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가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김대중 정권 시절에 2억불에 달하는 거금이 북한에 지급되었다는 행위가 의혹에서 “사실”로 밝혀지면서, 정권말기 상황과 맞물려 정치권에 작지 않은 파란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드러난 사실만 보면 2000년 대북사업과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되던 시절에 현금이 현대상선이라는 민간기업을 통해 북한에 지급되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지급 절차가 기존의 법적 틀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불법적인 절차였다는 것, 그리고 그 자금을 지불하게 된 근거가 될 계약구조와 지급 이후 북한이 자금을 사용한 용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금번 논쟁을 일으키게 된 핵심 관건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더 나쁘게는 그 방법이 돈세탁과 유사한 차명 방식에 기업의 송금형식을 빌어 그 사실을 감추었다는 점과,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줄곧 부인하다가 대통령 선거 시기 이후, 그것도 설날 직전이라는 타이밍에 맞추는 정치적 계산까지 고려했다는 혐의까지 있고 보면,
한나라당의 소아정신병적 입장이 아니라도, 국민의 입장에서조차 통치행위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의 통일을 위한 충정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그냥 덮자고 주장하는 논리는 백보를 양보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정말 국민의 입장에서, 국가적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정황적 근거와 그 절차적 위법성을 떠나 그렇게 해야만 할 불가피성은 과연 있었는지, 과연 그것들이 최선의 방책이었고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를 국민들에게 정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김대중 정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역사적 모욕이 될 것입니다.
그 똑똑한 참모들과 비서진들은 왜 그리도 국민들에 대해 시건방진 자들인지, 아니면 이가 시리도록 무능한 자들인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작게는 노벨상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들고, 크게는 우리 세대 그리고 우리 자식세대의 운명을 지배해온 저 지긋지긋한 한반도 대결구도를 평화와 공존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평생 동안 힘겹게 분투한 사람의 노력을 한 순간에 야합과 지저분한 거래의 결과처럼 시궁창에 처박는 꼴로 가는 상황을 버젓하게 보면서도 누가 책임지겠다는 놈 하나 없다는 건,
그 자랑스러워했던 햇볕정책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져 국민들에게 확신시킬 배짱과 제대로 된 논리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건, 차라리 분노를 넘어 비애를 느끼게 할 정도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햇볕정책을 진정으로 지지했고, 아직도 그 길이 진정으로 민족과 나 자식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라고 믿는 저로서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차라리 자기가 믿는 가치를 위해 욕먹는 길을 굳세게 가고 있는 꼴통 조갑제나 장세동이 오히려 위대해 보일 정도입니다.
어쨌든, 이 문제가 야기하는 논점과 해석은 역시 당사자간 이해를 반영하기 때문에 대단히 상반된 견해가 드러나고 있고, 판단의 근거도 좁게는 절차의 적법성을 가리는 법리적 해석에서 넓게는 의회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외교권의 행사 범위에 대한 문제까지,
또한, 어디까지를 전장(戰場)으로 삼느냐에 따라 가깝게는 2004년 총선의 향방을 가를 재료로서, 길게는 5년간에 걸쳐 노무현 정권이 확보할 수 있는 대북정책 운신의 폭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사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결코 가볍게 처리하거나 대충 덮고 넘어갈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이 문제는 외교가 본질적으로 가지는 전통적이고 까다로운 문제들을 모두 보여주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적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국의 주권이란 무엇으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지고의 권리이긴 하지만, 그 지고한 주권과 주권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외교적 조약, 협약 혹은 국제법의 형태로서 주권의 임의적 행사를 당사국간의 세력을 기반으로 한 협상을 통해 일정부분까지는 제한할 수 있도록 관례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국가 대표의 자격으로 협상에 임하여 합의에 도달하여 서명을 했다고 해도, 헌법이 규정하는 국회 비준의 필수 항목에 포함될 경우, 그리고 국회비준에 실패할 경우 그 합의는 무효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가장 극적인 경우가, 1차 대전 이후 우드로 윌슨이 자신이 주창하여 창설한 국제연맹의 가입 비준을 미 의회의 부결로 미국 자신을 제외함으로써 국제적 개망신을 자초한 경우 일 겁니다.
