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엄마 보세요~~!!~~ 어느덧 당신의 나이 칠십. 당신의 얼굴을 떠올릴때면 전 늘 마음이 아프고 시립니다. 어렸을때 기억이라면 늘 술과 도박에 절어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식구들을 못살게 굴던 아버지의 모습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지요.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지금처럼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는 남의 집 하우스에서 깨밭에서 몸을 숨기고 하얀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는 낮가리에서 나무등걸 사이에서 몸을 피하고 아버지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가 새벽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어떤 날은 출입문에 각목을 박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동생이 부엌 창문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던 때도 있었고 경노당에서 밤새 술과 도박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오는길에 다리 아래 개울로 떨어져 아버지를 엎고 집에 오던 일이며... 술이 너무나 취해서 속옷 바람으로 남의 집 대문가에서 고래 고래 소리라도 지르는 날이면 다음날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전 고개를 차마 들수가 없었습니다. 술이 깨면 참 다소곳하고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였에 술만 취하면 그처럼 돌변하는 모습이 더욱더 낯설었지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한 모습으로 늘 얼굴이 벌개져서 가족들을 못살게 굴던 나의 아버지. 겨울에 나무가 없어서 정부미 자루를 들고 온가족이 하얀 눈밭을 헤치며 검불을 긁고 광솔을 따고 나무를 해와도 눈하나 꿈쩍 안하고 아랫묵에 가만히 누워서 담배만 피시던 나의 아버지. 어떤 날은 나무가 없어서 종이를 때서 밥을 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날이 갈수록 폭군처럼 변해가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당신은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서 무작정 시내로 나오셨었죠. 비가 몹시 오는 날 밍크 이불 하나 비닐에 싸서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무작정 한시간 거리에 있는 시내로 나와 여관을 하나 잡고 넷이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서러운 잠을 청했던 우리 엄마. 전 그 날 밤을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아니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해야 맞겠죠. 그리고 다음날부터.... 당신의 고된 세상과의 싸움은 이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진 빚을 가려야 했고 어린 우리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던 당신은 얼마 후 월급과 조건이 보다 나은 서울이란 곳으로 무작정 가셨었죠. 우리는 매달 당신이 보내주는 돈으로 보증금도 없는 방의 방세를 내고 책을 사고 납입금을 내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도 집에 있을때보다는 행복했던거 같아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가면서 월세에서 방 한칸짜리 전세로 그리고 방 두칸짜리 전세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당신은 정말 전장터에 나가서 싸우는 용사처럼 피가 나도록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고 숙제를 하면서 잠이 쏟아지다가도 문득 문득 잠이 번쩍 깨곤 했습니다. 큰오빠와 둘째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서 집안 형편은 차츰 나아졌고 당신은 11평 임대 아파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보증금 삼백에 방 두칸.... 주방은 사람 하나 다니면 딱 맞을 공간... 그래도 그때 그러한 집이나마 마련하고 엄마랑 저희들이랑 울며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순간이 새록 새록 나곤 해요. 몇 년간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당신은 고향으로 내려오셨고 우리들과 함께 살며 다시 식당의 궂은 물에 손을 담그기 시작했죠. 그 사이 당신의 열손가락은 주부 습진을 넘어 손톱 무좀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고 발톱 역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된 물일은 당신의 허리 또한 아프게 만들었고 당신은 이따금씩 편두통으로 고생을 하셨지요.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고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아고고고.... 소리를 내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어떤 날에는 절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의 소식이 전해졌지요. 