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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랑해요..


BY park2182 2006-12-03

온 누리가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어 가는 저녁이 되면, 깃을 꼭꼭 숨기고 집으로 돌아오실 아부지를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던 때가 생각납니다. 동생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하던 그때, 저만치서 저희를 발견하시고 몰래 다가와 호랑이 울음을 흉내 내시며 놀라게 하곤 하셨지요. 당신을 기다리며 노는 저희가 대견하셨던지 포장마차로 데려가 맛있는 오뎅을 사주시며 행복해 하셨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부지셨는데, 절친한 친구에게 많은 돈을 떼이시고 나서부터는 더는 아부지의 환한 미소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부지는 매일 술을 드셨고, 늘 술 취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셨지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꺼이꺼이 울음소리를 삼키시며 저희 방에서 숨죽이며 눈물을 토해내셨어요. 온화하고 정 많으신 아부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면서 아부지의 대한 원망이 조금씩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렸지요. 저희 부녀 사이에 대화란 고작 해야 3마디를 넘기지 않았고 말을 하는 날보다는 그렇지 않은 날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아부지란 말을 입에 담은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한번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저만치 앞에 아부지가 보였습니다. 그날따라 왜 그리도 아부지의 뒷모습이 초라하고 작아 보이던지.. 왠지 그런 아부지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단단한 바위도 깨부실 듯 위풍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은 제가 7살이 되던 그해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쯤 우연히 아부지는 뒤를 돌아보셨지요. 만약 그때 제가 아부지께 달려가 반가운 미소라도 날렸더라면.. 안타깝게도 저는 아부지를 보지 못한 양 고개를 숙이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아부지의 뒤만 쫓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만약 내가 아부지였다면, 참으로 많이 속상했을 것 같습니다. 평생 키워온 자식이 아부지를 보고서도 본채 못 보채 했으니, 이보다 더 속상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저를 대해 주셨고 오히려 그날부터 저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한번은 점심시간이라 회사 동료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문자가 왔습니다. "우리 딸, 밥 맛있게 먹어라" 분명 번호는 아부지의 핸드폰 번호였지만, 핸드폰으로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는 것만 하실 수 있는 분이 어떻게 문자를 보내셨는지 참으로 궁금하더군요. 혹시나 다른 사람이 저에게 잘못 보낸 문자가 아닐까 해서 밥을 먹다가도 여러번 핸드폰 번호를 확인하게 되었어요.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기분 좋게 술을 한잔 하신듯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저에게 문자는 잘 받았느냐고 물어보셨지요. 저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잘 받았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게 참 어색하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수백 번 되새겼던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배터 낼 수가 없었습니다. 20년의 공백을 깨고 이전처럼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부녀 사이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느덧 저는 평생을 믿고 함께 살아갈 제 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청혼을 받던 그날 왠지 모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아부지였어요. 그토록 미워했던 아부지가 왜 가장 먼저 생각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를 부모님께 보이기 위해 집으로 데려가던 그날, 아부지는 흐뭇한 미소로 저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참 내가 이 녀석한테 잘못한게 많네. 그러니 네가 해주지 못한 몫까지도 잘해 주었으며 하네. 네가 바라는 건 그건 뿐이라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지막한 그 목소리가 참 많이도 떨이고 있었다는 것을요.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결혼식을 바로 앞둔 그날 저녁. 어머니는 제 방문을 스르르 열고 들어오셔선 저에게 흰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네 아부지는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건 아부지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란다." 급할 때 쓰라며 건네신 그 돈은 언젠가 시집을 갈 저를 위해 10년간 아버지께서 매일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천원씩 저금을 해 온 아부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더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지내게 되겠지.' 왠지 모를 서운함이 가슴을 졸였고 만약 이대로 떠나게 된다면 평생토록 아부지와 화해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가니 어머니가 저의 마음을 아셨는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셨지요. 그때, 아버지는 등을 돌이시고 책을 펼치셨습니다. "아..부..지" 아부지는 돋보기가 없으면 보이지 않는 책을 그것도 거꾸로 듣고 계셨지요. "아버지 참 이상하죠. 그토록 아부지를 미워하며 살았는데 가장 기쁠 때 먼저 생각나던 사람이 아부지였고, 가장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도 아부지였어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계신 아버지가 등을 돌려 저를 보셨을 땐 이미 주룩주룩 흘린 눈물이 옷깃을 충분히 젖시고도 남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저와 아부지는 오랜 세월 동안 담고 있던 오해와 미움을 눈물로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밖에서 저희에 대화를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술상을 한 상 차려 주셨어요. 술상을 받아온 저를 보고 아버지께서는 잠시 기다리라며 어디론가 가셨더니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기 전에 이거부터 마시라며 저에게 작은 병에 든 음료를 건네 주셨지요. 그날 저녁 아버지와 저는 초조 빛 술을 서로에게 건네며 이윽고 달이 뜨고 질 때까지 지난 날을 돌이키며 깊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일이 결혼식인데 이렇게 마셔도 되겠느냐는 어머니의 걱정은 한낱 말뿐이 되지 않았지요.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요. 따뜻한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깨워난 저는 지난밤에 술을 마신 것도 잊어버린채 급히 결혼식 준비를 하였습니다. 비록 훌륭한 예식장은 아니었지만, 친지 몇 분을 모시고 간단하게 올릴 결혼식을 기다리다가 문뜩 어제 술을 마신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알았습니다. 아부지가 저를 위해 00케어를 먹였단 참 뜻을 알게 되었지요. 만약 아부지께서 그때 저에게 00케어를 먹이지 않으셨다면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식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만으로도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아부지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가던 그때 살포시 보이는 아버지의 웃음으로 세상이 환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아부지께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었지요. "아버지 감사해요. 저에게 00케어 챙겨주셔서..." 신선한 수액으로 마지막까지도 저를 챙겨주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다짐했습니다. '아부지 이제는 제가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신혼여행을 떠난 그날, 저는 짐보따리 속에 또 한 번 아부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술 많이 먹지 말고, 술 먹기 전에 00케어 꼭 챙겨 먹어라." 쪽지와 함께 여행가방에 있던 00케어를 마시며 남편에게 말했지요. "이렇게 멋진 아부지 본적 있어? 이렇게 딸 생각하는 아부지를 본적이 있어요?" 글썽이는 눈물을 보고 꼭 안아주던 남편도 저와 함께 깊은 감동을 하였는지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장인어른 같은 분은 없을 거야....."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사랑하는 딸을 위해 문자 보내는 것을 배우시고, 행여나 결혼식을 망칠까 봐 약국에 뛰어가선 00케어를 챙겨주신 저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버지께 진지를 챙겨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