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보고,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본다.
--윈스턴 처칠--
신은 인간에게 아주 공평한 기회와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만일 신이 있다면...
바로 시간이라는 고귀한 ,황금보다 더 귀중한 것을 골고루 나눠주고 있다는 것인데...
그 시간을 어찌 활용하는가에 따라 행복을 일구게도 되고,하릴없이 따분하게 허비하게도 되지 않던가?
숨이 막히도록 치밀하게 활용하며 기회를 창출해내는 사람도 있고,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경우가 바람직하다거나 최선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성취를 위해서 분초경영을 하라고 가르치는 성공인도 있고,모든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몸이 원하는대로 순응하며 여유를 만끽하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시기에 따라,주변 환경에 따라 이래도 보고 저래도 봤으나 50여 년을 살아온 지금도 모르겠다.
공부를 해야 할 때 공부를 하지 않고 당시 유행하던 삼중당 문고판 책 한 권을 넣은 빈 가방을 들고 다녔던 적도 있었고,
그러면서 불안한 여유를 만끽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꼭 틀린 것이라고만 생각지도 않으니...
사업과 가사로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코피터지게 매진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적도 있었지만,
얼마간의 성과를 거두는 동안 어마어마한 잃음도 경험하게 됐고,
그런 득과 실의 과정에서 쑥 빠져나와서 일찌감치 인생을 관조하는 자리에 머물고 싶어하게도 됐으니...
저마다의 색과 형태를 지닌 퍼즐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고 앞으로도 그 일은 계속돼가며 나만의 그림 하나가 그려지겠지...
그런 과정들을 겪어온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윈스턴 처칠의 저 말은 참 멋있게 들어맞아 왔다.
이제 마악 접한 말임에도 그렇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진리란 것이 아닐까?
내 안에도 비관주의자가 들어있고 낙관주의자도 들어있지만,난 그 동안 그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지내왔고,
불행하다 느낄 때는 비관주의자쪽으로 기울어 있었고,행복을 조금이라도 느낄 때는 낙관주의자에 기울어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행하게 살고 싶진 않을테니,그렇다면 낙관주의자로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
그것 역시 꼭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는 것이,근거없는 낙관주의만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방만한 인생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까짓 인생 뭐 있겠어?"라며 별 노력도 하지 않으며 방만한 인생을 살며 주변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조금은 비관적인 생각도 가져봐야지 않을까?
그래야 그 비관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경주하며 살게 될테니 말이다.
지구의 미래를 낙관만 하면서 별 고민없이 누리기만 하고 산다면 지구의 앞날이 어찌될 것인가?
얼마간의 비관적 입장도 견지를 하며 기회만 빼먹지 말고 보호에의 고민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평생 누리기만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움이 지속되지도 않을 것이고,육체도 퇴화해갈 것이니...
내가 비관적인 관점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어하는 이유이다.
최근 어떤 강연에서 스치듯 들었던 경계인이라야 행복할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살아온 덕분에 이만치라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주로 비판의 논거로 제기되던 경계인을 바람직한 경우로 주장한 것인데...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비관과 낙관의 경우에도 이런 경계인의 입장견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거기서 좀 행복해지고 싶으면 비관보단 낙관을 조금 더 중시하며 누구에게나 닥치는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간다면
누구나 방만하지 않으면서도 얼마간의 보람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미개인의 개똥철학이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