많이 위독하다는..... 당신은 고향으로 가서는 이제는 늙고 힘없고 병이 들대로 든 아버지를 모시고 오셨고, 그리고 사년간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전 생각했어요. 일안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우리들은 항상 학교가 끝나면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밭에서 논에서 뜨거운 땡볕과 싸워야 했었죠. 일년 삼백육십오일 술에 절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늘 어서 커서 집에서 탈출하고픈 생각에 절어 지내야 했었는데 늙고 병이 드니 엄마의 손에서 하루 하루 연명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무던히도 밉고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실까 싶어서 가슴이 메어오는등... 전 제 감정을 추스르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달전부터 황달로 배가 만삭인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르고 대소변도 못가려 당신은 힘든 식당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한시가 넘은 시각부터는 아버지의 수발로 정신이 없으셨죠. 또 점심 시간에는 짬을 내어 집에 오셔서 아버지 식사를 차려드리고... 그렇게 두달간의 시간을 끝으로 아버지는 길고 지루하고 답답한 세상과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과의 끈을 놓은 순간부터 통곡하던 당신의 모습.... 그 피섞인 울음토하는 소리에서 전 당신의 아픔을 보았어요. 아버지의 죽음이 슬퍼서라기보다는 당신의 인생에 대한 서러움과 아픔과 한이 더 많이 야기되어 있는 당신의 그 피섞인 절규어린 울음소리가 왜 그리도 서럽게 느껴지던지... 당신보다 나이가 열한살이나 많건만 늘 어린애처럼 굴던 아버지의 모습... 아, 나의 아버지는 왜 늘 그런 모습이어야만 했는가..... 왜 나의 아버지는 내 친구 미정이네 아버지처럼 그런 다정다감한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못하고 늘 식구들을 못살게 굴고 집안 살림을 때려 부수고 바람을 피우고 술과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해야만 했는가.... 사실 전 지금까지도 그런 아버지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정말이지 끔찍이도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니 배우자인 당신은 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가여운 당신, 아파야만 했던 당신, 고생을 몸에 달고 살아야 했던 당신.... 그런 당신의 모습을 뒤로 하고 막내인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을때 당신은 참 많이도 반대했었습니다. 전 어렸을때부터 늘 꿈꾸어 왔었지요. 나의 아버지는 비록 그러했지만 시아버지만큼은 좋은 분을 만나고 싶다고... 그런데 시아버님 역시 아버지나 별반 차이가 없는 그런 분이셨죠. 성실한 남편보다 그런 시아버지 자리를 더 못마땅해했던 당신... 시어머니 역시 어려운 형편 때문에 식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게다가 애 아범이 장남이었으니 당신의 반대 이유가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눈에 보이는게 없어야 결혼을 한다죠. 정말 당시에는 사람이 한번 좋아지기 시작하니까 모든게 눈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당신의 그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저는 결혼 일년만에 못살겠다며 친정으로 향했었죠. 의심이 많았던 남편의 그 날밤 행동...은 지금도 이해할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수년전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으니까요. 당신은 내게 이혼할 것을 권했고, 하지만 일주일후 김서방은 집으로 내려와서 자신의 잘못을 싹 싹 빌었더랬죠. 그 후로 결혼 팔년동안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외삼촌, 이모, 외할머니 등의 단어 등은 한번도 불러본적도 들어본적도 없는 저희들에게도 외갓집 식구가 생긴 것은 십년전이었습니다. 당신은 고아 아닌 고아였으니까요... 집에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당신에게 그런 변화를 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죠. 큰이모 아드님은 아버지 이름 하나만 가지고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전화를 하셨고.... 지쳐가는 도중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걸었던 전화가 극적으로 통화가 되었고... 수년간 홀로 외롭게 세상과 투쟁중이던 당신에게 핏줄이라는 것이 생겼었죠. 낡고 초라한 집에 이모님이 들어서는 순간 통곡하던 당신의 얼굴...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요. 아버지 얼굴도 모른채 태어나 작은집에서 온갖 구박을 받고 살다가 전쟁으로 혈혈단신 고아가 되어 살아왔을 당신의 육십년 인생... 어쩌면 그리도 당신과 얼굴이 꼭 닮았는지... 전 사실 너무나 신기했답니다.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언니라는 사람이 그런데 얼마전에 세상과 이별을 하셨었죠. 