이것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외교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국제관계의 처리를 위해 소집되었던 비엔나 회의에서 확립된 이래로, 탄생 당시의 절대 왕정체제하에서 최고 통수권자의 외교 권한과 판단이 국가의 권위를 대표할 수 있었던,
밀실에서 이루어진 지저분한 야합과 로비가 전통처럼 굳어진 외교관행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시절을 뒤로하고, 국민이 주인으로 등장한 의회 민주주의 시대에서의 국민의 알 권리와, 국익을 위해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외교적 요구간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가를 판단해야 하는 미묘하고도 새로운 요구에 대한 문제입니다.
국민의 알 권리가 극단적으로 대두된 역사적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간의 국지적 분쟁이 그전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으로 대표되는 강대국 세력균형을 위해 설정된 양 진영간의 싸움으로 확대되면서 국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국가간의 비밀조약으로 인해 원하지 않았던 다른 국가간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수 백만 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국민들이 국가간의 조약을 공개할 것을 그들의 국가에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최고 통치자의 외교행위가 국회의 인준을 받게 하는데 이르게 되고, 바야흐로 밀실외교적 전통이 수면 밑으로 잠수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우리나라의 헌법에도 중요한 외교적 결정은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고, 받지 못하면 무효가 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정권 하에서도 정치가 가능성의 기술이듯이 외교는 국익을 협상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비록 조약의 형태는 아니라도 외교적 거래는 많은 부분이 드러난 협상결과 이외에 막후에서 벌어지는 이면(裏面) 계약들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집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업이나 국가나 다자(多者)가 참여하는 협상 테이블에서는 대표선수들, 고수들의 게임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요구사항을 관철시킨다는 것은 압도적인 세력의 차이나 전승국가가 아닌 다음에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거래가 불가피하게 되고, 양보의 과정에서 자국민의 이해와 여론을 헤아려야 하고, 상대방은 역으로 우리 여론을 이용하면서 압박을 가하는 불리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겁니다.
어업권 협상이나 칠레 자유무역 협상과정이 우리가 기억하는 사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을 우회하고, 자국 여론에 근접하게 협상을 체결하면서도 국익을 달성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이면 계약입니다.
다소 불리한 계약일 경우, 국가간 조약의 형태로는 비준이 어려우니 대충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고, 보상의 방법으로 비준이 필요하지 않은 민간에 대한 사업적 특혜나 필요한 이권들을 민간계약의 형태로 주고받는 방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간차원의 계약은 산업자원부나, 재정경제부에서 외환거래법 혹은 무역관련 법규를 통해 입법부를 경유하지 않고도 인가해줄 방법이 생기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방문하는 곳에 대규모 기업인들이 하릴없이 수행하면서 놀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방법은 꼼수가 아니라 역시 민주정 시대의 외교 관행이라고 봐야 합니다.
특히 고도의 비밀을 요하는 국가간 무기거래나, 국책 거대사업에 대한 입찰 등 국가간 긴밀하고 때로는 타국에 대해 우선적 협조를 요하는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커미션과 깡패의 논리가 녹아 들어가기 마련이고,
부패한 정권이 지배하는 국가와의 거래는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국가간 거래의 현실입니다.
일본 미쯔비시의 경우 태국에 브라운관 공장 하나 지으면서 시장에 대한 이권은 물론이고 공장에서 항만까지의 도로 공사, 항만 공사까지 다 독식한 사례도 있습니다.
태국왕실에 대한 적절한 보상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외교적 방법을 염두에 두면 이제 사안을 조금 넓게 볼 수 있습니다.
금번 대북 송금 사건은 단순한 사실관계 혹은 법리적 해석 이상의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금번 대북 송금관련 사건의 해석은 무척 복잡하게 보입니다.
