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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 원하는가? 답은 있다.


BY 자매(펌) 2006-12-22

한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이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42.195km를 달릴 때 어느 코스에서 가장 힘드셨습니까?” 하고 기자가 묻자, 우승자는 말했습니다. “마라톤 코스가 힘든 것이 아니라 신발 안에 모래알이 하나 들어갔는데, 그것이 내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온통 그것에 신경이 쓰이고, 그것 때문에 온몸이 아팠습니다.”

신발 안에 모래알 하나, 그런 자가 단체 속에 있다면 그 단체는 그 사람으로 인하여 몸살을 앓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 우리 땅끝예수전도단 사무실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어에 능하다는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했는데, 이 사람이 신발 속에 모래알인 겁니다. 융화가 안 됨은 물론이고, 혼자 독불장군이어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과감히 빼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으로 인해 단체를 아프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발 안에 든 모래는 참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신발을 벗고 모래를 털어내야 합니다. 모래알 하나, 그거 별 것 아닌 거 같은데 그대로 걷거나 달리면 처음에는 발이 아프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인해 온몸이 아프게 됩니다. 척하면 삼척이고, 쿵하면 담 넘어 호박 떨어지는 소린 줄 아는 것까지야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일하고, 같이 살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생 모래알로 인해서 아플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시끄럽고, 융화가 안 돼도 그냥 사랑으로 덮고 가야 하는 겁니까? 발이 아파도 모래알을 그대로 둬야 옳은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사라의 몸에서 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먼저 난 사라의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자꾸 다툽니다. 나이 많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니, 그것이 그들의 어머니 싸움으로 번지고, 그래서 집안에 편할 날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룬들 편했겠습니까? 이스마엘도 자기 자식이요, 이삭도 자기 자식이니 어느 편을 들 수도 없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창21:11). 근심에 싸여 번민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해답을 주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창21:12).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는데요? “그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빼내자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어주고 말입니다. 물론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야 찢어졌겠지요. 그러나 아프다고 수술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거든요.

만일 아브라함이 계속 하갈과 이스마엘을 정 때문에 끼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아마 믿음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했을 겁니다.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두고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그의 어미 리브가는 야곱을 외가로 보냈지 않습니까?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싸움과 재앙을 막을 수 있었고, 세월이 흐른 뒤 화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어미인 하와가 현명했더라면 살인이라는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할 때였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지다 보니 아브라함의 가축을 기르는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창13:9). 갈라서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협력과 융화로 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갈라서는 것이 서로 사는 길입니다. 고름이 살 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고름은 짜내야 하는 것이 이치고, 짜내야 안 아픈 겁니다.

대사도인 사도 바울도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출발에 앞서 생질인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15:2). 그래서 이 둘은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각각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던 것입니다(행15:37~41).

누가 나쁘고, 누가 잘못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좋습니다. 가면서 다투면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줄 압니까?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맞는 사공이 많아보십시오. 배가 엄청나게 빨리 갈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장성 기도원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운동회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운동회에서 줄다리기를 하는데요. 사람 수가 훨씬 많은 쪽이 계속 지는 겁니다. 수적으로는 우세한데 왜 지는가 봤더니 이게 마음이 서로 안 맞는 겁니다. 똑같이 “영차” 할 때 잡아당겨야 힘이 모이는데, 이게 들쑥날쑥한 겁니다. 자기 멋대로 잡아당기니 힘이 분산될 수밖에요. 노를 저어도 그렇지 않습니까?

양쪽 노를 젓는 힘이 같아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어느 한 쪽이 세다면 배가 그 자리를 맴돌고 말 것입니다. 큰 톱니바퀴와 작은 톱니바퀴가 나란히 갈 수 없고, 황새와 뱁새가 같이 갈 수 없는 것이 이치 아니겠습니까. 큰 톱니바퀴가 작은 톱니바퀴더러 ‘잘못되었다’ 할 것이 없습니다. 또 작은 톱니바퀴가 큰 톱니바퀴더러 “왜 너는 그렇게 크냐?”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 맞추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맞아야 행복한 결혼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안 맞으면 바로 그것이 생지옥입니다. 가끔 외관상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들이 갈라서는 경우를 봅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성격차이”라고 말입니다. “밥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런 소리하는 거지, 뭐 그게 대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살아본 사람만 아는 고통일 겁니다.

그래서 조건만을 보고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조건이야 살면서 만들면 되지만 성격을 맞추고, 마음을 맞춰가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9). 부모들도 마음에 맞는 자식과 살아야 편합니다. 제 어머니는 셋째 아들과 살고 계십니다. 제가 한 번은 “어머니, 이제 저랑 같이 사시죠.”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런 말 말아라. 난 셋째 며느리가 제일 편하다.” 이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더 이상 권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마음이 편하시다는 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꼭 장남하고 살아야 한다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딸이 편하면 딸하고 살고, 둘째 아들이 편하면 그 아들과 살면 됩니다. 더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겠다 싶으면 혼자 사십시오. 사무실에서도 마음이 맞는 자와 일하면 신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맞으면 우주와도 안 바꾼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하나님도 마음에 맞는 자와 일하셨습니다. 사울이 마음에 맞지 않으시자 다른 이를 대신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삼상13:14).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속이 편해야 온 몸이 편한 겁니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보다 우선인 것이 수신제가(修身齊家) 아닙니까? 배에 가스가 자꾸 찹니까? 분출시켜야 시원하다는 것을 아십시오. 마음이 맞는 사람과 동업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결혼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달리십시오.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소리나는 바퀴는 갈아끼는것이 상책이다
고름이 살 되지 않는다 곪아 터지기 전에 짜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