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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방패 '임영신'의 아름다운 '출산' 그리고....


BY 청량댁 2003-04-07

물과 숲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 시원의 아침



그 물에 뜬 갓난 아기는
스스로 떠 오르려 하지 않기에 뜰 수 있다.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없기에
뜰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고요는 먼저 깨어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스스로 고요할 시간과 공간을 찾지 않으면 일상의 격랑속에서 그저 둥근돌이 되고 말 삶의 격류 함께 흐르면서도 제 물결, 제 문체 잃지 않을 '깨어있음'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지 않아도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 삶이라고, 나무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이 제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허나 내게 이미 '성장'은 '성취'로 기울어져 있고 행복의 저울은 보는 이의 눈금에 가 닿아있습니다. 그 기울어짐을 곧추세우려 생은 제게 이토록 가만히 멈추어 서있어야 하는 시간을 원하는가 봅니다.

젖만 먹을 뿐인데도 둘째 시원이는 하루에 몇번씩 흥건한 소변과 황금색 대변을 봅니다. 콩나물처럼 제 젖이 저 아이를 스쳐지나며 자라게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저 아이를 키우는 것은 햇살과 바람, 땅과 하늘 저는 다만 그 생명의 뿌리에 잇닿아있는 생의 가지 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우주의 어머니를 함께 느끼며 살아가는 나날들 속에서 어느새 저도 늙은 어머니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사무치게 다가온 건 결혼을 통해 느껴본 일상의 무게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생을 가로지르고 있는 두가지 화두인 '생태주의'와 '영성', 그 생각이 우리의 일상으로 스미는 삶을 간절히 꿈꾸던 그즈음 첫째 늘봄이가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몸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순간부터 여자는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말에 민감해지기 시작합니다. 임신을 '신의 임재'라 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제 속을 들여다보는 내관의 힘으로 여자는 임신을 통해 도에 이르고 남자는 명상을 통해 도에 이른다고도 하지요.

내 속에서 나를 살피던 아기는 몸밖으로 나오면 이내 제 말과 몸짓으로 제 거울이 되어주니까요. 그렇듯 내 말과 뜻, 삶의 태도와 습관은 아이를 통해 단련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여 부부는 아이와 함께 부모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성년을 맞이하는 것이겠지요.

허나 몸보다 머리에 집중해있던 오랜 삶을 끌어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먹는 현미밥을 곱씹어야 했던 낯선 밥상처럼, 임신을 통해 부모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일 역시 그런 생경함과 불편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일상을 만들고 그런 부모가 되기 위해 책을 읽고 선생님들을 만나러 다니는 사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아기를 낳는다는 일이 현실의 공간속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병원 문턱을 넘어설 때마다 뼈저리게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꿈꾼 것은 다만 아기의 영성이 존중되고 교감되는 태중의 시간,

아이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는 생태적인 출산환경이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통증을 견뎌야 하는 그 긴 시간동안 남편의 손과 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기를, 항생제나 촉진제, 마취제 어떤 약물이나 인위의 도움없이 아기가 밀고나오는 힘과 온몸의 뼈마디가 열린다는 몸의 신비만으로 아기가 태어날 수 있기를, 어둠속에 있던 아기가 처음 보는 빛이 보다 낮은 조명이기를, 따뜻하게 감싸여있던 뱃속에서 나와 처음 닿는 손길이 아빠이기를, 세상에 나와 처음 맞는 일이 목욕이나 체온을 재는 일보다는 엄마의 품에 안겨 심장소리를 듣고 젖을 빠는 일이기를

그러나 현실에서 그러한 출산을 도울 병원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종합병원부터 개인병원까지, 라마즈 교육을 하고 모유수유를 권장하는 나름대로 앞서가는 먼 곳의 산부인과들까지, 개인의 노력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최선의 시도를 해보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출산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집에서 태어난 늘봄이

우리가 원하는 출산조건을 의사에게 건네려면, 그토록 확신속에 준비해온 말이건만 숨을 깊이 들이쉬고 한참을 머뭇거려야 했습니다. 출산이라는 것이 겨우 30여년 전부터 병원 체제속으로 들어온 것이건만, 그 이전까지는 누구라도 집에서 혼자서도 아이를 낳을 만큼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이었건만 그 일에 대해 제 의견을 말한다는 것이 이제는 마치 어떤 대단한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되어있었습니다.

