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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께


BY kimkj79 2006-12-02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아들인 저는 불효자중에 불효자입니다. 어렸을적에 총명함에 너무나 기대가 크셨던 부모님..초등학교때 항상 회장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저 였는데..그런 큰 부담감은 항상 제 머리속에 뿌리박혀 있었습니다..그러나 전 누구보다도 저를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던것 같습니다.그러던중 아버님이 위암선고를 받으셨고 보험하나 들어놓지 않았던 저희집은 아버님의 치료비를 감당하기도 힘이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셨고 어머님은 아버님곁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실때가 많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동생들까지도요..전 그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이 아프신데 공부는 무슨 공부...공부는 뒷전이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을 이년...중학교 2학년때는 반에서 1등이 50등밖으로 곤두박질 쳐버렸지요. 그래도 집에서는 저에 성적을 가지고 꾸지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그 모든것들이 저에게는 너무나 슬펏습니다. 아버님이 아프신것도 저때문인것 같고 공부도 하기싫고 그것이 바로 사춘기였나봅니다. 아버님이 아프신데도 참 부모님속을 많이도 섞혀 들었지요. 공부잘하던 범생이가 이젠 동네 아이들을 휘어잡는 깡패가 되었으니..어머님은 밤마다 저를 찾으러 다니셨고 참 많이도 어머님께 소리소리 지르며 대들기도 많이 대들었지요. 그리고 얼마지나 아버님은 끝내 돌아가셨고 그 아버지 자리라는 무거운 짐은 저에게로 떠 맡겨져 내려왔습니다. 거부도 할수없는 아주 무거운 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전 그 짐들이 너무나 무서웠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 속만 섞혀 들었던 제가 이제 4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어머님을 잘 모셔야 할 제가 어머님 혼자 평생 힘들게 모으신 재산을 사업한다고 도움 받아 얼마지나 망해버려도 어머님은 속상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으셨습니다. 다시한번 저에게 힘을 내라고 고운 목소리로 저를 꾸지람 대신 넓은 제 등을 토닥거려 주셨지요. 겉으로 "어머님 고맙습니다" 라는 말한마디도 못하는 아들이 밉지도 않으신지 말입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6월에 일본으로 어머님과 제가 둘만의 오뭇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가서 어머님과 싸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그러나 어머님과 저는 너무나 행복한 여행을 하고 더 큰 모자간의 사랑을 더 깊이 간직하고 왔습니다. 어머님의 환한 웃음 그토록 행복해 하시는 어머님의 얼굴을 그동안 왜 못 보았던지...양산을 쓰시고 혼자 유유히 바닷가를 거닐고 계시는 어머님..그 모습이 노년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어머님은 사진을 보시며 뭐 이런걸 찍었냐고 하셨지만 저에게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너무나 아름다운 어머님의 모습이였습니다... 그리고 몇달뒤 그러니 3년전 추석전에 전 98년 어렵게 결혼한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에게 더이상 잘해줄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도움으로 시작한 만화가게는 하루하루 지탱할 수가 없었고 결혼하며 저에게 주신 몇개의 보험까지도 돈이 아쉬워 해약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매일밤 쭈구리고 않아 부업을 하고...정말 견디기가 힘이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아내를 위해 아니 끝까지 저를 믿어주신 어머님을 위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을 했어야 하는건데..정말 제가 철이 없었나 봅니다. 저보다 더 힘들어 하는 아내를 전 매일밤 술을 마시고와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아내도 울며 저의 강요에 못이겨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도장을 찍어주지 않기를 바랬는데 말입니다. 어머님께는 도저히 말씀 드릴수가 없었고 추석이 되어서야 아내가 오지않는것을 아시고 저에게 어머님은 아내에게 매달리며 사정하라고 하셨지요..때는 이미 늦어버렸는데 말입니다. 어머님과 가족들에게 전 부탁을 했었습니다. 아내에게 전화하지 말라고...제발..그것이 아내를 편하게 놓아줄수 있는 길이니깐요 그리고 전 혼자 작은 옥탑방 원룸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 매일 술만이 저에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도 자꾸 손이 가는 제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요. 그렇게 10개월이 지나 7월 무더운 여름 때아닌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감기에 자주 걸렸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제 몸이지만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약만 먹으면 좋아지겠지를 2주...몸은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고 기력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리 3일을 굶었을까...갑자기 어머님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기력도 없고 정신은 없지만 웬지 어머님을 뵈면 힘이 날것 같고 위로라도 해주실것 같았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넘어설 무렵 저 만치에서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고 그동안 응어리져있던 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아이처럼 말입니다.. 어머님은 저를 보시더니 처음엔 못알아 보셨지요. 그리고...저를 붙잡고 많이 놀라셨습니다..아버님이 돌아가실때의 모습을 제가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요..어머님집에 도착해 몇주만에 거울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을때......예전에 건장했던 저에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초라한 70대의 노인이 한명 서 있는듯 했습니다. 