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 "포스트 최병렬"이 박근혜라니!
‘포스트 최병렬’은 누구인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야박하고 냉정한 세상은 벌써 ‘포스트 최병렬’이 누구인가에 관심이 쏠려 있다. 한나라당이 ‘뉴 한나라’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포스트 최병렬’을 누구를 내세우는가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여기 저기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의원을 비롯해 몇 명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 중 지금 현재로는 박근혜의원이 가장 유력하다는 성급한 보도도 나오고 있다. 영남 출신의 한 의원은 ‘박근혜의원이라면 몸을 던져 돕겠다’는 발언도 했다. 물론 한편에서는 선거대책위 위원장이 아니라 차기 대표로서 박근혜의원은 곤란하다는 말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 체제’로 가자는 의견도 있다고 들었다.
지금 한나라당은 당의 운명이 어찌될 줄 모르는 ‘격랑속의 쪽배’이다. 이 쪽배가 제대로 거친 파도를 넘기위해서는 확실한 당의 얼굴이자 브랜드, ‘포스트 최병렬’이 완제품으로 나와야 한다. 무늬만 ‘뉴 한나라’가 아니라 진짜 ‘뉴 한나라’당이 되기 위해서는 확고한 당의 얼굴과 노선 그리고 차기 대선주자까지 죽 늘어놓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무슨 근거로 한나라당을 찍어주겠는가?
한나라당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완전히 부패한 당이다. 차떼기 정당이며 매수정당이다. 무엇보다 정치가 사양산업이 되기 전에 그 꿀과 우유로 목욕을 했던 당이다. 그 뿐인가? 정치라는 죽어가는 비즈니스의 거품이 꺼지기 전까지 누릴 것 다 누리며 호사를 한 정당이다.
이러한 한나라당을 국민이 다시 찍어준다면 홍사덕의원의 표현대로 또 한번 ‘바보 국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라당은 완전히 새로운 당의 모습, 확고한 당의 방향, 그리고 당의 얼굴을 내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있는 카드는 박근혜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근혜카드는 판에 놓아서는 안될 카드이다.
박근혜의원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영남권과 수도권에 이미지가 좋은 점, 여성 정치인이라서 새 시대에 부응한다는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과연 박근혜 의원이 완전히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고, 한나당에 다시 한번 시선을 주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물론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여성정치인 박근혜의원이 의미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지난번 한나라당 대선경쟁은 물론 여전히 대통령직 가능성에 매우 가까이 가있는 드문 여성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여성대통령이 나와야 되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박근혜라는 여성 정치인에 대해 회의적이다. 박근혜의원은 스스로 벌고 쌓은 정치적 자산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정치적 유산’의 상속자로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경력이나 정치활동을 볼때 그는 여전히 박정희의 그늘에 묻혀 있다. 박정희는 죽었지만 ‘정치적 왕조’로서 딸 박근혜를 통해 일종의 ‘유훈정치’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박근혜의원에 대해 박노자교수처럼 단순한 ‘죽은 폭군의 공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차례의 인터뷰에서 매우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자기 억제와 절제를 지닌 강인한 성품, 무려 18년을 최고의 정치 현장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실습을 한 것은 확실한 ‘정치적 자산’임이 분명하다.
또한 박정희대통령의 사후 십여년이 넘는 오랜 기간을 세상과 단절된 가운데에서도 허물어지지 않은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박근혜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여전히 영남권의 공주로서, 특정지역의 편애속에서 안주했다. 국회의원으로서 몸을 던져야 할때 몸을 사렸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스스로 미니 정당을 창당해 나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에 쪼르르 돌아온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른바 이회창 총재의 일방적 지도체제에 반기를 들고 탈당을 했을 때 나는 정치인 박근혜의 ‘인간적 독립’도 시작되리라는 기대도 했었다. 예상대로 박근혜의 많은 것이 ‘거품’이었음이 드러났다. 육영수 여사를 떠올리는 향수를 자극할 수는 있었어도,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해 정치인 박근혜와 정치적 동지가 될 새시대의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던 오랜 사람들과 함께 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누구나 예측했던 대로 ‘미니 시한부 정당’으로 끝나고 말았다. 역시 따뜻한 온실에 있던 공주는 비바람과 냉골은 견디지 못하는구나 싶다.
하지만 여전히 공주의 특권은 남았다. 탈당도 어렵지만 복당은 더더욱 어려운 다른 정치인과 달리 공주의 복당은 일사천리로, 아무런 장애없이 이뤄졌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녀 스스로 ‘아버지 박정희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한 점이다. 박근혜가 진정한 정치인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극복해야할 대상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평가’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대통령 박정희의 공과 과를 이야기한다. 박정희에 대한 상찬이 여전히 이 시대에 존재한다.
이것은 이 시대의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이 할 몫을 다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암울하고 숨막혔던 그리고 공포에 가득찼던 박정희시대를 기억한다. 아버지 박정희를 떠나 정치인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극복이 정치인 박근혜에게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
그러나 개방과 폐쇄라는 동전의 두 면 속에서 고민하는 김정일처럼 박근혜에게 ‘통과의례’작업은 정치인으로서 독립이지만 ‘정치적 유산’의 포기를 뜻했다. 결국 박근혜는 상속녀로 남았다. 그녀의 선택이었다.
이제 한나라당이 ‘포스트 최병렬’로 박근혜의원을 선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화약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격이다. 퇴색한 수구보수정당에 분칠을 하는 식이다. 철저한 영남당으로서 지역당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박근혜의원이 지닌 영남권의 이미지에 업혀갈 계산을 하는 한나라당이라면 여전히 ‘올드 한나라’일 것이다. 오로지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견적을 낸다면 이 역시 계산착오일 것이다.
새로운 한나라당의 선택은 단 하나 뿐이다. 잔꾀를 부리지 말고 누구처럼 ‘꼼수’를 두지 말고 우직하게 나아가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유산의 상속자도 아닌 그 스스로 정치적 자산을 일구고 만든 새 인물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늙고 부패한 정당 한나라당이 ‘포스트 최병렬’을 누구로 내세우는가를 지켜보며 국민은 냉정한 계산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전여옥
기사제공 : 조선일보 chosun.com 2004-02-24 15: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