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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행이 세상을 비추는 촛불이다.


BY 미개인 2016-06-20

저렇게 작은 촛불이 어쩌면 이렇게 멀리 비쳐 올까!험악한 세상에선 착한 행동도 꼭 저렇게 빛날 거야.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영국.극작가.시인.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고 찬사받고 있고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자주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 불리는 그는 잉글랜드 중부의,영국의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소읍의  중산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인 스트랫퍼드에서 ,비교적 풍족한 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1577년 경 가업이 기울면서 가사를 도와야 했고,학업을 중단하고 1580년 경 런던으로 나오게 됐다.

주로 성서와 고전을 이용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11 세에 입학한 문법 학교에서 문법,논리학,수사학,문학 등을 배웠는데,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그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대학에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력과 무대예술을 대상으로 타고난 감각,다양한 경험,인간을 대상으로 한 심오한 이해력은 ,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충분했고,자연 자체에서 깊은 생각과 탁월한 지식을 수집한 인물로서 그 세대 최고의 희곡가로 불리게 됐다.

동료 문인들로부터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해서 품격이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

그는 1594년부터 당시 연극계를 양분하는 극단 중 하나인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작가가 되었다.

극작가로서 1590~1613년까지 대략 24년 간 희극과 비극을 38편이나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생전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셰익스피어 한 명 만은 못 넘긴다"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1616년 죽어서 고향의 교회에 묻히는데,그의 흉상 아래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푸스는 그를 소유한다"

그는 생전에 이미 최고의 찬사를 받았지만,사후에도 계속 숭앙하는 대상이 되어 거의 신격화되고 있으니...

비평가 토마스 칼라일은 "영국 식민지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 평가되고 있다.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불렸지만,인간심리의 통찰에는 비할 수 없는 넓은 안목이 있었고,완성 과정에 있던 영어의 잠재력을 극도로 발휘하였다.

그는 르네상스 영국 연극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극작가로서 ,

사극,희극,비극,희비극 등 연극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는 창작의 범위와 당대 사회의 각계각층을 포괄하는 관객층을 향한 호소력으로 ,

크리스토퍼  말로,벤 존슨,존 웹스터 등 동시대 탁월한 극작가를 모두 뛰어넘어 큰 성취를 이뤄냈다.(위키백과)


어제부터 오늘까지 제천 의림지 옆의 산 속 작은 수련원에선  300여 개의 촛불이 쉬지 않고 반짝거리는 축제가 벌어졌다.
전국에서 모인, 자신을 녹여 세상을 맛깔나게 만들려는,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려는 아름다운 촛불이자 별이고 소금인 ,
전국의 민족문제 연구소 회원들이 ,동지들과 나눌 음식과,곡차,그리고 프로그램까지 준비해 와선 열정을 불태우는 시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고,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하나같이 싱글벙글 댔으며,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워 하는 마음이 차고 넘친다.
갓난 아이부터 여든, 아흔인 어르신들까지 남녀노소가 어우러졌지만,누구 하나 어색하지 않은,모두가 한 가족이었다.
주말이었고,스스로 알아서 산골짜기로 찾아 와야 했기에 다들 지쳐있을 법도 했지만,누구 하나 내색을 하는 이가 없었고,
이른 식사를 마친 후 강당에 모여 오리엔테이션 성격의 행사를 마친 후,
너른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와 커다란 원을 이뤄놓고,민문연식 인사가 이뤄졌다.
어느 한 사람이 원 안쪽으로 돌면서 원을 이룬 동지들과 눈을 맞추고,악수를 하면서,훈담을 나누기를 300여 회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다시 처음의 그 사람을 다시 만나도 그저 좋아서 더 돌고 돌았던 짜릿한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됐다.

꿈나무들이 캠프 화이어에 불을 붙이는 것을 시작으로 지역별,연령별 장기자랑이 벌어졌고,우린 즉석에서 만든 프로그램으로 나서서 흥을 돋우었다.
틀리고,안 맞고,실수하고...폭소를 자아내는 것 투성이였지만,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면서 밤이 깊는 줄도 모르고 즐겨줬다.
강강수월래를 하면서는 건강하다고 자부하던 내가 지칠 정도였지만,대다수는 지칠 줄 모르고 뛰고 또 뛰며 열정을 불태워줬다.
지역별로 운동장 바닥에 자리를 만들어 먹고 마셨지만, 어느 모임에도 경계는 없었고,서로 오고가며 통성명을 하고 덕담을 하기에 바빴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 아쉬운 듯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고함도 질러가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지만,
날이 밝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치운 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나머지 행사를 치뤄내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일당백의 용사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여서 듬직했다.

의병의 도시 제천이 한 때 일제에 의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폐허로 짓밟힌 곳이지만,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고,독립군으로 이어져서 독립을 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곳이란 걸 제천시 의병기념관에서 보았고,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반야월이란 자가 친일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념비를 세우고,기념관을 설립하려는 걸 민문연이 중심이 돼서 막아낸 일이며,
반야월의 노래비 옆에 단죄문을 세워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곤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도착하자 마자 임 종국 선생의 조형물 설립 추진을 위한 서명운동을 했고,모금활동도 겸해서 많은 호응을 얻어냈다.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이자 대가이신 임 종국 선생으로 인해,반민특위의 후신으로 설립된 민문연이 아니던가!
모두가 자신의 일로 알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줘서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물론 우리 모두의 일이긴 했지만,내가 살고 있는 천안에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기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추진하고 있는 일인데,
많은 분들께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아 주셔서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여러 곳에서 추진하고 있는 행사에도 힘을 보태며, 받은 이상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도 전달했다.

내 평생 이리 감동적이고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흡족한 1박2일이었다.
스스로 용기를 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심지어는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뤄내 보겠다고 나선 이들.
천사가 따로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동지들이 하나같이 자신보다 동지들을 더 챙겨주고 있었으며,
어떠한 고충이 닥치저라도 끝까지 남아서 불의와 투쟁을 해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걸 보곤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부감도 느꼈다.
내가 한, 그 어떤 선택보다 민문연에 가입하고 활동을 하기로 한 것이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남은 생에 걸쳐 펼쳐가기로 한 친일매국노들과의 싸움에 큰 힘도 될 뿐 아니라 방향이 같아서 많은 도움도 얻을 수 있으니 ...
내년 하계수련회는 내가 속한 충남지부에서,그것도 충절의 고장인 내 고장 천안에서 펼쳐질 가능성이 큰데,
새로운 회원들도 많이 초대하고,그 어떤 행사보다 풍성한 행사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바쳐 기여하고 싶기도 하다.
비록 할 줄 아는 게 육체적 노동에 불과할지라도 열심히,먼길을 찾아와준 동지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멋지게 이뤄내고 싶다.

다이아몬드는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밝게 해주려는,보통은 하찮다고 생각하는 촛불이 없다면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잘났다고 뻐겨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을 해주신 부모님이나 이웃들이 없었다면 그리 되지 못했을 것임을 깨닫고 ,
부디 겸손해지고 ,고마워 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서 오래도록 빛날 수 있는 사이클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빛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촛불이 꺼져버리면 그들 역시 아무 것도 아닌 일개 돌덩어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니...
공존하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언젠간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하며,주변을 둘러보고 ,고마워 하고,낮은 곳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려 주려는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나'만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런 잘못된 사고방식이 공멸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달아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