋은데... 그럼 고생할텐데... 나이도 많고..."라고 했던 말이 귓가에 윙윙 맴돌았다. 그때 막 내 안에 생겼던 아가도 그 말을 들었을까?
남편은 열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인쇄소에 남편의 논문을 맡겼다. 남편이 보지 못하는 논문을 들고 집에 돌아온 나는, 논문을 한동안 쓰다듬어 보았다. 젊은 남자의 힘, 좌절, 유예된 시간, 절망 등이 모래처럼 까끌까끌 만져졌다. 나는 달력종이를 뜯어내서 조그맣고 길게 잘랐다. 한 장 한 장 위에 2년 354일, 2년 353일, 2년 352일이라고 작은 글씨로 적어넣었다. 3년을 기다려야 한다. 매일 한 장씩 버리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키가 큰 남편이 똑바로 눕지도 못해서 비스듬하게 누워야 할 정도로 조그마했던 그 장승백이 쪽방이 얼마나 사막처럼 느껴졌는지 모른다. 방 안에서 바람은 두 겹으로 불었다. 가난한 젊음과 저당잡힌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바람 한 겹,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내 안에서 바깥으로 불어가는 바람 또 한 겹. 바람은 윙윙대며 엉켰다.
그렇게 한 장씩 종이쪽지를 버리기 시작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새벽 두시에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바깥에서 "정란아"라고 불렀다. 누굴까? 설핏 잠들어 있던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그 목소리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남편의 목소리인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어둠과 똑같은 얼굴빛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남편은 보름간의 모험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고혈압으로 귀향조치를 받고 1년 동안 번역병으로 복무했다. 우리 첫 아기는 남편이 군복을 입고 있을 때 세상에 나왔다. 아기를 들여다보면서 "신기해, 정말 신기해, 얘가 어디에서 왔지? 하늘에서 떨어졌나?"하고 중얼거리던 남편의 박박 깎은 머리랑 군복이 떠오른다. 아기의 희고 몰랑몰랑한 살은 카키색 뻣뻣한 군복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이제 곧 군대에 간다. 아들은 잘 이겨낼 것이다. 그 아이의 강인한 부드러움의 힘을 나는 믿는다.
그런데 어째서 이 모든 고뇌들을 어떤 이들은 공유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빽>을 써서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까? 그리고 어째서 그런 이들일수록 전쟁을 그토록 무책임하게 부추기는 것일까?
나는 분노한다. 논산 훈련소 담벼락 아래에서 맞았던 그 먹먹한 바람의 이름으로, 유예된 시간이라는 까끌까끌한 젊음의 이름으로. 왜 그들은 공동체 전체가 단지 젊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꼬박 견뎌내어야 하는 힘든 시간을 불법으로 면제받고도 공동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않는 것일까?
그리고 무슨 체면에 뻑하면 <안보>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들먹이는 것일까? 금쪽같은 내 남편, 내 아들은 군역을 면제받은 귀족들 대신 싸워주어야 하나? 그래서 라면 잘못 끓였다고 총맞아 죽고도 빨갱이 소리 들을까봐 무서워서 입다물어야 하나? 한국은 아직도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존재하는 이조시대의 신분사회인가?
기득권층의 특권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은 불가능하다. 바람은 언제나 불고, 그 바람은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린다. 최소한의 공정한 룰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 범법자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점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을 좌지우지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삶은 삶이 아니다. 삶은 삶이라는 추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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