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 속에는 무엇인가 창조의 씨앗이 숨어있다.
--이 어령--
이 어령(1934~ ) 대한민국 .교육자.소설가.작가.정치가.문학평론가.
경기고에서의 교직을 시작으로 단국대 전임강사와 ,서울신문,중앙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하였고,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우리 문학의 불모지적 상황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데올로기와 독재 체제의 금제에 맞서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했다.
'작품의 실존성'을 문제로 김 동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조 연현과 '전통논쟁'도 펼쳤다.
특히 한 신문을 통해 전개된 소설가 김 동리와 비평가 이 어령 사이의 시비는 우리 문단사에서 은유와 非文에 관한 험악한 논쟁으로 기록된다.
그의 숙부인 이 병도는 교육자이며 식민사학자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위키백과)
창조의 고통은 그 깊이가 깊을수록 위대한 성과로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문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보고 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에서 유를 ,少에서 多를 이뤄가는 인생 역시 창조의 고통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가면서 행복을 추구해온 인간적 성공스토리는 오랜 울림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게 된다.
물론 남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잔 말은 아니다.
그런,남을 전제한 삶이야말로 가장 가장 심각한 현대병의 원인이랄 수 있으니...
신체적,물질적,환경적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 승리를 이뤄낸 사람들의 성공스토리를 보면 하나같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그것을 계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결과 귀감이 될만한 성공을 이뤄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원인과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삶의 태도를 지양하고,
과정에 주목해 버릇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소리높여 외쳐대기 위해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그들의 의도를 알아야 할 것이다.
有에서 有를,多에서 多多를 이뤄내는 걸 성공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데,그것은 창조가 아닌 단순한 관리 차원의 문제이기에 ,
위의 경우보단 한 수 아래의 인간 스토리라 할 수 있는데,그마저도 희귀하기만 하니...참으로 안타깝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존재란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위화감 조성에 몰두하는 그들,
잘못된 가치관 확산에 치중함으로써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만 혈안이 돼 있는 그들은 오히려 사회악이라고까지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다.미개인은...
창조의 고통이 아니라 ,저절로 환경이 이뤄준 것을 자신의 공인 양 내세우며 거들먹 거리는 모습은 솔직히 역겹기까지 하다.
수 개월째 식물인간으로 병상에서 연명을 하는 수준의 처지에 처한 국내 최대 기업의 2세 경영인을 모범적 사례라고 꼽을 수 있겠는데,
그의 말로를 보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지만,친일 매국노의 피까지 공급받은 그들로선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별로 기대도 하진 않는다.
인간 자체를 원죄인이라 말하거나 인생을 사바라고 표현하는 종교적 입장을 보건데,고통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지 않는 인생이야말로 이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려올 산을 무엇하러 그리 힘들여 오르느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죽고 말 것을 그리 고통스럽게 살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런 말을 하는 그는 과연 희희낙락만 하면서 행복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오히려 자포자기적인 인생관을 가진 자기를 합리화시키려 늘어놓는 궤변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저 명언은 인간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고,그 안에 숨어있는 창조의 씨앗을 찾아내 꽃을 피우라며 ,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고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인간승리를 이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 하나같이 장애가 있어서,가난해서 성공할 수 있었노라는 말들을 한다.
'窮卽通'이란 말이 있다.궁하면 통한다는 말일 것이다.
고통스러워서 창조의 대업을 이룰 자격을 갖는 것이라며 ,그만 징징대고 당장 창조의 대업에 착수하라는 어떤 절대자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물론 산넘어 산인 것이 인생이다.
하나의 고통을 극복하고 나면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99퍼센트라고 할 수 있는데,쉬지 않고,멈추지 않고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동서고금의 선현들이...
다른 말과 다른 표현으로 쉼없이 가르쳐오고 있다.
위의 저 말도 그런 표현의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프다고,힘들다고 멈추거나 그만두면 더 아파지고 더 힘들어지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단 한 순간도 공짜로 먹으려는 생각을 갖고 살면 안 된다고 ,재촉해대고 있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보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짚어본다면 삶의 정체가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을까?
진정한 예술가들이, 창조의 고통을 극복하며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최선의 매진을 거듭한 끝에야 위대하달 만한 작품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만 쉬어도 될 법한데,그들은 또 다시 창조의 고통에 스스로 걸어들어가 보다 업그레이드 된 작품을 이루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훌륭한지도 모르고 죽어버리고 만다.
후세에 이르러서야 그 가치가 드러나고 ,칭송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런 예술품이야말로 진정한 창조물이라고 평가되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 위대한 예술혼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고통스러운 과정 자체를 즐긴 것이고, 그들은 진정 행복한 삶을 산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든 삶 하나하나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우린 그러지 않으면서 행복해지기만 바라는 공짜심리의 대가들인 것이다.
만족스럽지 않고,행복하지 않은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증거이니 더 열심히 매진하면 된다.
그런데 8부 능선,9부 능선에서 주저 앉아 버리고,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세상을 원망하고 운명을 탓하곤 한다.
열심히 살고 있는,그러나 아직 한 번도 성공했다는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는 당신은 지금 9부 능선쯤에 와 있는 것이라고 한 작가가 말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마지막으로 젖먹던 힘까지 총동원해서 조금만 더 해보자.
숲 안에 들어가선 숲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끔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말일 것이다.
명상을 하라며,두렵고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현대인들에게 강조를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굳이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의 삶 속에서 명상을 할 수 있다.
안성에 둥지를 틀고 있는 세계적 무용가 홍 신자는 자신이 해 본 명상 중 최고의 것은 흙을 만지고 일을 하며 하는 명상이라고 말한다.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에 나서서 청소를 하면서도 명상을 할 수 있고,자원봉사를 하며 명상을 할 수도 있다.
더러운 하천을 치우면서 명상을 할 수도 있고,버려진 유기견 등을 돌보면서 명상을 할 수도 있다.
삶 자체가 명상의 도구이니 수십억의 삶의 방식이 있듯,명상의 방법도 수십억 가지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단 하나,꼭 필요한 것은 혼자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싶은데...
당장 나만의 명상법을 개발하여 매일,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명상을 하며 살아가노라면 우리 모두는 위대한 창조자의 반열에 올라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친일 매국노의 앞잡이인 식민사학자를 7촌 숙부로 둔 이 어령의 말이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가르쳐온 그이기에, 늘 심심한 존경을 해 온 그이기에,깊은 공감을 하고 ,그의 말을 붙들고 한참을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