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말을 떠올려봅니다. 그날은 평일이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아내와 함께 인근의 사찰을 찾았습니다. 이는 그날 사랑하는 딸이 서울대 대학원 진학시험의 과정인 중차대한 면접을 치르는 때문이었지요. 불당에 들어서서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발원했습니다. 공손하고 정중하게 108배를 올리면서 딸이 이번에도 반드시 합격하여 딸은 물론이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도 웃음꽃이 활짝 펴게 해 주십사고 빌었지요. 한데 아내는 늘 고삭부리 아낙인지라 저처럼 108배는 그날도 언감생심이었습니다. 평소 부실한 다리를 많이 저는 터여서 고작 3배씩만의 간소한 절을 하였지요. 그렇지만 아내의 발원은 저의 바람과는 또 다른 간절함으로 가득했음은 물론이자 구태여 사족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사찰을 나와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출근하였는데 오후에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면접을 잘 끝내고 엄마께 전화를 드렸더니 아침에 아빠도 함께 절에 가셔서 저의 합격을 지성으로 비셨다면서요?” 그러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그야 아빠로선 당연한 것 아니겠니?”라며 껄껄대며 화답하였지요. 딸은 맨 처음으로 면접을 보았는데 비록 10대 1의 경쟁률이긴 하였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며 자신만만해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제 제 맘도 이내 안도의 양지로 이동을 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었지요. 시험 결과가 나오는 대로 집에 왔다 가겠다는 딸과의 통화를 마치니 수년 전 그맘때의 감격이 뇌리의 창고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당시 딸은 대전 동신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지요. 마치 쾌속질주와도 같이 딸은 언제나 전교 1등의 성적을 견지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수시모집으로 서울대와 또 다른 대학에도 중복합격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어 대입수능까지 잘 치른 딸이 최종적으로 고민을 하게 된 건 서울대와 모 의대의 합격통지서 두 장을 놓고 과연 어느 대학으로 갈 것이냐는 것이었지요. 결국 딸은 서울대를 선택했고 이듬해인 2005년부터 4년 줄곧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녔습니다. 1년의 휴학기를 빼고 작년 2월에 졸업한 딸은 과 수석의 영예까지 안는 기염을 토했지요! 상경해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여 딸이 그처럼 영광의 축하를 받는 모습을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감사함의 눈물이 자꾸만 뺨을 적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울러 이는 곧 ‘개천에서 용이 난’ 격에 다름 아니었다는 감격과도 부합되어 그 눈물은 더욱 뜨겁게, 그리고 하염없이 뚝뚝 떨어졌던 것입니다. 지금도 수십 년 째 저의 생업은 각박하고 힘들며 마치 험산준령과도 같은 고단한 길을 점철하고 있는 비정규직이란 음습한 ‘변방’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딸에겐 물론이요 바로 위인 아들에게도 아이들이 초,중등학교에 다닐 적에도 변변한 사교육은 도무지 시켜줄 여력이 되지 못 했습니다. 저는 그렇지만 ‘교육이 미래다!’라는 사실만큼은 예전부터 마치 신앙처럼 지니고 있었지요. 그래서 좌고우면 끝에 선택한 것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말과 휴일이면 의도적으로 도서관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시립과 구립, 그리고 교육청 산하의 모든 도서관은 단 한 푼도 안 받으면서도 책을 맘껏 보고 빌릴 수까지 있었기 때문이죠. 아울러 사랑과 칭찬이라는 비료는 아끼지 않고 마구 뿌렸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독서교육과 어떤 가정교육의 결과는 아이들의 학업성적을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신장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딸보다 4년 연상인 아들은 대학 재학 중에 군복무를 마쳤고 가정형편의 궁핍으로 말미암아 휴학까지 하느라 작년 2월에야 비로소 학사모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또한 충남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지요. 이에 병행하여 나름 각 분야를 망라한 인턴사원의 경험과 각종 자격증의 취득, 그리고 영어공부에도 지성을 다 한 덕분으로 작년 초엔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적으로 굴지인 S 자에 합격하는 쾌거를 일궈냈습니다. 하루 건너 전화로 안부를 물어올 만치로 효녀인 딸에 필적하는 아들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반드시(!) 집에 옵니다. 그리곤 아내의 건강에 좋은 건강식품은 물론이요 용돈까지 두둑이 주고 가는, 정말이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명실상부한 효자랍니다. 올부터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1학년이 된 딸은 현재도 서울 신림동의 허름한 셋방에서, 아들은 경기도 기흥의 회사 기숙사에서 각각 미래에 틔울 꿈을 더욱 크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물질적 현실은 여전히 비루하지만 어디 내 놓아도 자랑만 하고픈 제 두 아이는 진정 저를 만석꾼 이상의 부자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집 행복의 화수분입니다. 