아기가 생명의 힘으로 진통을 유발시키며 길을 열고 나오고 엄마가 그 고통에 명민하게 깨어있어야 하는 출산의 과정속에서 의사란 다만 조력자일 뿐입니다. 누구도 덜어줄 수 없는 해산의 고통을 고스란히 져야 하는 것은 엄마와 아기의 몫이건만 그 주체인 엄마와 아빠의 요구와 마음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병원의 질서속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길'에서 너무 크고 높은 벽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이기 위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젖이 나올 때까지 우유병을 빨리지 말고 굶겨달라는 것도, 아기가 태어나면 목욕을 안 시켜도 좋으니 탯줄의 숨맥이 잦아들 때까지 충분히 품에 안고 있게 해달라는 것도, 가족이 함께 출산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는 것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병원'이라는 권위적인 체제를 향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하물며 낮은 조명과 음악속에서 아기를 낳고 싶다는 바람에 다다르면 우리의 제안에 대한 의학적 반박과 더불어 공격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 벽에 부딪혀 에돌아 찾아간 곳이 조산소였습니다. 조산소를 찾는 것조차 어려워 114를 통해 조산협회를 찾고 조산협회를 통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조산소를 찾았지요. 그렇게 물어 물어 찾아간 신림동 시장 안의 후미진 골목, 그 낡고 쇠락한 조산소의 문 앞에 다다른 제 걸음은 한숨에 엉켜 잠시 머뭇거리고야 말았습니다. 60년대에 지어진 듯한 낮은 지붕의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며 들어서자 육순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50년째 산파를 해오고 계시다는 그분이 살림집을 겸해 하고 있는 그 작고 허름한 조산원, 아기는 어디서 낳느냐고 여쭈었더니 주무시는 방을 보여주며 여기라고 하십니다. 다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러면 우리 집에서 아기를 낳을 수는 없겠느냐고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습니다. 사당동에서 신림동까지 모시러만 온다면 집에서 낳는 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말에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찾은 길이 집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의 먼지들을 걷어내고 주위와 부모님들의 반대를 막바지까지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맞이한 집에서의 해산, 밤새 가진통을 마치고 30분 간격으로 밀려오는 본진통이 시작된 후 모셔온 할머니는 도착하시자마자 검은 가방에서 링거부터 꺼내며 촉진제를 맞자고 서두르셨습니다. 조산소라는 안도감에 옛날식의 출산방식을 기대했던 저희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조산소를 하면서 병원의 조산사로 일하고 계신 할머니의 방식은 다만 집에서 출산을 한다는 것뿐, 병원에서의 방식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촉진제부터 진통제, 영양제, 마취제까지 모든 약물을 준비해오신 할머니의 가방을 뒤로 밀치며 우리는 다만 아기의 생명력과 제 몸의 신비를 믿겠노라고, 진통은 아기의 몸속에서 제가 나올 길을 열기 위해 엄마의 몸에 호르몬을 내보내 시작되는 '길열기'이니 아기가 진행하는 진통의 속도를 그대로 기다리자고, 어떤 약물로도 밀거나 당기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생의 길을 여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침나절 도착하신 산파 할머니가 지켜보는 속에서 진통이 계속 진행되었지만 아기의 머리가 보이고 양수가 터지고 나서도 밤이 되도록 아기가 나오질 못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할머니는 촉진제를 맞자고 다시 저희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70의 노구에 기저귀 천을 감고 제 온몸의 힘과 무게를 다 받아내시려니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도 하셨겠지요. 이러다가는 아기도 산모도 위험하다며 병원에 가야겠다는 할머니를 향해, 격한 진통의 파도속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한번 해보겠노라고 남편과 저는 한번 더 할머니를 만류했습니다. 너무 오랜 통증과 헛힘으로 눈이 돌출되고 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져나가는 통증속에서 시작한 마지막 시도, 누워서 아기를 낳는 자세가 너무 힘겨워 일어나 산고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등 뒤에서 남편은 저를 받쳐주며 배를 눌러 아이가 나오는 길을 돕고 저는 마지막 신음까지 아껴 혼신의 힘으로 길을 열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 뜨거운 용암처럼 아기가 터져나왔습니다. 그 작고 여린 생명이 목에 두번 휘감긴 탯줄의 당김을 뚫고 우리 곁에 다다른 것입니다. 산도에서의 오랜 지체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기를 배 위에 올려두고 심장소리로 위로하던 그 순간,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에 거센 울음 잦아내리던 그 순간, 뼛속의 힘까지 끌어낼 만큼 삶의 진액을 쏟아낸 제 몸에서 사람꽃 한송이가 피어난 것입니다.



