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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 70평생 고생하고도 끝은 원망 뿐이다


BY 여자일생 2007-09-24

지금 옆방에서 통곡소리가 들린다. 죽도록 해봐도 소용없다는 서글픈 사연과 함께.........

내 나이 23세 때, 아들 4형제 중 장남에게 중매반 연애반으로 그를 만나 아들 자식3명을 낳아 시집 장가 다보내고 손자' 손녀 6명을 두고 70평생 살아왔서도 아직도 고생 못면하고 박복하게 살고있는 나의 사연을 호소 해본다.

고종4촌 오라버니의 소개로 중매가 들어왔다. 4형제의 장남인데 아버지는 일본에서 살고 홀어머니 밑에 살면서 마을 청년회와 4H청소년을 지도하면서 마을봉사에 앞장서고 있는 24살의 청년이라 해서 비교적 똑똑하고 마음이 괜찮은 신랑감으로 느껴져 그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봉사활동에 불고가사한 신랑은 가정일이라고는 별로 관심없고 마을일에만 정신이 팔려있어 은근히 앞으로의 고생이 걱정되기도 했다. 결국 그해가 우리나라가 5,16군사혁명이 일어났었는데, 그만 신랑은 군사정부에 동원돼, 농어촌지도요원으로 활동하느라 한달이면 몇번씩 휴가오고 거이가 출장으로 집을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러자니 농사일이며 뗄감을 구하기 위해 여자의 몸으로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심지어 분뇨(똥장군)까지 밭거름으로 날려야만 했다. 장남과 차남을 얻고 그런 세월이 3-4년이 흘렀다. 이제나 저제나 하다 30고개를 넘겨, 신랑이 돌아왔다. 그러나 구국의 활동에 정신이 팔린 남편은 이미 국가공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느닷없이 신흥종교단체에 심취되어 또 다시 개척생활의 긴긴로정에 접어들었다. 그 개척의 길은 나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이 둘을 하나는 앞세우고 하나는 등에 업고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솥하나 숫갈 4개가 전부인 우리살림은 비만오면 물이 뚝뚝세는 적산가옥에서 6개월의 개척생활을 맞쳐었다.

개척생활에서 인정받게된 남편은 군청소재지로 돌아와 가난으로 중학진학 못하고 있는 청소년을 모집해 중등교육과정을 가르키는 재건중학교를 세우고 뜻있는 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교육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사단은 여기서 일어나었다. 함께 봉사하던 여선생과의 염문으로 인해 남편은 그 종교단체에서 제명당하여 패인이 되고 그 여선생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남편의 생활을 전해들은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 블럭공장을 해보라면서

공장을 차려줬었으나 여자로 인해 상처입은 남편은 이내 공장에 일하러 나온 유부녀와 또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멀리 부산까지 내려간 남편을 시아버지가 찾아내고 둘사이를 갈라 놓았으나 여성편력에 정신이 함몰된 남편에게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남편을 살려야 겠다는 나에게는 몸이 부서지고 허리가 꾸부러지는 어떠한 노동의 고통도 감내하며 남편의 정신이 회복되어지도록 지켜보며 살아야 했다. 장남이 장가들고 생활전선(금고)에 나아갈 때까지의 빈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둘째가 장가들어 좋은 직장을 들어가자 나의 빈곤은 그때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남편의 정신건강은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고, 중' 고등학교 반공강사, 및 민방위정신교육강사로 활동하면서 다시 사회참여의 기회를 얻자 노인대학을 설립해 봉사활동을 다시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신문지국을 맡아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가정생활에 보태면서 재기하기 된 것이다.

그렇게 거듭된 몇고비 고난을 거치면서 부모를 모시는 장남의 역활을 못하게 되자 막내 동생에게 부모의 상속인 약간의 재산(부동산)과 부모를 모시도록 설득시켜 재산을 넘겨줬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은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아버지의 제사라도 맡아야 겠다며 동생이 모시던 제사를 모셔와 지금껏 잘모셔 왔었다.

그러나 다시 큰 아들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와 하루 아침에 또 다시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

모증권회사 중견간부로 재직하던 큰아들에게 뜻하지 아니한 공금(2억원)도난의 사건이 터진 것이다. 큰아들의 소유 빌라가 경매에 넘어가고, 어렵게 마련했던 남편의 집도 모두를 비어줘도 공금손실의 보전을 다해 주지못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정부가 마련해준 영구임대아파트 13평에 살게된 남편은 아버지의 제사까지 모시지 못할 지경에 놓이게 되자, 막내 동생에게 제사를 다시 모셔가라고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편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모르는 막내 동생마져 모시지 못하겠다 하여, 결국 몇일 전 음력8월13일 기제사부터 궐사를 하고 내일 추석차례까지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시아버지 제사를 궐사한 책임이 집안 대소가로부터 나에게로 솔려 남편과의 냉전 상태로 대치 중에 놓여있다. 어찌 하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