이미 집행이 이루어진 결정에 대한 사후의 판단이라는 점과, 송금금액의 규모가 헌법에 60조 1항에 명시된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포함되느냐라는 사실 판단의 문제, 그리고 명백하게 배임의 혐의가 의심되는 외환거래법상의 절차적 위법성이 과연 국가에 있는가, 현대에 있는가? 국가에게 있다면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법적인 해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현대가 송금했으니 외환거래법 위반을 물으면 되고, 재경부가 되었든 산자부가 되었든 인가한 정부부서의 책임자가 책임지면 될 것이고, 산업은행이 끼었으니 역시 재경부가 책임지면 됩니다.
어쨌든 절차상으로는 정권자체는 빠져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북한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해석의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즉, 헌법에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의 교역은 대외 무역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통일부 장관의 승인이 필요한 남북 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습니다.
즉 수입, 수출이 아니라 반입, 반출이라고 하는 용어가 적용되고 무역에 대한 해석도 달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척 복잡한 양상을 가진 사안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하는 것은 역시 거시적인 영향, 정치적, 심리학적인 파괴력입니다.
이토록 불합리한 절차를 강제한 힘은 역시 정권의 의지였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책임이 필요하다는 측면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정면 돌파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부도덕한 정권이 부정한 방법으로 굶주린 북한을 매수했고, 그 대가로서 평화를 이룬 것처럼 국민을 기만해왔고, 스스로도 노벨상이라는 부당한 대가를 챙겼다...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인 해법이 너무도 절실하다는 겁니다.
김대중 정권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의 정책이 옳다고, 그리고 발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저 자신이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번 논리 싸움, 기 싸움에서 지면 이회창씨 병역비리처럼 원죄와도 같이 개혁의 발목을 잡을 텐데 그 이전투구와 쌈박질은 정말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선 따져보고 싶은 것은 대북송금의 불가피성에 대한 상황논리입니다.
첫째 요인은 북한 자체의 문제에서 찾아야 합니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무려 50년간 미국 주도의 엠바고에 갇혀있고 지금도 무역을 못하고 있는 자급경제 국가입니다(국가라는 표현이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그나마 제3세계가 유명무실해지고, 소련이 해체되고,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면서 공산권 무역이 없어져 석유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외화난과 식량난이 덮치면서 견고한 병영국가 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위기까지 가게 됩니다.
이때 북한이 취한 전략은 핵 개발 가능성을 담보로 경수로 건설을 유치하기 위한 벼랑끝 전술이었습니다.
이의 전개과정은 잘 알려져 있듯이, 85년 가입했던 핵비확산조약(NPT)과 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 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하면서 핵사찰을 받는 과정에서 발견된 보고서와 사찰결과의 불일치 사건, 플루토늄 사전 분리의혹을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핵개발 가능성을 흘리게 되고, NPT탈퇴를 포함한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여 미국과 그야말로 벼랑끝까지 가는 줄다리기 끝에 카터의 중재를 받아들여 94년 북미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냅니다.
이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핵 시설을 공개하고, 핵개발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면서 무려 4조원(40억불 규모)의 신포지역 경수로 사업을 유치하게 됩니다.
그때 경수로 건설을 위해 일종의 펀드가 설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입니다.
미국, 한국, 일본이 상임이사가 되어 한국전력의 주도하게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건설하는 사업입니다. 북한으로서는 수지 맞는 장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겨우 50 메가와트짜리 흑연로를 포기하는 대신에 1000메가와트짜리 두 기(基)를 공짜로 얻은 셈이 되었고, 덤으로 1기 건설이 완료되는 2003년까지 매년 50만톤에 달하는 중유를 미국으로부터 공짜로 공급받게 된 겁니다.