'망각'이 아니라 '지나감' 때문

고통을 덜게 하는 진통제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후유증을 남기지만, 해산의 통증은 아무리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격한 것이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요.

그렇듯 도와줄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고통을 함께 나누며 제게 찾아온 그 아기가 어느새 두돌을 지난 '사내아이'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엔 오빠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또 낳는다는 일. 세상에 쉬운 일이 있을까마는 제게 있어 아기를 낳는다는 일은, 그 지난했던 산고의 기억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괴로움이었습니다. 허나 그 괴로움을 넘어 아기를 또 낳을 수 있는 용기에 다다른 건 '망각' 때문이 아니라 '지나감의 신비' 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잇닿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극한의 고통일지라도 흔적 없이 몸을 지나가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지나감' 혹은 '생명의 스침'에 다시한번 몸을 내어맡기는 것이지요.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면 또 다른 봉우리들이 어깨를 기대며 산의 능선을 이루어가는 삶의 길을 보여주듯, 늘봄이를 만나면서 겪은 여정은 시원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의 문 하나를 열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다툼없는 조력자, 서원심 선생님

지난해 가을, 뱃속의 시원이가 5개월쯤이던가요.《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독자라며 불광동의 은혜산부인과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이지만 자연분만과 모자동실, 모유수유, 천 기저귀를 고집하는 은혜산부인과 이야기를 '작아' 독자들을 통해 건너듣고 있던 터에 그곳에서 조산사로 근무하신다는 서원심 선생님의 연락은 참 반가웠습니다. 그분 역시 그 병원에서 아기를 낳은 몇분의 '작아' 독자가 우리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책을 거푸 선물로 주고 가셨다며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비치셨습니다.

둘째 시원이를 어찌 맞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저희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서 선생님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생태적인 출산환경을 만들기 위해 이미 몇분의 조산사 동료들과 함께 명상, 마사지, 향기요법, 요가 같은 자연적 방법들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찾았던 날 서 선생님이 읽고 계시던 책이《수중분만》이었습니다. 엄마의 양수속 같은 따뜻한 물에서 엄마와 아빠는 물론 아이까지 온 가족이 함께 출산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수중분만, 눕지 않고 자유로운 자세로, 인위적인 회음절개 없이 물의 이완만으로도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그 말씀에 이미 마음은 그 길로 한걸음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참 신비하지요. 서 선생님을 통해 '수중분만'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던 그날, 멀리 평택에 있던 남편은 한 신문에 실린 '수중분만' 기사를 스크랩해서 들고 올라왔습니다. 그렇듯 시원이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길인 양 다툼 없는 조력을 얻을 수 있는 한 길이 수중분만으로 열린 것입니다.

SBS와 한양대 병원에서 '국내 최초의 수중분만'이라며 한 유명인의 출산을 위한 수중분만이 기획되고 진행되고 있던 그때, 이미 은혜산부인과를 통해 몇사람이 수중분만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원심 선생님은 일본에서 연수를 받고 공부를 하며 한두사람씩 조심스레 수중분만을 해보면서도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만은 '집에서의 수중분만'이라는 생각에 닿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중분만이라는 낯선 시도를 집에서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던 그 시절, 우리와의 만남은 서로에게 새로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중분만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욕조만 있으면 누구나 혼자서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쉽고 편한 분만이라는 선생님의 권유에도 선뜻 결정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우풍이 세서 겨울이면 비닐을 쳐야 하는 낡고 오래된 집, 욕조가 없어 방으로 물을 나르고 들여야 하는 불편함, 이런 제약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지니고 있던 생태적 출산에 대한 꿈이 그 제약들을 넘어설 용기를 모두어 주었습니다.



