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왼쪽팔에는 약 10cm정도의 긴 흉터가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 있는 흉터라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지난날 여름이면 지하철등을 탈때 가방으로 가리곤 했을 정도로 크고 보기싫은 흉터입니다.이 흉터를 얻은 것이 벌써 9년전 여름이군요. 때는 2003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되는것이 꿈이었던 저는 교직이수학점을 채우기 위해 대학생활 처음으로 계절학기 수업을 신청하여 들었습니다. 여름방학동안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지라 등하교길의 뜨거운 태양과 사람이 별로없는 학교에서의 수업은 사실 별로 달갑지만은 않았죠.
그렇게 한달여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강의종료 이틀을 남기고 예비군훈련으로 한 강의를 빠지게 되었습니다. 종료전 강의는 바로 기말시험에 중요한 강의들로 다음날 강의를 듣는사람중에 한명에게 노트를 빌려야 했죠. 저는 수업내내 매일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 한 여학생에게 노트를 빌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긴생머리에 단정한 자세로 항상 맨앞자리를 차지했던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단 믿음직스러웠고 그리고 조금은 호기심도 있었었죠.
"저기.. 부탁이 있는데요. 어제 강의를 못들어서 그러는데 노트를 좀 빌릴수 있을까요?"
"네.. 여기 있어요. "
흔쾌히 허락한 그녀의 노트를 받아들고 친구들과 복사를 한뒤 그녀에게 노트를 건네주며 다음에 밥이라도 사겠다고 말했더니 의외로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 그럼.. 다음에 친구분들하고 저희 친구들하고 미팅한번 주선해 주시겠어요?"
사실 그녀는 저희 학교학생이 아닌데 계절학기를 맞아서 다른학교에서 수업을 해보고 싶어 저희학교에 강의를 신청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자기학교의 친구들이 미팅건수가 없냐고 아우성을 치던차에 저에게 그런 부탁을 한것이었죠. 저도 그자리에서 확답을 주었고 날짜를 정한뒤 헤어졌습니다.
그러던중 사건이 발생하였어요. 친구들과 농구시합을 하던중 공중에서 넘어졌는데 팔을 잘못 짚어서 오른쪽 팔이 크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미팅전날 하필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바로 수술을 받았었죠. 전신마취에서 깨어난뒤 저는 갑자기 그일이 생각나서 그녀에게 연락하였습니다.
"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좀 다쳐서 병원에 있어요.. 미팅은 다른사람에게 부탁해서 꼭 하게 해드릴테니 걱정마세요"
그렇게 말을 건네자 그녀는 미팅은 상관없으니 당장 병문안을 가겠다고 하더군요. 친구들의 병문안도 거절한 터라 저는 계속 오지말라고 했지만 너무 완강한 그녀의 말에 결국은 병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고 다음날
"저기.. 괜찮으세요?"
라며 그녀가 문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더군요. 하필 그날 부모님도 다 병실에 계셨는데 그녀가 제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는지 그날 저녁 저는 외출까지 끊어서 그녀와 저희가족은 얼떨결에 외식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왔었고 어차피 무료한 병원생활이었기에 저도 내심 기분은 좋았습니다. 그렇게 퇴원을 하게 되었고 저는 퇴원하는날 그녀를 데리고 근사한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저기.. 이제 우리 사귀면 어떨까?"
"음.. 그래 나도 좋아."
사실 미팅이 끝나고 저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려고 했었고 그때 조금 모아둔 돈이 있었는데 병원에 있는 지라 고스란히 있던 그돈을 가지고 커플링을 사서 그녀에게 고백을 하였고 그렇게 연애가 시작되었어요.
그뒤로 1년을 우리는 정말 꿈처럼 보냈습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다해봤던 것 같아요. 1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붙어다니며 조그만 소극장에 가서 연극을 즐기고 날이 맑은 날은 산으로 들로 비가 오는 날도 나란히 우산 하나로 걸으며 우리는 정말 행복했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와이프는 이미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지역이 전라도에서 시험을 친 관계로 멀리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시한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덜컥 전라도끝 진도로 발령을 받았답니다. 부산에서 지내던 우리에게 전라도 진도는 저희에게는 흡사 외국과도 같은 거리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부산에서 진도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세대인가가 있었는데 낮에 타고 가면 어둑어둑해져야지만 도착을 했을 정도였죠.
처음 발령받고 첫날 저는 그녀와 함께 전라도 진도까지 동행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이별을 예감할수 없었죠. 6시간을 넘게 걸려 도착하니 벌써 해가 지고 있더군요.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발령지인 석교초등학교로 가서 인사를 하고 다시 우리는 부산에 돌아오려 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오늘 오셨으니 저녁에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와이프 혼자 남으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어쩔수 없이 홀로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때 차창밖에서 울며 저를 보내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 너무 울지마라. 주말에 부산에서 보면되지. 잘지내고 오면 연락하자”
“...”