딸은 어제도 전화를 하여 최근 더 악화되고 있는 아내의 걱정을 입에 달았지요. “엄마는 좀 어떠세요?” “응, 할머니(장모님)가 편찮으셔서 외갓집에 가셨단다. 아무튼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잘 하거라.” 딸은 여름방학이 되면 집에 오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에 다닐 적에도 돈이 든다며 집엔 잘 오지 않은 딸이지요. 그래서 1년에 고작 네댓 번이나 왔다 갔을까요... 어쨌든 가뭄에 콩 나듯 집에 오는 딸은 고교 시절 동창생들을 주로 만나는 기색이더군요. 아울러 고 3때의 은사였던 박명화 선생님과도 자주 통화를 나누는 눈치입니다. 그러노라면 딸이 고교 재학 중에 그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그 커다란 바다와도 같은 감사함이 뜨거운 고마움의 쓰나미로 다가오는 걸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딸이 고 3으로 진학할 무렵부터 저의 경제적 허방(땅바닥이 움푹 패어 빠지기 쉬운 구덩이)은 더욱 깊고 견고한 질곡의 수렁으로 빠져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빚을 내 근근하게 꾸려왔던 가게가 불황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그렇게 많은 부채를 야기(惹起)시켰던 것이었지요. 승용차까지 팔아 어찌어찌 빚을 갚곤 장마철에 장화가 없으면 못 사는 달동네의 누옥(漏屋) 월세로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도 살고 있는 이곳은 1년에 반인 6개월은 거실에 연탄난로를 설치해야 할 만큼 겨울엔 춥고 여름엔 뜨겁기가 마치 시베리아 벌판의 삭풍과 사우나의 뜨거운 열기를 방불케 합니다. 여하튼 이런 험악한 곳의 음습한 골방에서 딸은 강철처럼 굳센 자강불식(自强不息)으로 그렇게 공부를 하였지요. 아울러 이같은 딸의 ‘열공’에 더욱 힘을 보태주신 분은 다름 아닌 당시 3학년 8반의 담임을 맡으셨던 박명화 선생님이셨습니다. 박 선생님께선 가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딸에게 인터넷 교육방송의 수강까지 가능한 자재 일체의 제공에서부터 학내장학금의 수여, 이에 더하여 심지어는 급식비까지를 지원하는 실로 파격적인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답례라도 하듯 딸은 풍랑을 탓하지 않는 어부의 정신으로 그렇게 시종일관 전교 1등의 성적을 놓지 않는 악바리의 면모를 또한 보였고요. 불운하고 박복하기까지 하여 조실부모하고 초등학교마저 겨우 마친 명실상부의 무지렁이가 바로 저라는 위인의 이력입니다. 기본급조차 없이 오로지 제가 판매한 만큼의 일정수당만이 유일한 수입원인 비정규직의 출판물 세일즈맨으로 살자니 늘 그렇게 헉헉대며 마치 험산준령으로만 이뤄진 차마고도를 점철하는 모양새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정말이지 딸에게도 변변한 사교육조차 지원해 주지 못 했다는 건 지금도 여전히 무거운 압박감의 미안함으로 남는 저의 어떤 아픔이죠. 하여간 박 선생님과 동신고 선생님 전체의 성원으로 말미암아 지난 2004년 겨울에 딸은 대망의 서울대 합격증을 받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딸이 서울대에 들어가고 난 뒤인 2008년부터 저는 비로소 만학의 공부에 치중하였지요. 3년 과정의 사이버 대학에 들어가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아들과 딸의 반려자인 며느리와 사위를 저도 볼 터인데 시아버지와 장인의 학력이 ‘고작’ 초졸 학력이라고 한다면 괜스레 자신의 남편(아내)마저 무시할까 싶어 내린 저 나름대로의 어떤 자위권(自衛權) 발동이란 가치관이 생성된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여하튼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마침내 작년 말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에 이르렀지요. 이는 또한 아이들로부터도 “역시 울 아빠는 대단하세요!”라는 칭찬을 듣게 하는 고무적 행동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얼굴조차 기억에 없고 심지어는 하늘과 도화지에마저 그릴 수 없는 어머니로 말미암아 참 어렵고 힘든 지난날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같은 풍상은 어떤 긍정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작용하여 아이들에겐 다른 부모의 몇 배 이상이나 되는 사랑과 칭찬의 비료 자원으로 도출되기에 이르렀지요. 취업한지 불과 1년도 안 되어 대학 재학 시절에 받았던 학자금 대출을 모두 변제한 장한 아들입니다. 제 경제적 상황이 여전히 엄동설한인지라 올해 대학원에 진학한 딸 역 등록금은 대출을 받았지요. 그렇지만 내년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졸업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나면 ‘그깟’ 대출금이야 아들처럼 금세 갚으리라 믿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이실직고하건대 저는 그동안 솔직히 유일한 동창회인 초등학교 동창회마저 일부터 불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닙니다. 맘을 바꿔 재작년부터 열심히 참석하고 있는데 이는 아이들이 자랑스런 때문이죠!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스스로 생의 끈을 놓고자 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힘이 되고 용기까지 북돋아 주었던 대상이 바로 아들과 딸입니다. 더욱이 딸은 제게 ‘서울대 나온 딸을 둔 아빠’라는 또 다른 ‘명함’까지를 선사한,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지옥엽의 정점입니다. 딸은 또한 저의 집의 행복 화수분입니다. 이 감사하고 소중한 저의 행복 화수분을 만들어 주신 박명화 선생님, 그리고 대전 동신고교 선생님 모두께 무거운 고마움을 전합니다! 더 올바르게 잘 자라게 하여 반드시 이 사회에 소금과 촛불이 되는 그런 동량으로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