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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


BY 미개인 2016-06-07

모자란다의 여백,그 여백이 오히려 기쁨의 샘이 된다.

                 --파스칼--

 

파스칼(1623~1662) 프랑스.수학자.물리학자.종교철학자.작가.

근대 확률이론을 창시했고,압력에 관한 원리인 '파스칼 원리'를 체계화했으며,

신의 존재는 이성이 아니라 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적 독단론을 설파했다.

직관론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은 장 자크 루소와 앙리 베르그송,여러 실존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존경받는 수학자였던 아버지 에티엔은 아내가 죽고 파리로 옮겨온 후 ,자식교육에만 전념했다.

두 살 아래인 누이 자클린이 문단에서 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파스칼은 수학분야에서 그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열일골 살이던 1640년 '원뿔곡선론'을 써서,

프랑스의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 같은 사람조차 시샘을 할 정도로 수학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루앙 시 행정관으로 임명된 아버지의 세금 계산을 도우려 계산기를 착안하여 발명했는데,이는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였기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 파리와 클레르몽페랑이 내려다 보이는 산꼭대기에서 기압을 측정하여 대기압에 관한 실험을 검증하고 확대시켰다.

이 결과는 유체동역학.정역학에서 보다 진전된 연구가 이뤄지는 데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또한 실험 과정에서 주사기를 발명했으며,

밀폐된 유체에 주어진 압력은 그 압력이 주어진 범위에 관계없이 모든 방향에 같게 전달된다는 파스칼의 원리를 바탕으로 유압프레스를 고안했고,

1647~1648년 진공문제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더욱 명성을 얻었다.

과로로 병이 난 후에도 의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더욱 연구에 몰두하여,액체평형에 관해서,공기의 무게와 밀도에 관해서 ,

또 확률 계산의 토대를 마련한 산술 삼각형에 관해서 논문을 쓰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종교적 가책을 느끼게 되고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비록 은둔자가 되진 못했지만,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글을 끄면서 여생을 보냈고,

저서를 발표할 때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와 '명상록'은 그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유창한 시사평론가로,영감을 받은 예술가로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풍부한 재능 탓에 혼란된 삶을 살았다.

그가 미분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의 지나치게 경직된 정신적 기질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브리태니커)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유창한 시사평론가로,영감을 받은 예술가로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에 주목하고 싶다.

모든 기초과학의 기본인 수학에서 천재적 기질을 발휘함으로써,물리학에서도 천재적 기질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감에서 밀려드는 만능의 부담이 그로 하여금 혼란된 채 살게 만들지 않았을까?

서른아홉 살의 짧고 굵은 그의 생은 뭐랄까,미처 삶의 단편도 제대로 누려 보지 못하고 스러진 아쉬운 것이 아닐런지...

물론 그의 업적에 의해 문명 발달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을 수 있지만,과연 그것이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만 했을까?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을 꾀하면서 자신의 여백 없는 삶을 아쉬워 하며 위의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뇌척수막염으로 사료되는 질환으로 그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스스로 얼마나 애통했을까?

그 병은 인두염,발열,근육통,관절통,정신 쇠약 등을 보이며 두통,위장관 증상이 동반된다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최근 한 친구로부터 나의 글에 대해 지적을 받았고,독서량을 늘리라는 권고를 받았다.

내 글은 어딘가 허술하기만 해서 책을 많이 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는 평과 함께...

물론 인정한다.내 글이 엉터리임을...그리고 잘 쓰고 싶긴 하다.

이뤄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해도 좋은 것이,언젠가 은퇴를 하고 나면 따로 공부를 해서 이 엉터리 글들을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지나치리 만치 미사려구를 총동원하고 혼을 쏘옥 빼놓은 류의 글을 쓰고 싶지는 않은 것이...

나처럼 부족한 사람도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을 주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자신에게,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다.

왜 글은 잘 쓰는 사람들만 써야 하는 걸까?

 

난 중학교를 다니던 중 어머니로부터 양장본의 ,근사하고 두툼한 일기장 선물을 받았다.

그래!나도 일기를 써 보자!마음 먹고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생전 글이라곤 써 본 일이 없는 나로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가 돼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 갔다 와서 놀다가 잤다 .'정도가 고작이었지만,일기장이 아까워서 계속 써 갔다.

마침 사춘기이기도 했지만,호랑이 아버지 때문에 미처 발산할 길도 없었고,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정신상태에서,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런데 신기한 것이 조금씩 살이 붙어간다는 걸 느끼게 됐고,몇 시간씩 쓰는 날도 생겼으며,펜팔까지 하게 됐다.

내 의사를 글로 표현하게 되면서 말주변도 좋아졌고,점차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자신을 갖게 됐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내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도약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지만,보다 급한 일들이 있어 늘 미뤄두기만 했는데,

최근 한 친구가 그 아픈 델 콕 집어내서 문질러대고 있는 것이다.ㅠ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나도 한때는 주제에, 완벽주의자 흉내를 내면서 가족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아는데,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완벽의 도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성취가 있으면 있을 수록 점점 높아지기만 해서 스스로도 지치고 주변 사람들까지 지치게 만듵다.

완벽의 대명사인 신이 됐다고 생각해 보자.

수십 억의 사람들이 24시간  울고 불면서 애원을 하고,원망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헌금이랍시고 갖다 주면서 뻥튀기를 해달라고 할텐데,

얼마나 숨이 막히고 ,우울해지겠는가?

완벽해지지 말고,남에게 폐나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자.

적당히 부족한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다 문득문득 지겨워질 때면 불의와 싸우는 시민단체 쯤에 참여를 해 보면 스스로를 점검하는 기회도 갖게 되고 좋을 것 같다.

 

오늘 대전 현충원엘 다녀왔다.현충일을 맞아서...

민족문제연구소 동지들과 마련한 자리였는데,인산인해를 이룬 대전 현충원 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동지를 스스로 친일매국노들과의 투쟁을 다짐하는 결의대회도 했다.

그리고 직접 묘지 안으로 들어가 천하의 역적 김창룡이 더러운 별을 세 개나 달고 애국지사의 묘역에 묻힌 것을 확인하고,

파묘를 하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반드시 불의세력들에게 치죄를 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신 애국지사의 묘를 참배하고,김 구 선생의 어머니 묘소도 참배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애국지사들의 묘를 둘러보며,목숨까지 아낌없이 던지면서 정의를 위해 매진하신 그분들의 노력에 고개를 숙였다.

또한 나도 우리를 위해,민족을 위해,나라를 위해 뭔가 할 일을 지속적으로 찾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돌아왔다.

정말 사는 게 힘들고 우울하거든 근처의 국립묘지 등을 찾아서 독립투사들이나 민주열사들을 만나 보시라.

부끄러워지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나도 모르던 힘이 솟아오를 수 있을테니...

그 분들처럼 완벽하게 목숨까지 버릴 순 없을지 몰라도,얼마간 기여는 할 수 있지 않은가며 스스로에게 재촉하게 될지도 모른다.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180도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