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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조건


BY 자매(펌) 2006-12-03

SHINER 영원할 조건


각기 다른 재료들이 어울어져 집이 세워지다. 집이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재료들이 어우러져야 한다. 같은 재료로는 집이 되지 않는다.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사회가 된다. 한 가지 종류만 있으면 사회가 되지 않는다. 다른 종이 서로 한데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 사자도 있고 하이에나도 있고 독수리도 있어서 아름다운 자연이 유지가 된다. 건축 안에서만 재료들이 영원히 보존이 될 것이다.

세상이 유지 되기 위해서는 필요악이라는 것이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악이라 할 것도 없고 죄라고 할 것도 없다. 다 필요한 것들뿐이다. 전쟁도 필요하고 죽이는 것도 필요하고 살리는 병원도 필요하다. 죄라고 하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면 세상이 평안할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삭막해진다. 정해진 법이 있어서 그 법대로 살라하면 생 지옥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은 자유로운 것이며 날로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법이란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지 생명을 억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가 그것을 악이라 하고 죄라 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죄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죄인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죄일지라도 저 사람이 볼 때는 전혀 죄가 아닐 경우도 있다. 모두 다 죄라 하는데 한 사람만이라도 죄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 아닐 수 있다. 모두 다 돌을 들어서 쳐 죽이려 하는데 한 분이 죄로 정하지 않과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한 분으로 인하여 간음한 여자는 살 수 있었다. 그 사람을 한 사람만이라도 정죄하지 않고 포용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살 길을 택했을 것이다. 자살을 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는 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철저히 자기 혼자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 하는데 저 사람은 그것을 옳다 한다. 그렇다면 나의 어떤 기준이라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옳을지라도 저 사람에게 옳지 않을 수 있다. 죄와 악은 하나님편에서 죄와 악이지 내 편에서 죄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사람 편에서는 죄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죄를 범한 자도 없고 사람에게 악한 자도 없다. 사람 편에서는 의도 없고 죄도 없다.

이슬람권에 속한 자들도 전쟁을 일으키고는 성전이라 하고 기독교권에 있는 자들도 전쟁을 할 때 성전이라 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인가?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라 하는 것과 장로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라 하는 것이 다르다. 서로 교리가 같지 않고 다르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그 중에 옳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느 편이 되어 주시겠는가? 서로 자기가 하나님 편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어 주신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는 것도 성전이 아니며 하나님은 어느 편이 되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를 죄인이라 하시는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를 선하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그분 자신의 입장만 있을 뿐이다. 그분의 입장은 모두를 살게 한다. 그분이 그분 자신을 위함이 모두에게 생명이 되며 진리가 된다. 그분이 죄인이라 하는 자가 죄인이고 그분이 악하다 하시는 자가 악한 자이다. 악하다 하는 자와 선하다 하는 자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나와 관계 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 관계 되지 않은 자가 아무리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했을지라도 그를 좋은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좋다 나쁘다는 것은 다 관계 됨 안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옳다 그르다는 말도 다 관계 됨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유명한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와 내가 관계가 없다면 그 유명한 말이 나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필요가 아니라면 보석이라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아무리 보약이라도 관심에서 제외된다. 사람이 좋다 나쁘다고 말함은 다 자기 필요에 의한 것이다. 누구는 버리는데 누구는 도로 취한다. 이는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취하고 그것이 필요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그분의 필요를 가지고 있을 뿐이시다. 나의 필요는 나 자신이다. 내가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 것이다. 내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을 것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배가 고프면 그것을 찾아헤맬 것이다. 내가 성에 대해 배가 고프면 나는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발버둥을 치고 이리 저리 쏘아다닐 것이다. 그것을 채워보려고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할 것이다. 돈도 벌 것이며 명예도 가지려 할 것이다. 인생의 모든 욕구는 기본적인 식욕과 성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적인 욕구가 강한 자들은 사회성이 활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욕이 약한 사람은 사회성도 약하다. 이는 혈기와 정력이기 때문이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성욕도 강하다. 세상은 어쩌면 정욕과 성욕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세상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모든 것이 다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켜주고 감동을 주고 감격하게 하면 거기 사람이 많이 모여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필요한 조건이다. 그것에 의해 세상은 유지된다. 

성경은 인간의 필요 충족 조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어떠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을 필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의 필요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을 말씀하시고 있으며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지어진 인생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가 된 인생들의 눈에는 폭군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을 알면 참으로 합당하고 당연하고 질서 정연하고 생명이 넘치는 일이다.

질그릇을 위한 토기장이가 아닌 토기장이를 위한 질그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토기장이의 마음에 드는 질그릇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필요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신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 때만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필요를 채우려고 하면 방황한다. 그러나 자기 필요가 끝나고 지으신 분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 때 자기 필요는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다 채워져 있음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를 모르면 인생은 항상 자기 필요만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바쁘다. 하나님의 필요가 채워지면 인생의 모든 필요가 채워진다. 농부의 필요를 채워주는 나무와 곡식은 농부가 영원한 한 영원히 존재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필요가 되어드리는 자는 영원할 것이다. 새와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열매를 제공하는 나무들은 그 번식 속도가 아주 빠를 뿐만이 아니라 그 종이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