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으로 신사복을 입은 건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입니다.
당시 호텔업을 시작하신 숙부님의 부름을 받고 지배인으로 근무하게 된 때문이었지요.
“호텔리어(hotelie)는 늘 복장부터 깔끔하고 근사해야 하는 법이다!”
숙부님께서 사 주신 신사복은 당시로선 꽤나 고가였습니다.
그렇게 신사복으로 정장을 하고 화사한 넥타이까지를
매고 휴일에 집에 가면 친구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와~ 이건 뭐 영화배우가 따로 없네!”
그같은 환호성은 이팔청춘의 동네 처자(處子)들
또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초로까지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멋들어진 신사복 정장을 입고 걸을라치면
뭇 여성들이 도둑처럼 살금살금 제 뒤를 밟기도 다반사였지요.
호텔의 근무는 그러나 약 3년 뒤에 마감을 해야 했습니다.
이어 군대를 다녀와서는 지금껏 비정규직으로만 일하고 있지요.
하여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당시의 화려했던
저의 젊은 날은 하지만 고작 일장춘몽(一場春夢)의
매우 짧았던 시절이라는 감흥이 출렁입니다.
여하튼 이런 연유로 말미암아 딱히 신사복을 입을 경우는 없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음 주면 선친의 산소를 이장(移葬)해야 합니다.
작고하신지가 25년이나 지난 터여서 화장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역민들의 이른바 ‘님비현상’으로 인해
인구 100만 명 시대를 바라보는 제 고향인 천안에는 지금도 화장장이 없다는 군요.
그래서 홍성까지 가야 한다는데 우리 지역에
화장장이 들어오는 건 결사코 반대하는 이러한
님비현상은 시급히 개선되고 볼 일이란 교훈이 새로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고 아울러 화장(火葬)은 이제 대세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산소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장님과 그제도 이 문제로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 분 말씀이 이장을 하는 날의 의복으론 망자에 대한
정중한 예의로써 검은 양복의 정장에 넥타이도 검은 색으로 착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이라고 어제 아들이 집에 왔습니다.
아들에게 이장 문제와 함께 의복 장만 심중을
얘기했더니 아들은 당장에 백화점에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다. 내가 돈 벌어서 사마.”
그러나 쇠고집의 아들을 이길 순 없었지요.
아들 덕분에 십 년여 만에 검은색 신사복 정장을 한 벌 샀습니다.
“고마워서 어쩐다니?!”
“어버이날 선물입니다.”
오래도록 제 마음을 짓눌렀던 게 바로 선친의 산소 이장문제였습니다.
이장을 잘 하면서 선친께는 다시금 감사함을 피력하렵니다.
“아버님 덕분에 효자 아들 둬서 고맙습니다!!”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