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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자가 남자 성을 따르지 않는 이유...


BY 삐딱삐딱 2008-06-19

사실 그렇게 길게 쓸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한 마디로 모계가 강해서였다.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모계가 강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계란 여성 자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계란 곧 어머니의 일족, 따라서 여성이라기보다는 여성이 속한 남성을 중심으로 한 혈족집단이 더 정확할 것이다. 즉, 결혼한 여성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일족을 대표하여 다른 일족과 연결하는 이를테면 사절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 역사를 보면 어느 한 세력이 강해 다른 세력들을 억누르고 통합하여 하나의 집단을 이룬 예는 거의 없다. 신라만 해도 그 출발은 사로 6촌의 연합세력이었고, 가야는 망할 때까지 여러 가야의 연합세력으로 존재했었다. 고구려 역시 계루, 소노, 절노, 순노, 관노의 다섯 부의 연합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주몽에 이르러 계루부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었고 말이다. 백제야 망하는 그 순간까지 왕과 호족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견제하고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특히 주목할 것이 한국민족의 주류가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고려의 건국이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분명 송악의 호족 왕씨일족의 왕건이지만, 실제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건국하게 된 것은 궁예에 반대하여 결집한 주로 송악의 호족집단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호족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한 지방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기득권세력으로서, 말이야 신라 왕의 버려진 자식이라지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파계승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다 잘 보장해 줄 수 있는 그들과 이해를 같이 하는 왕건을 선택하여 그를 왕위로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왕건은 혼인을 통해서 이들 호족들과의 결속을 강화했었고. 말하자면 고려라고 하는 나라는 왕건과 왕건이 비로 맞이한 스물아홉 명의 여성들의 출신 호족들과의 결합에 의해 건국되었다 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강력한 정복군주에 의해 정복을 통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다. 왕은 단순히 호족의 대표자였고, 따라서 왕의 권위와 권한 가운데는 호족의 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여 나타내는 존재들이 바로 왕건의 비로 들어가 있던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왕건에게 있어서는 호족에 대한 인질인 동시에, 호족들에게 있어서는 고려라는 나라와 고려의 왕에 대한 자신들의 지분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이고. 그리고 왕건이 죽고 후계구도를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면서 이들은 왕실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한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이들 호족들이 각각 자신과 연고가 있는 왕자들을 후원함으로써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은 호족들의 대리전 양상을 띄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킨 것이 또 고려의 광종이었고. 그의 강력한 개혁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려의 왕권은 비로소 호족들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에서, 강력한 정복군주에 의해 정복되어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바치는 경우와는 달리 여성들은 그 자신을 통해 자신의 일족을 대표하는 역할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지만 그 전에 아버지의 딸이고, 오라비의 누이이며, 조카들의 고모이기도 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면 당연히 친정 식구들과의 일족으로서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친정의 성을 그대로 써야 할 필요가 있었고.

아마 이러한 예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 영조의 며느리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며 사도세자로 더 유명한 장헌세자의 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였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 장헌세자의 빈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선택한 것은 남편인 장헌세자가 아닌 친정의 홍씨 일문과 그들이 속한 노론 벽파였다. 그래서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으면 평생을 독수공방하며 뒷방 늙은이로 늙어갈 것을 알면서도 가문과 당파를 위해 장헌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다.

어디 혜경궁 홍씨 뿐일까? 요즘 드라마로 유명한 정순왕후 김씨라든가, 세도정치를 이끈 안동김문의 순원왕후 김씨나, 고종의 양어미가 되는 풍양조문의 조대비, 고종의 비이기도 한 명성왕후 민씨 등도 역시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나라의 국모라는 상징적인 위치보다는 그들이 나고 자란 가문과 그 가문이 속한 정파의 이익을 더 우선했던 이들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는 최초의 세도정치라 할 수 있는 윤원형의 전횡을 만들어낸 문정왕후 윤씨 역시 그 가문을 더 우선했던 이였고.

