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갑자기 시인 '보르헤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詩가 생각나
독서노트를 펼쳐보았습니다. 언젠가 그 시를 읽었을 때, 그때가 마침
내 인생의 큰 좌절을 겪고 삶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을 때였고 그 詩는
이상하게도 절절한 느낌으로 다가왔었지요.
뭐랄까, 내 가슴 속에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상념들을 잘 대변해주는
詩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도시는 나의 굴욕과 실패의 地圖같은 것
그 문에서 나는 석양을 보아왔고, 그 대리석 앞에서 나는
부질없는 기다림을 배웠다.
여기 어제는 불확실하고 오늘은 다른 나날이
내게 모든 인간이 겪는 평범한 일상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 발자국을 측량할 수 없는 미궁을 그린다
여기 잿빛오후가 약속한 내일의 열매를 기다린다
여기 나의 그림자도 또 하나의 부질없는 마지막 어둠속에
가볍게 사라져가리라
이 도시와 나를 잇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경악이다
아마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그토록 사랑하는걸까***
보르헤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느낀 절망과 고뇌를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느낍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런 고비의 순간과 맞닥뜨릴 겁니다. 삶이라는 것이 어차피
희망과 절망의 외줄타기라고 할진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 내리막이라는 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걸까요?
보르헤스의 표현대로 도시의 삶이란 '측량할 수 없는 미궁'을 헤매는
건 아닐까요? 굴욕과 실패, 부질없는 기다림, 마지막 어둠---.
보르헤스는 이 도시에서 절망을 읽어냅니다. 사실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녹녹한건가요? 몇몇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빼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허덕대거나,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안한다고 하더라도 또다른 문제로 걱정하며 살아가는게 도시인의
삶 아닌가요?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살아가기 위해
지불하는 댓가'는 왜 그렇게 비싼걸까요?
보르헤스의 표현대로, 이 도시와 나를 잇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경악'이 아닐까요?
내가 너무 염세적으로 표현했나요?
그러나 요즘은 공연히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포지티브보다는 네거티브에 가까우니까요.
이 도시는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으면서도, 참으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사실은 빼앗아간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분실했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니까요. 이 도시가 나한테
준 것을 잘 지키고 배양하고 '삶테크'했다면 덜 잃어버리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텐데말입니다.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습니까?
인생은 농사같아서 뿌린대로 거두는 법. 노력한 만큼 거기에 합당한
결실을 주는 것 아닌가요? 사주팔자를 따지기도 하는데, 글쎄요 그런게
아주 없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사주팔자만 믿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인생이 밥먹여주지는 않겠지요?
어느 순간, 삶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겠지만 이 도시에 과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바깥바람에 빠져 가족돌보기에 소홀한 가장들, 쾌락에 눈멀어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는 젊음들, 한눈 파는 재미에 가정깨지는지도 모르는
탈선주부들, 술과 마약으로 건강을 파괴하는 중독자들, 모든 것을
잃었다며 방황하는 IMF낙오자들---. 이 도시엔 정말 너무 많은
아웃사이더들이 넘쳐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보르헤스의 '굴욕과 실패'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을겁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성격상으로 지나간 세월 중에서
좋았던 일보다는 안좋았던 일을 자꾸 떠올리고 지금의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자꾸 생각하며 다가올 미래에 있어서도
희망적인 면보다는 어려움이 예상되는 면에 대해 자꾸 곱씹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비교적 괜찮은 편이라는 자평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울한 몽상에 빠지곤 한답니다. 친하게 지내는 역술가께서
"당신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충고를 해
주셨는데, 참 나한테는 절실한 '사랑의 매'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란 어차피 흘러간 것인데, 왜 자꾸 과거의 '영광과 상처'에
집착하는걸까요?
보르헤스가 말했던 '잿빛오후가 약속한 내일의 열매'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요?
누군가 얘기했지요? 희망은 가난한 인간의 빵이라고. 이 도시도
따지고 보면 많은 희망의 씨앗을 곳곳에 숨겨놓고 있을겁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서 싹튀우고 가꾸어서 열매맺게 한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거겠지요. 도시가 삭막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그속엔 은밀한
희망과 건강한 빛이 숨어있는거 아닐까요? 그 희망과 건강은,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주인일테지요.
詩의 끝 구절처럼 "아마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그토록 사랑하는" 걸
택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 도시에서 밀려나는 패배자가 돼서는
안되겠지요? 그렇다면 너무 억을한거 아닌가요? 중요한건 인생이란
누구한테나 공평하다는 사실입니다. 가진지와 못가진자를 따지기 전에
자기를 한번 돌아보는게 중요할 것같습니다. 현재의 내가 남보다
못하다면 거기엔 분명 어떤 문제점이 나 자신한테 있을겁니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인생은 땀흘리는 만큼 결실을 주는거니까요.
이 도시에서 우리는 절망을 읽기보다는 희망을 읽읍시다. 그렇게 하자고
자신에게 자꾸만 명령합시다.
그리하여 '잿빛오후가 약속한 내일의 열매'를 쟁취합시다.
그것이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열쇠입니다.
<column.dreamwiz.com/19594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