마침 그때 여동생이 오고....저를 쳐다보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달전 만난적이 있었던 여동생은 오빠의 모습을 보고 놀라....내일 당장에 병원에 가자고 졸랐고 저도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가족들의 말소리 조차 들리지않았고 온몸은 비맞은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려왔었으니깐요. 어머님은 제 증세가 심한 병인것 같으신지 제가 가지고 있는 보험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나 가게가 어려울때 이미 다 해약해서 써버렸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암이라도 걸렸으면 아픈 저보다 제곁에서 간호갈 가족들이 아니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할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제 몸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습니다. 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작은 희망.... 누군가 병원엘 데려다 주길 간절히 바랬었지요..그다음달 조금 큰 개인병원에서 엑스레이,피검사등을 했고 엑스레이 결과 한쪽 폐가 하얗게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여동생을 불러 의사선생님께서 얘기하시는걸 보니 제가 큰병에 걸린건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냥 의사선생님의 입모양만을 보고 답변을 해주었지요..폐에 물이 많이차 물을 조금 빼내야 된다기에 옆구에 구명을 뚫어 호수로 연결에 물을 빼냈습니다. 너무나 많은 물들...더이상 빼지말고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으로 달려온 어머님.....어머님 얼굴에는 걱정과 한숨만이 가득했습니다...제 눈을 피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제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으시는것 같았습니다. 다시한번 남편과의 같은길을 아들이 다시 걷는다고 생각하시는것 같았습니다. 검사결과를 기다리기 하루전 보다못한 동생들은 성모병원 응급실로 데려갔고 검사결과 다행히 폐암이 아닌 늑막염 폐렴으로 진단이 나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4주가 지나도 폐에 물이 계속 나오고 폐가 많이 굳어있어 수술을 하게 되었을때 그때서야 전 바보같은 아들,,형,오빠 였습니다. 지금 이나이에 동생들을 돌봐야하고 어머님을 잘 모시고 살아야할 나이에 어린아이보다 못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올해 64세를 맞이하시는 어머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볼 낮도 없었습니다. 폐수술후 중환자실에서 어머님 손을 잡으며 " 어머님 이제는 속 안 섞혀 드릴께요..이제 어머님께 효도할게요..어머님 고맙습니다" 이런 말들이 서슴치 않고 제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평생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한적이 없는 어머니께 말입니다...어머님은 아파트 청소일을 마치시고 천근같은 몸으로 삼십이 훌쩍 넘은 아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기 위해 집으로 달려오고 계셨습니다. 두달의 입원기간동안 병원치료비가 무려 4백만원이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에 주머니에선 동전하나 나올수 없는것이 어머님께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했지만 이미 제 체면은 쓰레기통에 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원비 걱정은 하지말고 몸만 잘 관리하라는 어머님...나중에야 알게되었지만 어머님은 15년간 보험금으로 저급해놓으셨던 보험을 약관대출받으셨다고 하시더군요. 이제는 그에 두배...아니 백배로 갚아 드리도록 노력할 것 이랍니다. 성년이되면서 18년을 알코올로만 보냈던 제자신이 지금에와서야 후회스럽고 18년이란 세월이 너무나 아깝기만 합니다.. 술로인해 정신과 치료와 소중한 가정까지 잃어 버려야 했던 저를 용서하기가 힘이들지만 지금도 늦지않았다고 생각하며 제자신과 알코올과의 싸움에 도전장에 내밀어봅니다. 꼭 이겨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말입니다... 알코올로 인해 망가진 폐를 수술한지 3년....아직도 몸은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일을 하고 있어 얼마전에는 2년동안 일하고 받지 못한 급여를 노동청에서 받게 되어 처음으로 어머님께 2천만원을 드렸습니다. 처음엔 무척 놀라시더니 금새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 "수고했다..우리 아들..." 하며 40살의 다 큰 아들의 엉덩이를 툭툭치시는 어머님...어머님에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있었지요. 어머님은 돈 봉투를 좋아하시는것이 아니라 큰 아품뒤에 철이들어 버린아들이 고마우셨던 것이죠..어머님...그렇게 좋으세요...이렇게 작은것에도 감동하며 좋아하시는 어머님을 왜 몰랐던건지..이렇게 쉽게 웃음을 찾아드릴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조금씩 큰아들로써의 자리를 하나하나 체어 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어머님은 제가 드린 돈을 한푼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통장에 꼭꼭 숨겨 두셨지요..조금만 더 모아서 작은빌라 라도 하나 사자구요.. 그말씀을 들으니 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만 아니였어도 집 팔은돈으로 더 좋은집을 구입하셨을텐데.... 어머님.... 이제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40살이란 너무 늦은 나이에 이제서야 철이 들어버렸지만 어머님께 뒤늦게 제자신과 열심히 싸워 이기는 모습 동생들에게는 존경받을수 있는 맞형으로 어머님껜 효도하는 큰아들로 그동안 부담스러워 피해다녔던 장남의 자리를 지킬수 있도록 다른사람의 두배이상은 노력하겠습니다 3년전 병석에 있으며 어머님의 따듯한 병간호로 예전에 몸으론 돌아갈순 없지만 이젠 움직임이 자유로워 직장일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배운것이 없어 번듯한 직장은 아니지만 할줄 아는건 건설일이라 열심히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며 37년간 망나니 노릇을 했던 저에 그림자를 떨쳐버리려 하고 있어요. "어머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너무나 늦게 철든 아들이지만 그동안 못해 드렸던 효도 이제 다들 어머님을 부러워할 정도로 어머님께 잘해드리는 착한 아들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님 너무너무 사랑하구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