여기에 경수로 건설과정에서 투입되는 엄청난 인프라투자와 고용의 창출 등 경제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였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공화당 매파입장에서는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할 경우 일본과 중국을 자극하여 핵 확산을 초래할 지도 모르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전략적 측면에서 결정했겠지만, 완전히 북한의 어거지에 당했다고 느낄만 했겠지요.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KEDO의 추진과 결정은 미국의 의지였지만, 돈은 멍청하고 외교적으로 무능했던 김영삼 정권 시절에 공사비의 70%(약 28조원)를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 비용은 재정과 우리가 매달 내고 있는 전기값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북 퍼주기는 김영삼 정권과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이루어낸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에 제가 일전에 글을 올렸던 ‘노무현 정권과 그 적들’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들의 대북 퍼주기 논리를 보면서 유치찬란한, 정책입안자의 지능을 의심하게 하는 주장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외교적 과업을 이끌어낸 북한이 도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또 다시 벼랑 끝 외교를 구사하고 있고, 김대중 정권 들어서 그토록 급박하게 교류와 협력을 무리한 수를 써가면서까지 추진했느냐 라는 것인데, 여기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최악의 식량난입니다. 배고픈 데에는 장사가 없는 겁니다. 국가가 먹여 살릴 능력이 없으니, 난민화가 되고, 떠돌아 다녀도 막을 수도 없고, 중국 국경을 위협할 정도로 탈출하는 난민들의 행렬은 역으로 그 나라 안의 경제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우리가 이제는 일상적으로 보는 탈북자 행렬은 정말 섬뜩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도대체 식량을 수입할 돈조차 없는 국가라면, 그 경제의 참혹한 실패는 너무나 명백하다는 점이고, 먹을 것을 찾아서 총부리를 뒤로하고 국경을 넘나들 정도라면 이건 난민국가를 넘어 파산한 국가임에 틀림없다는 시사적 확증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갔었던 중국 국경에서는 북한 돈 천원 정도를 중국 돈 1백위안 정도에 사 달라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공칭(公稱) 환율은 1:1 이지만, 이미 화폐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자, 이 정도의 세계 최빈국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만약 김정일 정권이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배고픈 군부에 의한 할거 시대로 가버리게 되면, 그리고 치안 부재의 공황상태로 가버리면, 우리는 갑자기 가장 위험하고 불안한 이웃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치안부재의 상태는 언제나 약탈과 극도의 불안을 야기하게 되고,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거나 마적단처럼 스스로를 무장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모든 인민은 비정규전과 정규전으로 신물나도록 교육 받은 정예들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혼란은 남한의 위기와 직결됩니다. 간첩 한 놈 내려와도 군단급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어야 겨우 잡을까 말까 합니다.
난민상태에 치안까지 불안하다면 배고프고 불안한 인민들은 중국 국경을 그냥 넘어갑니다. 중국은 아주 미묘한 입장이 됩니다. 북한과 인접한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는 무려 2백만이 넘는 조선족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은 소수민족 정책과 영향을 두려워하여 북한 난민을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국경을 차단하고 군사를 동원해서라도 중국은 북한에 개입을 시도하게 되고, 친중국적 정권의 수립을 도모하게 되어있습니다.
난민들이 갈 곳이 어디일까요? 한국입니다. 휴전선 지뢰를 밟고라도 넘어 옵니다. 우리 입장은 심정적으로도, 정치적 이유에서도, 인권차원에서도 그들을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휴전선을 넘어오는 그들에게 총을 쏘지 못합니다. 일단 한번 난민이 유입되면 사회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병력은 최소한 2배로 증강해야 하고, 경찰력은 3배 이상 증강해야 합니다.
길거리에 난민들이 돌아다닐 때 야기되는 사회불안과 고용의 문제, 슬럼화에 따른 민족내부의 갈등은 최소 수백조의 소모적인 비용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동구권에서도 튼실한 경제였다는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는 과정에서도 통화교환 비율을 1:1로 결정함으로써, 거의 동독 국민들에게 자기 소득의 수배에 달하는 혜택을 서독국민의 부담으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10년 동안 천문학적 사회적 비용을 감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간 경제적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본다면, 북한 경제의 파탄은 우리로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입니다.
