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을 살려야 한다,
학교를 살려야 한다,
학교를
살리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방과후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고 대통령께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학교를 살릴 수 있을까요?
근대적
학교의 출현은 사실 엉뚱하게도 대량생산을 위한 자동화 공장 제도와 생산성 극대화를 목표로 고안된 테일러 시스템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은 하루종일 스패너로 나사 조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테일러 시스템이 지향하는 공장 노동의 표준적인 방식입니다. 산업화시대의 자동화 공장에서는 표준화된 노동을 수행할 표준화된 능력을 갖춘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그에 따라 학교가 대형화되고 대형화된 학교에서 표준화된 커리큘럼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표준화된 노동자의 대량생산, 이것이 근대적 학교의 목표였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은 자신의 자제들을 결코 이 대량생산 형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제들을 전혀 표준화되지 않은 사립학교에 보내 전혀 표준화되지 않은 특별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대부분의 명문들이 사립학교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학교제도를 도입하면서 미국의 공교육, 즉 공립학교 제도를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립학교에서도 공립학교 제도를 똑같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사립학교는 엄밀히 말해서 운영 주체만 사적이지 교육은 완전히 공적입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공립이든 사립이든 모두 공교육입니다.
학교가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딜레마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학교제도는 표준화된 커리큘럼을 통해 대량생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사회는 학교에서 창의력, 독창성, 문제해결력을 길러 주기를 기대합니다. 기업들에서 그러한 능력을 갖춘 노동자를 요구하며, 그에 따라 대학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춘 학생들을 뽑겠다고 나섭니다. 지금의 학교제도로는 아무리 뛰어난 교사가 배치되더라도 절대 그러한 능력을 갖춘 학생을 길러낼 수 없습니다.
공교육의
위기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공교육은 더 이상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삼류학교로 전락한 지 오랩니다. 그곳들에서는 질 높은 교육을 하는 일류학교인 사립학교와 현재의 노동시장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삼류학교인 공립학교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립학교는 외국의 공립학교에 비하면 대단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비해 훨씬 더 질 높은 학생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공립학교를 떠받치는 것은 학교제도도, 커리큘럼도, 교사도 아닌 학생들입니다. 학교가 학생들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학교제도를 떠받치느라 몸도 정신도 등이 휩니다.
학교는
여전히
공장인데 사회는 이미 광고회사인 꼴입니다.
둘 사이에는 태평양이 놓여 있습니다. 사교육의 배가 이 바다를 무대로 활동합니다.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승선 인원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배삯은 경매 방식으로 정해집니다. 많이 내겠다는 사람이 먼저 탑니다. 주머니가 얇은 사람은 엿 먹어라, 종주먹이나 날립니다.
기업에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창의력, 독창성, 문제해결력을 요구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노동이 스패너로 나사를 조이는 노동보다 훨씬 더 큰 부가가치를 생산하며, 그것이 생산의 주류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특성이 변한 것이죠. 공교육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능력을 길러주고, 대학에서 이런 학생들을 뽑아 훈련시키고, 기업을 비롯한 사회에서 이런 능력을 가진 인재들을 채용해서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교육과 채용의 선순환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교육문제의 본질입니다.
사교육의
배는 학생들의 이런 능력을 길러주나요? 절대 아닙니다.
사교육은 ‘테스트’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 줄 뿐입니다. 대학에서는 원하는 학생들을 뽑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릅니다. 출제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험 방식, 시험 문제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패턴화됩니다. 패턴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정답으로 이어지는 자동 프로세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교육은 패턴화 전문가입니다. 문제를 패턴화시키고, 각 패턴에 맞는 자동 정답 프로세스를 만들어내는 데 귀신입니다. 창의력, 독창성, 문제해결력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이 프로세스들을 각 패턴에 적용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아이들은 패턴화된 문제의 자동 해결 기계가 됩니다. 대학에서 원하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아무리 선발방식을 바꾸고 출제 문제를 바꾸어도 사교육의 패턴화 귀신들은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그 문제들을 패턴화시켜 무장해제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시험 문제는 패턴화될 수 있지만 현실의 문제는 패턴화되기엔 너무 복잡합니다.
교육제도는 다음 세 가지 차원의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교육기회의 균등화와 그를 통한 계층이동의 가능성 보장 및 확대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적절한 행동규범(도덕)과 생활능력을 갖춘 시민의 양성
-공동체 리더십의 선발 및 양성
사교육은
첫 번째 목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교육기회가 불균등화되고, 그로 인해 계층이동의 기회가 점점 축소되거나 봉쇄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교육과 사교육, 심지어 가정교육까지 입시를 과녁으로 삼는 바람에 도덕교육과 생활 교육은 아예 포기한 지 오랩니다.
리더는 있되,
그 리더들에게 공동체 의식은 없습니다. 리더들은 ''내가 잘나서''라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고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을 ''못난 녀석들''이라며 조롱할 뿐 자신의 심장을 뽑아 어두운 숲길을 밝히는 공동체의 리더로서의 의식은 없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의
방과후 학교 방안은 첫 번째 목표의 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좀더 폭넓은 현상인 양극화와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참여정부의 이념과 관련해서도 대답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절대 교육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교육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 합니다. 산업화시대에 그 사회적 수요에 맞춰 설정된 교육의 목표, 그 목표를 이루도록 구성된 교육제도를 정보화시대의 사회적 수요에 맞는 목표,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구성된 교육제도로 대체해야 합니다.
