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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입니다..(펌)


BY 아줌마 2006-09-08

저는 남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학과를 졸업했고(지금은 의대도 남녀가 반반이라고 합니다만 제가 입학하던 시절에는 안 그랬습니다) 유난히 마초적인 성향이 강하기로 유명한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 대학 남학생들은 흔히 농담처럼 자기 대학의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 제3의 성이라고 하면서  못생긴데다 기가 세고 따라서 매력 없는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에 재학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비관하고 신촌의 모 여대 옆에 있는 라이벌(?) 대학의 남학생들을 부러워하던 분위기를 가졌습니다(이건 지금도 그러는지 안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피차 개념이 없어서 당한 성희롱이 부지기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대학 여학생은 여자가 아니므로 술자리에서 야한 음담패설을 동석한 여학생의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껄이고 여성의 미모와 몸매에 대한 가차 없는 비난을 그저 제3의 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속 넓게 웃으며 들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내 성희롱이 지하철 치한보다 차라리 더 나쁜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모호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하철에서 어떤 미친놈이 션찮은 그 물건을 제 엉덩이에 들이댄다면 저는 즉시 돌아서서 그 새끼의 아구를 돌려 쳐줄 자신이 있지만 제가 아는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은근히 이루어지는 성희롱에 대해 그 선배의 뺨을 때린다든가, 그 자리에 동석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선배가 성희롱을 하고 있음을 당당하게 따질 자신이 아직 없더라는 것입니다.

 

생뚱맞다 싶게 이 주제에 대해 갑자기 서프앙님들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렇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제가 술자리에서 모호한 성희롱을 당했으나 그 모호함과 술자리의 분위기라는 그놈의 것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기분만 상해 돌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 20명 정도가 모인 술자리였고 제가 처음 낀 모임이라 어색한 상황에 제가 아는 분은 단 한 분뿐이었는데 그분은 저보다 14살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과 저는 서로 존댓말을 하는 사이이고 서로 의견 교환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그날까지 합쳐서 세 번째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과 제가 격의 없는 사이라던가 흉허물 없는 사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는 뜻입니다.

 

제가 좀 늦게 도착한 관계로 그분은 약간 취해 있었습니다.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여 그 분이 제게 실례를 했다고 생각되는 부분 세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첫째, 제가 그 자리에 있는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분은 거의 제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그분의 한쪽 팔을 제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계셨습니다. 둘째, 제 앞에 놓여 있던, 제가 먹던 포크를 사전 양해 없이 갑자기 가져다가 무엇인가를 한 입 드신 후 저에게 그 포크를 돌려 주셨습니다. 셋째, 제가 담배를 피우는데(그렇습니다. 저는 여자이고 의사이면서도 흡연을 하는, 돌로 맞아도 싼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자기가 금연한지 몇 개월 되었는데 오늘따라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다면서 저에게 자기 얼굴에 대고 연기를 좀 내뿜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거해 놓으니 마치 무척 파렴치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이 잠깐 잠깐의 일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났습니다. 만약 제가 그 부분에 대해 그 자리에서 따졌다면 여자가 아니라 그저 동료로 혹은 그냥 사람으로 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 일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못 알아들으실 몇몇 분들을 위해 저 세 가지가 저에게 왜 기분이 나쁠 일인지를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제 의자 등받이에 그분이 팔을 내내 걸치고 계셨기 때문에 저는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 불편한 자세를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그 분처럼 편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려다가는 그분의 팔에 안겨있는 꼴이 될 테니까요. 둘째, 절친한 친구들과 야외에서 나무를 깎아서 젓가락삼아 먹는 캠핑을 하는 게 아닌 한 다른 사람이 먹던 포크를 양해도 없이 가져다가 먹고는 마치 저도 그 사람의 침을 공유해도 좋다는 양 다시 저에게 건네주는 것은 구역질이 났습니다. 셋째, 통상적인 경우 제정신인 사람이 내 남편이나 내 자식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자기 숨결을 뿜어주는 것은 CPR(심폐 소생술)을 할 때뿐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제가 보기에 이 분은 둘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저를 꼬실려고 그랬던가, 아니면 저를 여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듯합니다. 그도 저도 아니고 단지 저를 성희롱하려고 맘먹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하실 분들도 있을 텐데, 이 분은 누가 보아도 사회적. 정치적. 남녀 평등적 식견이 대한민국 평균 남성보다 월등한 분이기 때문에 일부러 저를 성희롱 하려고 그랬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또한 전자의 경우 이 분은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시고 제가 꼬셔보고 싶을 만큼 출중한 미모나 몸매를 소유하지 않았기에 제외한다면 저를 여자가 아니라 그저 동료 혹은 동등한 인간 대 인간으로 보셨기 때문에 그러셨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술자리에서 상사에 의해 혹은 학교 선배나 동기에 의해 자행되는 성희롱에서는 대개 그 가해자들이 '나는 너를 여자로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라는 변명들을 합니다. 실제로 그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단지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상대를 여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그 분들 모두 엄연히 여자라는 사실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지켜 주실 에티켓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후배 한 놈이 남자들은 참 불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자기는 만원버스 안에서 여자에게 괜한 오해를 살까 무서워서 일부러 가방을 앞으로 가리고 있다면서 그럴 의도가 전혀 없는데도 '쓸데없이 민감한' 여자들에게 오해를 살까봐 그렇게 불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친구도 평소에 사회적. 정치적. 남녀 평등적 식견이 대한민국 평균 남성보다 (월등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높은 편이었기에 저는 놀랐습니다. 혹시 여기까지 읽으면서 제 후배의 말이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서 뜨끔하신 서팡님들 안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으면 남에게 피해와 불쾌감을 주니 다리를 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신문을 넓게 벌리고 보면 남에게 피해와 불쾌감을 주니 신문을 접어서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보는 게 불편해서 불평이 절로 나오십니까? 그 후배가 저한테 이야기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하는 어떤 행동이 남에게 불편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을 때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일컬어 에티켓이라고 하는 것이며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그 정도는 당연히 수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 그걸 갖고 남에 대해 대단한 배려를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가진 어떤 물건이 본의 아니게 여성들에게 불쾌감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상황이 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역시 에티켓이라고 불러야 하는 일일 뿐입니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유죄가 판결됐네 어쨌네 저쨌네 하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던 어느 무렵부터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은 빈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어디 무서워서 술자리에서 농담이라도 하겠어?" 혹은 "아니 나는 그냥 아무 악의 없이 한 얘기(혹은 행동)일 뿐인데 어떤 게 되고 어떤 게 안 되는지 어떻게 알란 말이야? 알아야 조심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라고 말이죠.