해답이 뭘까요? 죽으나 사나 북한경제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만큼 급박하고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할 사안은 대한 민국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북 송금이든 현대의 대북 사업이든 방향과 절차 모두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헌법 66조 2항과 3항에 명기된 ‘②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③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의 대통령 의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모험은 이러한 경제난과 맞물려 다시 핵 카드를 꺼낸 것이고 미국의 호전적이고 노골적인 적대감, 중유공급의 중단과 맞물려 다시 긴장상태로 몰아가면서 내부결속을 다지고, 정권의 안전보장, 불가침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즉, 좀더 긴장상태를 유지 혹은, 고조할 필요성과 함께 외교적 해결이 가능한 수순으로 몰아가는 전략이라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우리정부에 의한 외교적 해결이 너무도 절실한 상황이고 북한의 경제난 극복, 나아가서는 미국에 의한 30년이 넘은 대북 엠바고의 해제를 통한 북한의 개방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암묵의 공조’ 상태를 유지 시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익과 부합되는 방향이라는 것은 너무도 확실해 보입니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단순 회피식 무책임한 처방이 북한에게나, 미국에게나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고, 오히려 미래의 대북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대국민 설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도 안이한 자세라 질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죄스럽고 죽을 짓을 했기에 한나라당이나 국민들 눈치나 실실 보면서 저런 꼼수를 부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노무현을 지지한 계층을 통계적으로 조금만 분석해봐도 정면돌파를 위한 답이 나오는데 무얼 그리 두려워하는 가요? 이미 승부는 끝났고, 그 승부를 가져다 준 계층이 2030세대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이 큰 5060세대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요? 표를 분석해 보시기를 간곡하게 권유합니다.
보수계층에서도 노무현을 지지한 비율은 의미 있는 비율을 넘어서 있었습니다. 이 사회의 보수계층이 도대체 무슨 태도를 가지고 노무현을 지지했었을 까요?
한국의 보수는 2가지 카테고리로 나뉩니다. 하나는 남북전쟁을 경험하였고, 그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반공 교육을 받고 보수화된 60~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들입니다.
금번 대선에서 후자의 반공적 보수적 성향은 반공에서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 세력으로 바뀌었다는 확증이 있습니다.
그 비율은 전국민의 30%가 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위협보다는 평화를 선호했기 때문에 그 엄청난 핵폭풍 협박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의 평화적 노선을 오히려 지지했던 겁니다.
2030 중 진보적, 개혁적 성향의 인물은 오히려 큰 비율은 아닙니다. 결국 노무현씨를 지지한 사람의 70% 정도는 안정적 보수성향이었고, 이회창씨를 지지한 보수세력 조차도 태반은 안정을 선호하지만 조중동이 만들어 놓은 불안감 때문에 그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대북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우리 민족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전략적 도모를 위해서는 대국민 직접설득 이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한나라당의 논리를 조목조목 부수고, 절차상의 불가피성을 치밀하게 설득해야 합니다.
절차상의 문제 역시 불가피성은 존재합니다.
글머리에 말씀 드렸듯, 북한이라는 다루기 힘든 상대에 대한 지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이 원내 과반수를 점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국회 비준은 고사하고, 대북한 협상자체가 우리 패를 죄다 까고 협상에 임하는 자세가 될 터이고,
만약 협상 결과가 국회에서 부결이라도 되면 북한이 우리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 명백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현대라는 간접지원 방식을 택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그 길었던 남북한 대결구도를 평화화해의 국면으로 전환시킨 성과를 얻었던 것이지요.
절차상의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통치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김대중 그 자신이 색깔논쟁이다, 북풍이다 해서 북한 때문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용기와 굳은 신념은 더욱 빛납니다.
또한 이 통치행위가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이 명백하다면, 텔레비전 앞에서 백 번이라도 목이 터져라 직접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는 정성이 필요했던 겁니다.
좋은 일 해 놓고 바보 같은 참모들 시켜서 병신 짓거리 하다가 욕먹는 짓 하지 말고…
노벨상에 대한 단상도 있지요. 그 권위 있다는 노벨상 위원회가 일개 국가의 국정원 아저씨 로비로, 돈으로 수상이 결정될 수 있다고 믿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발 테레사 수녀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정말이지 우리나라 인재들이 노벨상 받을 길을 앞장서서 막지 말라고… 노벨 위원회가 겁나고 더러워서 어디 한국사람에게 노벨상 주겠습니까?
요한3장3절의 글을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