훨씬 더 대담한 학교 제도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첫째, 교과서를 없애야 합니다. 실제로 교과서가 없는 나라 많습니다. 또 애초에 학교에 교과서 따윈 없었습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무등을 탐으로써 더 먼곳을 볼 수 있는 종입니다. 아버지의 어깨는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놓은 일체의 성과, 발견들, 한 마디로 문화적 총합입니다. 문화를 상속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인류는 지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교과서는 이 상속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과서는 아이들이 궁금증을 갖기도 전에 질문을 제시하며, 질문을 던지기 전에 대답을 제시합니다. 아이들은 궁금증을 가질 필요가 없고, 대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시된
질문에 대한 제시된 대답을 그저 외우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잘 외웠는지만 테스트됩니다. 인류가 무등을 타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는 교과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공부의 본질은 자신의 궁금증을 문제의 형태로 정련하여 제기하는 법을 익히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노력입니다. 궁금증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이며, 인간이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지금까지 이르게 한 동력입니다. 교과서는 이 궁금증을 무력화시킵니다. 아이들이 미처 궁금증을 갖기도 전에 교과서는 수많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궁금증을 질식시켜 버립니다. 또 대답을 찾아가는 노력의 구체적인 모습은 조사와 연구입니다. 관련된 책들을 읽고, 관찰하고, 실험하고, 선생님을 비롯한 전문가들에게 묻고, 체험하는 그 자체가 공부의 본질입니다. 아이들에게는 교과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참고도서가 필요합니다.
둘째, 교사의 역할 변화입니다.
교과서가 팩트들의 집합체라면, 교사는 팩트들의 해설자입니다. 그러나 교사는 팩트의 해설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연구, 조사, 체험의 가이드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과정은 교과서의 진도가 아니라 아이들의 발달과정과 사회적 필요를 감안한 세부 교육목표로 재정의되어야 하며, 교실은 왜 그러한 과제가 제시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아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 궁금증을 스스로에게 정련된 문제로 제기하도록 격려, 인도해 주고, 해결과정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연구조사의 결과를 발표하도록 기회를 주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 양성기관인 사대나 교대는 예비 교사들에게 각 과목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과 더불어 각 과목의 교육학을 가르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 과목별 수업을 폐지해야 합니다.
물론 수업의 목표가 기능을 익히는 데 있는 과목들이 있습니다. 어학, 예체능 등입니다. 이런 과목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세분화하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배드민턴을 배우고 싶은 학생은 배드민턴을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학생은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탐구형 과목들은 통합되어야 합니다. 지구과학의 문제를 푸는 데는 생물, 물리, 화학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물리에 대한 이해 없이 화학을 할 수 없습니다. 학제 세분화는 문제를 단순화함으로써 가능하지만 세계가 본래 존재하는 양상은 복잡성 그 자체입니다. 학교 교육이 세계의 이해, 현실에의 적용, 현실 문제의 해결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는 과목 세분화가 큰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문제해결 능력은 분석과 종합이 나선형을 그리면서 상승해 가는 데서 나옵니다. 학교에서 대단히 유능했던 학생이 별 것도 아닌 현실의 문제 앞에서 쩔쩔매고 열등생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학교교육과 세계의 존재 방식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누구나 다 절감할 겁니다.
네 번째, 학생의 수업 선택권입니다.
수업은 물리, 화학, 한국사, 도덕 따위로 구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섹스와 인간의 진화’ ‘주라기 공원의 풍경’ ‘뉴턴 역학과 상대성이론, 무엇이 다른가?’ 따위로 강의가 구성되어야 하며, 학생들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강의들을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듣고 연구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그 학기를 마쳐야 합니다. 물론 학생들에게 한 학기 동안 해결해야 할 과제의 수를 정해 주고, 그만큼의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습량을 통제할 필요는 있습니다.
다섯째, 현재의 논술을 폐지해야 합니다.
자꾸만 논술이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채 글쓰기와 공허한 논리학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논술 자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 조사한 결과를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술하는 것이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가 숙제가 되고, 리포트가 되고, 박사학위 논문이 되고, 기업의 프로젝트 보고서가 되고, 네이처에 실리는 연구논문으로 점차 발전되어 갑니다. 글짓기나 형식논리가 아니라 콘텐츠와 설득력이 관건입니다.
어떤 학원도 학교만큼 많은 수의 훌륭한 교사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원도 학교만큼 풍부한 실험자재를 갖출 수 없습니다. 어떤 학원도 학교만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학교는 입시를 패턴화하고 패턴화된 문제의 해결 프로세스를 개발하는 데 학원을 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학원은 교육기관이 아닙니다.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지도 않습니다. 학권은 입시기관이며, 개인적 수요에 부응합니다.
학교가 달라지면
학원보다 훨씬 더 유능하게 사회적 수요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학교는 유일한 교육기관입니다. 학교만이 진정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기관입니다.
훨씬 더 대담한 목표 아래 학교를 혁명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