마음의 물때를 닦아내며

아기를 낳기 며칠 전 서원심 선생님은 구파발 골짜기의 저희 집에 올라오셨습니다. 오는 길도 익히고 집 안팎을 둘러보며 어디서 수중분만을 하면 좋을지 함께 상의도 하기 위한 답사였습니다. 함께한 저녁상에서 늘봄이를 낳던 때의 이야기며 우리가 바라는 출산의 여건들을 천천히 그리고 세세히 나누었습니다. 아기와 출산을 대하는 서로의 생각이 같은지라, 서로가 조금의 차이를 보이는 방법에 대한 조율을 하는 그 자리마저도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병원에서 혼자 진통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달려온 의사의 손에 환자처럼 맡겨져야 하는 출산이 아니라 인간적 교감과 교류속에 서로를 알아가고 기다려주며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일이 새삼 참 행복했습니다. 욕조가 없는 우리를 위해 수중분만에 쓸 튜브도 미리 가져다주시고 한밤중에 아기를 낳을 경우를 위해 사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내진을 마치시고 나서 언제든 진통이 시작되면 전화하라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하면 아기도 편안히 나올 거라고 격려해주시며 언덕을 내려가셨습니다. 혹시나 싶어 물의 정화를 위해 참숯을 구해다 깨끗이 씻어 말리고 집 안팎은 물론 마당까지 쓸고 닦으며 시원이를 맞을 준비를 정갈히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9개월까지 병원 한번 안 가본 채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린 시원이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예정일을 열흘이나 넘긴 설 전날이었습니다. 촘촘히 흐르던 열흘의 기다림이 힘겹기도 했지만 바투고 팽팽했던 마음을 넉넉히 풀고, 늘어진 마음들은 조금씩 조이며 새로이 부모될 준비를 하는 소중한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한번의 경험속에서 자리잡은 '안다'는 생각이 시원이를 맞이하는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준비의 부족과 일상의 분주함속에 낀 마음의 물때를 닦아내며 기다린 넉넉한 시간 후에 시원이는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열흘이나 늦어진 출산

설 하루 전,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진통은 점점 간격을 좁히고 격해져 왔습니다. 혼자 조용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방을 정돈하고 집안을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진통이 10분 간격으로 좁아진 후 서원심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함께 있던 남편은 통증의 파도가 밀어칠 때마다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손을 잡아 마음을 다스려주었습니다. 다시한번 청소를 마친 방에 남편은 촛불을 밝히고 아기를 위해 준비해둔 음악을 틀어주었습니다. 며칠 전 그가 하루종일을 걸려 우리가 아침과 저녁으로 함께 듣던 음악들을 따로 녹음해둔 테이프였습니다. 어머니는 이웃으로부터 물려받아 삶고 빨아둔 정갈한 아기 옷가지며 이불들을 꺼내 아기를 맞을 채비를 해주셨습니다.

진통은 첫째때보다 훨씬 가파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30분에서 10분으로, 이내 2-3분 간격으로 좁아진 통증은 점점 견디기 힘든 강도로 몰아쳤습니다. 이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해산의 통증속으로 아기와 저만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새벽 4시, 부천에서 구파발까지 그 먼길을 달려온 서 선생님과 함께 식구들은 수중분만을 위해 방에 튜브를 설치하고 더운 물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준비해두었던 숯을 넣고 깨끗이 삶아두었던 옷으로 갈아입은 후 남편과 함께 물속에서 남은 진통의 시간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안에 설치한 튜브속, 따뜻한 물과 더불어 나를 안아주는 것은 남편의 품이었습니다. 양수처럼 따스한 물은 그 격한 고통이 멀어지는 짧은 순간 깜빡 잠에 빠져들 만큼 깊은 편안함을 주었습니다. 물속에서는 어떤 자세에서 아기를 낳든 아기의 머리가 상할 염려가 없으므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어, 복식호흡을 하며 고통의 파도가 지나가기를 견디는 일도, 힘의 완급을 조절하는 일도 한결 수월했습니다.

전에 없이 새벽녘에 깨어난 늘봄이는 물속에 있는 엄마와 아빠를 보고 저도 동생을 맞이하는 일에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혹여 소리를 지르게 되면 아이가 놀라지 않을까 싶어 통증이 격하게 몰려올 때는 늘봄이를 마루로 내보내곤 했습니다. 통증이 밀려오고 물러가는 사이사이 방에 드나들던 늘봄이는 외려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진통중인 엄마에게 다가와 입을 맞춰주기도 하고 그 작은 입으로 "화이팅"을 외쳐주기도 했습니다. 어린 늘봄이의 시선이, 그 가파른 통증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명민하게 깨어 아기를 맞이한 힘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놓치면 아래로 힘이 쏠리고 마는 통증의 파도, 그 바툰 시간속에서 힘을 주는 것은 엄마의 욕심이라고 고통이 밀려오는 그 순간 자궁이 아기를 밀어내는 그 힘에 몸을 내어맡기고 깊은 숨을 쉬라고, 그렇듯 아기의 속도와 몸의 속도를 따라가면 물속에서 충분히 이완된 몸에 어떤 열상도 없이 아기가 태어난다고 서원심 선생님은 천천히 천천히 우리를 이끌어주셨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생의 순간,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혼신의 힘을 다해 깨어있어 헛된 힘을 빼는 일인 것입니다.

