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나라당의 남경필의원이 노무현 후보의 여성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이트의 게시판을 보니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옮겨놓았더군요
우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한 노무현후보의 글을 왜곡하고 매도하는 그들의 낡은 정치에 큰 분노를 느끼며 여러분에게 다음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노무현후보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알고 싶은 분을 홈페이지로 초대합니다
http://www.tvroh.com/mov/mov.asp?mid=139&cd=9"
노 후보가 자신의 달라진 여성관의 과거와 현재를 밝힌 자서전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장 여보, 나좀 도와줘 - 제2절 하늘의 절반
나의 여성관에는 단순히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될 수 없는 특이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런 얘기들을 함께 들으면서 자라났던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여성관에는 일종의 '반감'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구박 하셨다. 어머니께 죄송스럽긴 하지만, 그건 '구박'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 그러나 수완은 없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성실한 농사꾼이셨다. 젊은 시절 객지에 나가 큰돈을 벌어 오셨지만 몽땅 사기 당하고 말았다. 또 친척들 간의 금전 거래에도 악착스러운 면이 없었던 탓에 집안 살림을 빼앗기거나 아니면 헐값에 넘겨 버리는 일이 적지 않았었다. 가지고 있던 작은 공장과 논밭들이 그런 식으로 헐값에 친척들에게 넘겨졌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한이 맺혔던지 어머니는 늘상 아버지를 구박하셨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심어졌던 어머니의 모습, 그것이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여성이라는 이미지였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다가왔지만, 아내로서의 여성은 잔인하리 만큼 야박하고 극성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나의 그런 여성관은 그 후 큰형수님이 새 식구가 되어 우리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굳어졌다.
대학을 다니다 말고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갔던 큰형님은, 국민학교 여선생인 형수를 만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형님 생각에는 형수가 직장이 있으니 고시 공부 뒷바라지를 해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 형님은 결혼 후 고시 공부를 중단했다. 형수의 구박과 괄시 때문에 공부를 더 계속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형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형님과 형수 사이는 끊임없이 불행했다.
내 눈에는 형수님이 형님을 일방적으로 구박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만 보였다. 나는 형님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마누라만은 손아귀에 넣고 살겠다고.
그러나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 왔던 나의 각오는 막상 연애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봄날눈 녹듯이 녹아 버리고 말았다. 20대 남녀 사이의 사랑이 가진 위력은 대단했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경계심과 혐오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저 양숙이가 좋게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할 때까지도 남성 우위의 생각이나 여성에 대한 경계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양숙이만 '특별히 좋은' 여자이거나 '순종하는' 또는 '내 손아귀에 들어 올'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 놓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말을 명령조나 억압조로 함부로 하면 그걸 따지고 들뿐만 아니라, 심하면 우리 집의 가풍을 비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 개인의 습관까지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곤 했다. 나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기를 꺽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그러니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나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속았구나' 싶기도 했고, 나도 잘못하다가는 큰 형님처럼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로서 매우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우리 집은 농사가 많았다. 형님 내외는 직장 따라서 부산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모 모시고 농사 수발을 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니 아이 키우랴, 집 청소하랴 음식을 장만해서 들에 갖다 주랴, 그 고생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부한답시고 모내기하는 날에도 내다보지도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연수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아내를 다루는(?) 일을 무척이나 힘들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연수원 동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 친구들이 보기에는 나야말로 아내 위에 군림하는 남편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갓 결혼한 친구들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수유리 뒷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친구들중 하나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노 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회운동'은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바꿔 놓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다.
83년경,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 문제 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한 명은 함께 춤을 출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 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청년들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참 난처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학생이 화내고 덤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남학생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서 무안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생각이 요즘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흉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청년들은 내 아내에게 '하늘의 절반'이라는 책을 읽어볼 것을 권유했다. 속 마음에는 아내를 운동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쨌든 나도 그 책을 보게 되었는데, 바로 여성 문제에 대한 책이었다. 일반적인 여성 문제는 물론, 자녀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까지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실험적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상세한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여성의 소중함과 권리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그 이후 나는 그때까지 나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여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나와 아내 사이도 달라졌다. 나도 아내를 존경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실천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나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가 한결 부드럽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변화를 읽는다. 이젠 싸움을 해본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운동권이 우리 집에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또 새로운 변화를 느낀다. 무슨 애기 끝에 남편이 음식도 '해 주고' 빨래도 '해준다'고 이야기 했더니, '해준다'는 생각이 틀렸단다. 남의 일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는 거란다. 어느 나라에서 남성 노동자에게 '육아 휴가'를 준다는 말을 듣고 별 싱거운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젊은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보니 요즘 말로 장난이 아니구나 싶다.
내가 변호사를 하고 있을 때만 해도 민법상 여성을 차별하는 법이 버젓이 있었다. 그런데 13대 국회에서 여러가지가 바뀌었다. 남녀 고용 평등법도 만들었다.
앞으로 남은 문제도 많고 또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제기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의 정치 진출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13대 국회에서 가족법 개정이나 남녀 고용 평등법, 영유아 보육법등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한 여성 의원들의 노력이 돋보이기도 했고, 요즈음 지방의회에 진출한 여성들의 활약도 인상이 깊다. 특히 지방자치는 바로 여성들의 피부에 와 닿는 생활의 문제가 많아서 여성들의 진출이 더욱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성들의 정계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성들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보면 비례대표제 또는 대선거구제를 채택하고 그 중 일부의 의석을 여성에게 배정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사회 진출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걱정이 있다. 사회 진출은 좋은데, 자녀 양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딸아이도 곧 부닥칠 문제이다. 여성의 취업 비율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육아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사회적 대책을 세워야만 할 때이다.
장성한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단다. 모두들 손주 키워 주기가 싫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어떤 어머니가 "손주 맡기면 사위나 며느리 앞에서 아이 입을 걸레로 싹 닦아 주고, 음식을 입에 씹어서 먹이면 그 날로 아이를 데려간다."고 손주 보아주지 않을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더란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그러나 웃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여성들이 좀 더 넓게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여성 문제는 여성의 권익 신장, 사회 진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회제도 전반에 관련을 갖는 문제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어 온 역사를 보면 노동운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결국 여성 문제만 따로 떼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 전반의 문제와 함께 해결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의료 보장, 무상 교육, 국가에 의한 영유아의 보육 제도가 발전되지 않고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어렵고 여성의 사회 진출 없는 남녀평등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그 사회의 복지 제도에 관한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은 정말 형편없고 그에 대한 여성들의 의식도 너무 낮다. 그리고 그 문제의 개선을 주장하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도 냉담한 것 같다.
이에 여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것도 여성의 권익,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진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환경, 소비자 문제, 교육, 의료, 노인 복지 등 사회보장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