 

맹렬 여성들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상대방이 불쾌하거나 싫은 것이 바로 성희롱이다 라고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성단체들의 이야기이고 들여다보지도 않은 남의 속을 내가 어찌 아느냐고 발뺌하는 남자들에게 그 기준이 먹혀들어가기는 힘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남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기준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오늘의 본론입니다.

우선, (심각한 성폭력이 아니라 성희롱의 경우) 여성을 여성으로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들이 미팅 나갔을 때 만났던 그 여성 말입니다. 당신이 온갖 신사도와 점잖음을 보여 주었던 그 여성과 술자리에 동석한 그 직장 여성은 같은 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해 주었으면 합니다. 미팅해서 처음 만난 아가씨에게 음담패설부터 하는 게 원래 내 스타일이라는 남성분들은 일단 패스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그 여성의 애인이나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못할 말이나 행동은 성희롱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주체적이고 싶은 여성으로서 내가 기분 나쁘다면 나쁜 거지 내 애인이나 남편까지 들먹여야 하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을 굴뚝같습니다만 도저히 그 기준으로는 이해를 못하는 대다수의 남성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 제가 여러 번 시도를 해봤습니다만 니 딸이 그런다고 생각해 봐라는 둥, 당신 와이프가 그렇게 당하면 좋겠냐는 둥 하는 얘기도 역시 남자들이 이해도 못하고 공감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 구체적 사례를 통해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O, X 로 대답해 주십시오.

1. "미쓰 리는 다리가 미끈하니 자~알 빠졌어" 이런 말을 미팅에서 만난 아가씨한테 할 수 있습니까? (  )

2. "미쓰 리는 다리가 미끈하니 자~알 빠져서.. 와이프 몸매가 이뻐서 좋으시겠어요?" 이런 말을 미쓰 리의 남편에게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할 수 있습니까? (  )

3. 미쓰 리의 건장하고 조폭같이 생긴 애인과 동석한 자리에서도 미쓰 리의 의자 등받이에 술자리 내내 한쪽 팔을 걸치고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  )

4. 미쓰 리의 남편이 동석한 자리에서도 입술이 작고 도톰한 여자가 잠자리에서 죽여준다더라는 말을 한 후, 미쓰 리 입술이 작고 도톰해서 남편 분은 참 좋으시겠다고 칭찬해주실 수 있습니까? (  )

5. 미쓰 리의 애인이 있는 자리에서도 미쓰 리의 업무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책상 뒤에서 끌어안을 것 같은 자세로 업무를 상세히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코메디죠, 코메디?

 

성희롱 하지 말자는 말이 어쩐지 남자들을 모두 나쁜 놈으로 만드는 말인 것 같아 그냥 기분이 나쁘시다면, 에티켓을 지키자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격의 없는 사이라고 해서 에티켓이고 뭐고 필요 없는 사이라는 뜻은 아님을 다들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는 그런 일을 당할 때 똘똘하게 따질 줄 아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에 실망스러웠습니다. 고작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쳐 앉아 있는 식으로 피했을 뿐이고, 저에게 다시 돌려주는 포크를 그분에게 그냥 쓰시라고 돌려주고 저는 다른 포크를 찾아서 썼으며, 담배연기는 그렇게 하면 더 피우고 싶어질 테니 그냥 참으시라고만 하고 넘어갔던 것입니다.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을 가진 여성인 제가 그럴진대, 회사에서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도 가장 서열이 낮은 많은 여성분들은 어떠실까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여성분들, 모두 힘내십시다!

 

 




P.S 지난 번 고작 예고편이 나갔을 뿐인데도 많은 분들이 기대를 보내 주셔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부담감과 책임감에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도 본업이 따로 있는지라 자주 글을 올리기는 힘들고 매주 화요일에 한편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약속드린 그 시리즈와는 직접 연관은 없는 완전 번외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