특히 서양에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라 쓰는 것은, 약탈혼의 영향이었다. 당시 여자는 어디까지나 남자의 소유물이었고, 여자에게는 그저 남자에게 복종하고 아이를 낳아주는 이상의 다른 것은 요구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한 여성을 통해 무언가 지분을 요구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고. 결혼을 통해 서로 혼맥으로 연결할 수는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가문과 가문, 그 가문의 일원과 일원 사이의 일이지, 감히 여자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에서 여자는 강자에게 주는 그냥 하나의 선물이었다. 당연히 굳이 여자가 친정의 성을 유지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은 달랐다. 일찌감치 정치 및 사회의 여러 제도와 문물들이 정비되어 약탈혼과 같은 야만적인 풍습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있었고, 안정된 만큼이나 오랜 세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행사해 온 토착세력들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바로 그러한 일족과 일족의 결합이었던 탓에, 결혼이라는 것이 유럽에서처럼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은 소유하거나 그런 관계이기는 힘들었다. 결혼을 통한 이익을 서로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여전히 대등한 존재로서 긴장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결혼하고도 여자로 하여금 친정의 성을 쓰게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결혼하고도 남편의 성이 아닌 친정의 성을 따르는 것은, 여전히 그 여자의 소속과 소유권은 친정에 있다고 하는 구속의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기는 중국과 일본도 비슷하기는 했다.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이, 중국에서 결혼한 여자를 부를 때 공식적인 호칭은 남편의 성을 따 그 뒤에 "부인"을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인의 성이 유씨라 해도, 마씨인 남편과 결혼했으면 그 호칭은 마부인이 되는 거다. 일본은 아예 여자에게는 성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기록을 보더라도 여자에게 성이 부여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집안의 성이 그것이니 호조 마사코니, 오다 이치니 해서 관습적으로 성을 붙여 부를 뿐 대개는 그 이름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 여자들이 성을 갖게 된 자체가 메이지유신 이후 유럽을 따른답시고 여자들에게 남편의 성을 따르도록 하면서부터이니, 바로 그러한 이유로 여자에게 따로 성이 부여되지 않은 것이 근대 이전에는 일본에서도 여자도 별성을 썼다고 하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긴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출가외인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조선 중기 이후 부계중심의 문벌이 부쩍 강해지면서 더 이상 모계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나온 말이었다. 흔히 외택을 한다고 하던가? 나 역시 그것 때문에 어려서 놀림을 받곤 했었는데, 어머니쪽 유전형질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렇게 조선후기로 가면 꽤나 기분좋지만은 않은 그런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계가 강해지는 만큼 모계에 대한 거부감도 커지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여자와 그 집안의 관게를 단절시키는 의미에서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문화권에서 여자가 남자의 성을 따르는 이유일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과정이 거꾸로, 여자가 먼저 친정의 성을 그대로 쓰고, 나중에 가서 부계중심의 문벌이 강화됨에 따라 이같은 상호모순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여자더러는 친정과 단절되라 하고, 성은 여전히 여자의 성을 쓰는.

제대로 정리되었는가 모르겠는데 - 지금 막 술 한 잔 걸치고 졸면서 쓰고 있는 중이라 - 어찌되었거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고도 자기 성 - 정확히는 친정의 성을 쓰는 것이 무슨 여성의 권리와 상관있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여자가 결혼하기 전 쓰던 성은 그 집안의 성이었고, 정확히는 그 집안 남자들의 성이었다. 그래서 역사를 보더라도 성은 있는데 이름은 없은 여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허난설헌이니, 신사임당이니 임윤지당이 하는 것도 모두 호지 이름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 개인의 이름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속한 집안이고 그 성이지 여성 개인의 이름이나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이름없이 성만이 있는 채로 각자 나름의 호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건 일본도 비슷해서 일본도 여자의 이름보다는 별도의 호칭으로 불르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비슷비슷한 동네라. 

다시 말해 여자가 자기 성을 그대로 쓰는 것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지위가 높거나 존중해서 그리 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어차피 여자의 성이라는 것도 자기 아버지의 성이지 어머니의 성이 아니다. 그 성을 쓰는 것은 역시 부계집단이지 모계집단도 아니고. 단지 그 여성이 속한 출신집단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의미에서, 그 집단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결혼한 여자에게도 계속해서 그 아버지의 성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그 출신집안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나의 경우 어려서 외가는 물론 외가의 외가까지 촌수조차 계산이 안 되는 먼 친척들 집을 오가며 지냈던 터라, 특별히 친가며 외가며 하는 구분이 없다. 당장 할아버지가 8대독자시라 가까운 친가쪽 친척도 얼마 없기도 하고. 그래서 그러거나 말거나다. 어머니 성을 쓰든, 아버지 성을 쓰든. 지금 와서 그것이 무에 중요할까? 어차피 성이라는 게 그 조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냥 이런 것도 있다는 거다.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