동이 환하게 터오른 아침 7시 40분, 몸이 터져나가는 마지막 진통과 함께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맑은 물속으로 시원이의 얼굴이, 그 작은 몸이 떠올랐습니다. 아빠의 손으로 아이를 건져 아직도 힘있게 펄떡이는 탯줄 그대로 품에 안았습니다. 배운 적 없는 일이건만 품에 안기자마자 젖을 빠는 아기의 생명력, 여전히 탯줄로 연결되어있는 생명의 신비, 천천히 아이를 쓸어안아주며 그 신비의 순간을 촘촘히 느껴보았습니다. 뛰어들어온 늘봄이는 동생이 태어났다며 저도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물에 들어와 아기에게 입을 맞추기도 하고 탯줄을 만져보기도 하며 생명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따뜻하고 맑은 물속에서 네 식구가 함께 시원이의 첫걸음을 축복하던 그 아침은 탄생의 축제였습니다. 생에 그보다 더 큰 축복과 축하가 또 있을까요.

잠시후 태반이 쏟아져나오고 그 태반은 아빠의 손으로 뒷산 언덕에 묻어주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힘의 이완을 못해 생긴 작은 열상을 꿰매는 일도 마취없이 시작했습니다. 주사 한번 맞는 일도 눈물바람을 하는 제가 생살을 꿰매는 그 바늘끝에도 두려움 없이 몸을 내어줄 만큼 단련된 것이지요. 아기를 낳은 물을 치운 방안에서 시원이는 엄마품에 안겨 늘 듣던 심장소리에 낯선 삶을 향한 두려움을 잦아내렸습니다. 아기를 낳고 물속에서 일어서다가 낮아진 혈압과 출혈로 잠시 기절한 제가 깨어나자 선생님은 출혈방지제를 권해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바로 젖을 물려야 하는 몸에 어떤 약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조심스런 우리의 마음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젖이 나오기까지 시원이 역시 오빠처럼 이삼일을 굶어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시원이는 엄마 몸속에서 쌓였던 태변을 모두 쏟아내고 깨끗해진 몸으로 초유를 먹으며 제 속에 타고난 자연치유력과 생명력을 발휘해 세상에 적응해가는 것이지요.

탄생의 평화, 생의 고요

태어남의 평화란 그렇게 온몸에 스미는 것일까요? 며칠이 지나도 시원이는 좀체 우는 법이 없습니다. 하루종일을 합쳐 채 5분도 울지 않고 고요한 하루를 보내는 시원이에게서 우리는 이 아이의 삶에 깃들 평안과 고요를 마주합니다. 어린 늘봄이와 오랜만에 산책을 나선 구파발 골짜기는 어느새 진달래 산천입니다. 지난 겨울부터 맺혔던 꽃눈들이 겨울 칼바람에 단련된 제 온잎으로 잎보다 먼저 가지를 뚫고 피어난 것입니다. 그래요. 겨울을 지난 나무만이 봄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 생명의 축복을 맞이하듯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한 생, 생의 시린 바람 찬 시절 견디어내며 속꽃 피워내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함성처럼 피어난 봄꽃 그늘 밑에서 고요한 침묵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수첩에 시원이가 태어난 날을 적으려 달력을 펴니 2월 4일이란 글자 위에 작고 붉은 글씨로 '입춘' 하고 적혀있습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입춘' 하고 발음해봅니다.

문득 아침밥상에서 마루에 핀 철쭉을 보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건네신 말씀이 마음을 스칩니다. "지난밤 철쭉이 봉오리만 맺혀있다가 아침에 피어나길래 방에 들어갔더니 그 순간 아기가 태어났더구나. 우리 시원이가 태어나던 순간 피어난 꽃이란다."

모두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고개 저으면서도 기분좋은 웃음이 번졌었지요. "그랬었구나, 우리 시원이가 그렇게 겨울속에서 봄을 열며 나온 아이였구나 "


녹색대학'임영신 홈페이지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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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의 고통을 직면하며 그 두려움을 이겨낸 용기로
지금 전쟁과 죽음의 공포에 까지 맞서 일어선 한 가녀린 '엄마'를 기억합니다..

이제 6살, 4살 남짖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들 늘봄이와 딸 시원이를 두고 차마 떨어질 수 없는 발길을 돌린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의 길을 봅니다...

영롱한 삶의 정점에서
정의로롭고 빛나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삶의 길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성은 없을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정말로 진실하게 살기 위해
언젠가, 가능하다면 가장 완벽한 죽음에 이를 자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