저는 오면서 다짐을 하였습니다. 얼른 취직을 해서 그녀와 빨리 다시 만나기로요. 그뒤로 주중에는 거의 학교에 처박혀 살았습니다. 워낙 취업난이 심하던 때라 남들보다 좋은 스펙을 쌓기위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죠. 당시 저의 별명은 중앙도서관 노숙자였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자기 일쑤였거든요. 그녀가 금요일에 학교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나오면 부산에 토요일 세벽에 도착을 했죠. 그러면 우리는 토요일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요일아침에 그녀를 마중하는 것이 우리의 주말일상이 되었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드디어 저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편리하게 사용하는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죠. 정말 하늘은 노력은 외면하지 않구나 생각을 했어요. 지난 1년간의 고생이 저에게 보상으로 다가와서 일까요. 저와 그녀는 전화기 사이로 서로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 주진아 내 됐데이 이제 우리 조금만 참자”
“응.. 그래 수고했어 ”
이제 당당히 취업도 했으니 그녀의 집에 인사도 가고 모든일이 잘 풀릴줄 알았는데 저의 첫발령지는 충청남도 당진에 있는 당진화력발전소였습니다. 제 머리털나고 당진은커녕 충청도도 한번 가보지 못했던 촌놈인 저로써는 정말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꼭 다시 만난 날까지 열심히 하리라 다짐했어요.
충남은 사실 넓기도 넓고 차편도 대도시처럼 잘 되어 있지 못했죠. 한번은 당진에서 금요일에 퇴근후 진도를 가려고 했습니다. 우선 회사를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2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가면 대전버스터미널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또 광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광주에서 진도로 가는 버스가 저녁 8시에 끊기는데 버스가 광주에 8시 15분에 도착예정인 거였어요. 이러면 하룻밤을 광주에서 보내야 했기에 저는 아저씨에게 휴게소를 쉬지말고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아저씨 저 꼭 오늘 진도가야해요. 휴게소 쉬지 말고 가면 안될까요?”
“허허 이사람아 다른 승객들은 생각 안하나? 나도 밥도 먹어야 되고...”
저는 막무가내로 부탁을 드렸고 사정을 다들은 아저씨는 정말 힘들게 연애한다며 다른 승객들의 동의를 얻어 바로 광주로 갔답니다. 사실 승객중에 화장실에 들리려 하신분도 계셨는데 정말 그때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아저씨께 미안해서 저녁식사값도 드렸어요. 그렇게 광주에 도착했는데 터미널까지 시내로 진입하는데 어찌나 차가 막히던지요. 도착하니 시간이 정확히 7시 56분정도 되었어요. 저는 내리자 마자 차표를 끊었고 제 동기는 뛰어가서 출발하려는 진도행 버스를 잡아세워 겨우 진도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연애한 우리는 조금 거리를 좁힐수 있었어요. 그녀는 진도에서 광양에 있는 외갓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고 저또한 회사의 배려로 울산으로 직장을 옮길수 있었답니다. 그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 누구 못지 않은 장거리 연애를 하였죠.
그 긴시간동안 대부분 주말은 부산에서 보냈는데 그녀는 전까지 진도에서 6시간을 넘게 걸려 버스를 타고 왔고 저는 당진에서 버스로 천안아산역으로 가서 KTX를 타고 오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만날 수 있었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나요? 그건 그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라고 정말 자신하며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더 그 거리를 좁힐수 있었어요. 그녀는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맞트레이드로 넘어와 하동으로 왔고 또 1년을 넘게 일하다 지금은 울산의 이웃도시인 양산으로 왔답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일로 위기도 있었죠. 둘다 직장에서 결혼적령기이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소개팅이며 미팅이며 제안이 많았고 회사일외엔 당진에서 딱히 할일이 없던 저는 혹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전혀 나가본 적은 없었어요. 와이프도 마찬가지였죠 진도에 있을때 교장선생님은 아들까지 소개시켜 준다고 했더군요. 그리고 웃기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와이프가 광양에서 근무할 무렵 한번은 실수로 넘어져 갈비뼈에 금이가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주말에 찾아갔었을 때였습니다. 병실을 몰라 간호사 한분께 이름을 말하며 병실을 물었더니..
" 아 보니 오빠되시나 보네요. 얼마전에 남자친구도 면회온것 같았는데.. "
" 네! 아.. 네에.. 그런가요 하하"
저는 상황을 바로 알수 있었어요. 광양에 와서 얼마되지 않아 인근 학교에 근무하는 직원들끼리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부터 친하게 지내자며 연락이 오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야. 너 남친 왔다며.."
"어! 누가 그래!!"
얼굴을 붉히더군요. 그때 아마 제가 그생각을 했나봐요. 이 친구 다른 멋진분이 채어가기 전에 얼른 평생 내사람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걸요.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하하.. 그녀와 저는 지금 한이불을 덮고 살고 있습니다. 그녀와 저를 반반씩 닮은 아들 지윤이 녀석과 함께요. 그리고 아직도 한쪽벽에는 퇴원후 오른팔을 깁스한채 같이 다정히 웃으며 해운대에서 찍은 사진도 걸려있구요. 지난날 어렸을때는 오른팔의 상처가 부끄러워서 감추고 다닌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당당히 드러내고 다닙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부부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준 상처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 부부 대단한것 같습니다. 얼굴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1년을 연애하고 그렇게 5년을 떨어져 지내면서도 결국은 결혼해서 이렇게 잘 사니까요. 그런걸 보면 정말 인연은 있나봅니다. 혹시 지금 주위에 자신의 짝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실망하시지 말고 더 세밀히 찾아보세요. 누구나 인연은 있으니까요~
“ 우리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단했지? ”
“ 우리 같은 커플이 대한민국에 또 있겠어? ”
우리 부부 아직도 우리의 연애담을 남들에게 자랑하며 오늘도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