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93

공생할 것이냐 공멸할 것이냐(펌)


BY 자매 2006-10-17

작금에 행해지는 북한의 행동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왜 스스로 무덤을 파는지, 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구는 단 한 가지 아닙니까? ‘대화의 장(場)으로 나와라.

그러면 원조해주고,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 이것 아닙니까? 결국 대화로 문제를 풀어보자는 것인데, 북한은 한사코 대화를 거부하고, 핵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이니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북한이 사는 방법은 대화의 창구로 나오는 것입니다. 힘으로 문제를 풀려는 자처럼 어리석은 자가 또 있겠습니까? 또 힘으로 한들 미국하고 겨룰 수나 있겠습니까? 삼척동자도 다 아는 정답을 회피하는 북한이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정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나 회사의 문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 또한 동일한 문제 속에 놓여있던 사람입니다. 오직 주의 일이라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뛰어다녔던 지난 22년 동안, 가장 많이 멍들고 아팠던 사람은 저의 두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16번이나 전학을 다녀야 했고, 그로인해 문제아로 낙인 찍혀 학교생활이 원만하지 못했을 뿐더러 심적 갈등도 심했습니다. 그래서 두 녀석들은 그것을 반항으로 표출했고, 저는 그것을 다스린다고 매번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들과 긴 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불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진작 대화하지 못했을까. 대화했더라면 아들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을 텐데…’ 저만 그렇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고, 아버지가 자신들이 미워서 야단치고 때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봄비에 쌓았던 눈이 녹아내리듯 아들들과의 냉랭했던 관계가 밤새워 나눈 대화로 치료되고 완화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가족과 얼마나 대화를 합니까? 우스갯소리로 경상도 남자들이 집에 들어가 하는 말이 단 세 마디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아이)는?’, ‘밥 도(줘).’ ‘불 끄라.’ 그냥 웃어버리기에는 뭔가 씁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가정이 사정없이 깨져나가고 있고, 아이들이 방황하고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 ‘예기치 못한 일’의 줄거리입니다. 정말 사랑했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사랑해서 같은 집에 살아도 서로 그리워했던 그런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서로에게서 조금씩 멀어졌고, 결국 이들은 이혼에 합의합니다. 이혼은 했지만 남편은 아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러 공항에 갔습니다. 탑승수속이 다 끝났습니다. 이제 비행기에 오르기만 하면 이들 부부는 완전히 끝입니다.

그 때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지금 공항에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모든 여객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하오니 죄송하지만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이들 부부는 공항 내에 있는 커피숍에 마주앉아 자연스레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오래간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서로에게 오해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아직도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하늘에 안개가 사라질 즈음 그들 부부에게도 안개가 걷혔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랍니다. 1등할 것이 따로 있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깨지는 이유야 많겠지만, 그 중 으뜸은 대화의 단절에 의한 것입니다. 대화의 단절은 오해를 낳게 되고, 오해가 깊어지면 원수가 되는 것이 이치니까요. 저는 텔레비전이 가정파괴의 주범인 듯합니다. 모두 입 꼭 다물고 애국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만 보다 잠자리에 들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내 속이 곪다 못해 터져 이혼하자고 하는 겁니다.

곪은 것은 짜내야 하는데, 대화로 풀어내야 하는데 남편이라고 집에 들어오면 입에 지퍼를 채우기 일쑤니 문제가 쌓이는 겁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들어와도 시큰둥한 아내로 스트레스만 쌓이고 이로 인해 몸에 이상이 오고, 결국 밖으로 나도는 겁니다. 자식도 그렇습니다. 맨날 공부하라는 소리만 하지 진정 마음에 있는 말은 아무도 안 들어줍니다. 그러니 별 수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 자기만의 성을 쌓는 겁니다. 이런 가정에 행복은 대문 열고 나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도 그렇습니다. 매년 노사분규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합니다. 왜 이렇게 험상궂은 사태에 직면해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는지… 미리미리 서로 대화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 회사 측의 입장이 어떤지 이야기하다보면 타협이 이루어지고, 그러면 분규까지 가지 않아도 될 터인데 말입니다. 노사분규해서 누구에게 이롭겠습니까? 노사 모두에게 손해 아닙니까?

대화는 비상구와 같습니다. 모든 건물에는 비상구가 있습니다. 불이 났을 때나 위험한 상황에 그쪽으로 피해나가라는 곳이 비상구입니다. 가정에, 기업에, 국가에 위험이 닥쳤습니까? 비상구로 피해나가십시오. 대화의 창구로 나오세요. 대화하다보면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대화해보면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 그 사람이 그 때 오이를 훔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구나. 신발 끈이 풀려 신발 끈을 묶으려고 오이 밭에서 고개를 숙인 거구나.’ 하게 됩니다. 남을 정죄하기 전에 우리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비판할 일도, 정죄할 일도 없게 됩니다. 낮 12시, 아무도 물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을 택해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섯이나 갈아치운 상종치 못할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며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고, 그녀 속내에 있는 것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아마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기 사연을 이야기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그녀는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바로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방네 다니며 그 분이 구주이심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인정하지 않은 예수를 그녀는 알게 된 것입니다. 대화하면 깊은 속을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아닙니까? 속 타면 부르짖고, 때론 은밀하게 대화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기도가 절대 혼자의 독백이나 청구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청구하고, 또는 통보하고 바로 일어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깊은 속을 알고, 뜻을 알며, 나에게 향한 계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성도들을 상담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줍니다. 그들이 속내를 다 드러내도록 그냥 들어줍니다. 듣다보면 그 안에 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들은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신 아내가, 당신 남편이,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의 자녀가, 그리고 당신의 사원이 대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화하지 않으면 당신의 가정이, 기업이 무너질 것입니다. 무너지면 다 같이 죽습니다. 공멸할 것이냐, 공생할 것이냐는 오늘 당신이 입을 열어 대화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맥을 집기 전에 침통에 손을 대지 말라

대화의 단절은 오해를 낳고 오해가 길면 원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