당신의 그 아픈 마음 다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은 옆에 서 있는 제 자신조차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왜 그리도 한이 많은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나야만 했는지....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딸인 저는 또 결혼 팔년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당신의 속을 무던히도 애태웠었죠.. 아이를 낳기까지 제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그대로 당신에게 전이되어 아픔을 함께 감수해야 했습니다. 거듭되는 인공수정과 시험관의 실패 소식이 전해질때마다 당신은 절망하셨고 이어지는 유산의 아픔은 당신을 더욱더 깊은 나락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 온전치 못한 딸의 안전한 임신 유지를 위해서 모든 것 마다하고 서울로 오신 당신.... 낮에 혼자 있으면 안된다 하시며 밤에 설거지를 다니시고 그 무거운 몸을 끌고도 병원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행해 주셨죠. 이번에도 실패하면 안된다며 베냇저고리에 부적을 달아서는 삼칠일동안 배에 두르고 있으라던 당신... 전 그것을 삼칠일동안 한번도 배에서 내리지 않고 두르고 있었습니다. 후에는 그것을 하얀 종이에 싸서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먼저 입히라던 당신... 전 사실 의심스러웠어요. 내가 과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이가 무사히 열달을 채우고 나올까..... 기우였죠... 약한 자궁 경관 덕분에 16주에 봉합수술을 하고 그처럼 조심하며 누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개월에는 또 한번 하혈이 심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높아만 가는 혈압과 단백뇨수치와 부종을 견디지 못하고 임신 중독증 진단을 받은 저는 칠개월쯤에 장기 입원 환자가 되어 병실에 송치되었습니다. 침대 위에서 대소변까지 보아야 하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생활이 한달간 지속되었으나 아이가 더 이상 크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만 결정이 내려졌고 전 아이를 낳아야만 했습니다. 1킬로도 안되는 아이를 보는 순간.... 울컥 쏟아져나오던 눈물... 전 그대로 죄인이었습니다 너무 작게 너무 일찍 태어난 아가는 인큐베이터에서 나날이 늘어가는 주사바늘과 함께 힘겨운 투병 생활에 들어갔고 그 아이를 볼때마다 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파와야 했습니다. 그런 외손주를 위해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병실문을 여닫았던 당신.... 전 생각했었요. 가여운 딸아이를 보며 또다시 나와 같은 삶을 반복하면 어쩌나.... 아마도 당신이 유일한 딸인 저를 보며 수도없이 그동안 헤아려 왔을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에 딸가진 부모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느껴 보았답니다. 다섯달간의 긴 투병생활을 고비 고비 넘기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우리들은 다같이 감격에 겨워 울었었죠. 그랬던 아가가.... 이제는 제세상 만난 듯 까르르 웃고 마구 마구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곤 합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행복해요~~~~ 예쁜 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사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든 어린 핏덩이가 인큐베이터에서 수많은 병마들과 싸워낸 시간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당신이 살아온 삶에 비하면 또한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사는 것이 지친다 싶을때면 전 하늘을 바라봅니다. 파란 하늘 속에서 뭉게 뭉게 피어 오르는 하얀 구름을 보며 어렸을적 고향 하늘을 떠올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증 부리지 않고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오신 당신의 삶에 박수를 보내 드려요. 오월은 가족의 달이라 그럴까요? 유독 오월이 되면 붉은 카네이션을 볼때마다 당신의 홍조빛 발그레한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더욱더 시려와요. 당신에게 뭐 멋진 딸은 자랑스러운 딸은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세상과 대면하기 위해서 늘 노력은 해 봅니다. 이제 칠십줄에 들어선 나의 엄마....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은 나를 사랑할테지요. 당신이 내게 보여 주셨던 그 사랑을 이제는 나의 딸에게 물려 주려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하셨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어떠한 경우에도 꺽이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지혜로운 삶을 살라고 잘 일러 주고 싶어요. 엄마, 건강하셔야 하구요, 그리고 항상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