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세탁소나 열쇠가게까지 지역 대형할인점이 차지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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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04-03 14: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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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 |
한미 FTA가 체결되었다. 국회 비준을 남겨두고 또 한번의 홍역이 예상된다. 사실 얼마나 이익이 되고 얼마나 손해가 될지 매사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교차한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이 기회를 위기가 아니라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개방이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엄살도, 개방만이 살 길이라는 일방적 주장도 국민들에겐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구체적으로 개방이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세밀한 경험적 증거와 전략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일산에 대표적 다국적 기업인 월마트와 까르프가 손들고 철수했다. 월마트 자리에 이마트가 들어섬으로써 일산에만 이마트가 두 개 생기는 독과점(? 통계상 정확하지 않아 단정할 순 없다)이 형성되었다. 나는 그 동안 월마트에서 주로 장을 봤다. 과거에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억지로 다니기도 했지만 혼자 고생한다고 재래시장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바쁘고 힘들다 보니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 농산물을 살리겠다고 농협의 하나로마트를 다니기도 했는데 매장이 너무 넓고 물건 찾기가 불편한 것까지는 참겠는데 수입품이 없으니 장을 꼭 두 번 봐야했다. 수입품은 절대 팔지 않는 경직된 농협의 정책이 주는 불편함을 참지 못해 결국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월마트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시절부터 ‘폐쇄적 민족주의자’였다. 자비를 약간만 내면 학교에서 외국 여행을 시켜주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렵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다했다. 당시는 여행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모든 학생이 부러워하던 해외여행의 기회였지만 중동에서 노동자들이 고생해서 벌어들인 외화를 한 푼도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명문 사립대가 아닌 장학금을 주는 주립대를 택해 미국유학을 간 것도 한국에서는 달러를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유학생이 처음 오면 장만하는 것이 소니 텔레비전이었지만 우리는 텔레비전, 컴퓨터는 물론이고 가습기, 전자렌지, 벽시계까지 한국산을 찾아다니며 구입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산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아 쇠덩이만큼 무거운 전자렌지를 사온 지 하루 만에 고장나 다시 들고 가서 바꾸는 위험(미국은 배달이 없다)을 감수해야 했지만, 우리가 made in Korea를 사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월마트가 없어지면서 나는 왜 개방이 국민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마트의 독과점(?)이 이루어지면서 장바구니 가격이 20% 정도는 뛴 것 같다. 이마트는 준비된 재료를 사다가 물만 부으면 될 정도로 식품을 깨끗하게 가공하고 진열해놓았다. 그 편의성과 준비성 때문인지 가격은 월마트에 비해 훨씬 비쌌다. 하지만 고객은 50% 이상 증가한 것 같다. 이는 분명히 주변의 슈퍼에서 장을 보던 사람은 물론이고 농협의 기존 고객들도 유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탁소에 열쇠점, 약국에 손톱 관리실까지 갖춘 이마트는 원스톱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편리한 곳이다.
얼마 전 동네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인근 세탁소를 이용하다 이제는 주말에 세탁물까지 이마트에 들고 간다. 값도 싸지만 보상도 확실하게 이루어져 세탁물을 직접 들고 가는 불편함 정도는 참을 만 했다. 언제 동네 열쇠가게도 문을 닫을지 모를 일이다. 이마트에서 장을 보면서도 슈퍼도 문방구도 문을 닫아 우리 동네가 황폐해질까 마음이 불안하다.
지난해 미국에 살면서 왜 주거지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거대 도매상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씩 건재하게 살아남는지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도매상점은 주요 거주지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스톱 서비스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다. 대형마트에서는 모든 물품을 반드시 대량 구매해야 한다. 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소량이나 가공 식품의 구입은 대형마트에서 불가능하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역할 분담이 되어 있어 구조적으로 거대자본이 영세업자의 생존을 위협할 수 없는 환경이다.
결국 서민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개방 그 자체가 아니라 거대 자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우리의 시장환경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개방 반대가 아니다. 거대 자본이 영세 자영업자들을 잡아 먹지 못하도록 독과점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재벌기업이 식당까지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살아남겠는가.
하지만 규제만으로 거대자본을 제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들 재벌과 경쟁할 수 있는 외국기업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이다. 외국기업이 이런 식으로 손들고 나가면 재벌천국이 될 것이고 결국 중소업체들은 이들에게 손해를 보면서 물건을 납품해야 할 것이다. 동네 자영업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한국기업을 키우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열심히 키운 그 기업에 의해 지배당하게 될 우리의 미래가 더 두렵다. 그들의 로비능력을 감안할 때 우리의 국회가 과연 이들에게 불리한 규제법안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내내 미국에서 쇠고기 실컷 먹고 왔는데 누군가 내 건강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코미디인가. 광우병으로 죽을 확률보다는 교통사고를 비롯해 다른 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많지 않을까. 미국산 쇠고기가 학교 급식에 들어가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쇠고기의 구입은 국민 각자의 판단에 맡겼으면 좋겠다. 오히려 정부가 할 일은 수입소가 한우로 둔갑하지 않도록 철저한 원산지 표시를 통한 신뢰의 확보에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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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전 청와대 홍보수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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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지식인들이 관념론적으로 개방에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의 세계에서 고민하고 대안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개방을 하고도 그 개방이 서민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도록 규제하는 정교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몇 해 전 백화점의 셔틀버스를 없앤 효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연구하는 국회의원이나 진보지식인은 보지 못했다.
대기업의 대형마트가 동네 슈퍼와 경쟁하지 못하도록 어떤 규제가 필요한지,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창의적인 해결책은 없는지, 과도한 영세자영업자를 줄여나갈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지. 프랜차이즈 업체의 횡포로부터 어떻게 가입자들을 보호할 것인지. 진보는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진보들도 신자유주의니 개방이니 하는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서민의 삶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승부하길 기대해본다.
이 글은 조기숙 교수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마법에 걸린 나라’에 게재된 글로 조 교수의 동의를 얻어 본보에 게재한 것입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데일리서프라이즈 & dailyseop.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