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 이정희 / 2009-05-01)
한 편의 블랙코미디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계속 허탈한 웃음만 나오네요.
4월 임시 국회 마지막 날, 본회의 시간은 원래 오후 2시로 예고되어 있지만, 언제나처럼 제 시간에 열리지 않습니다. 4시로 한 번 연기되고서는 그 뒤로는 연기된다고 말도 없습니다.
그저 의결정족수인 과반수 국회의원들 모이기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나라당 의석 170석이나 되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을 아무리 끌어모아도 150명 채우기가 힘듭니다. 결국 밤 9시가 되어서야 회의가 열렸습니다. 지난 2월 임시 국회 마지막 날 한나라당이 의결정족수를 못 채워 밤 9시에 열린 것과 똑같습니다.
사진 : 민중의 소리 김미정 기자 http://www.vop.co.kr/A00000250832.html
최대의 쟁점법안은 1가구 3주택자 이상의 양도소득세 중과 폐지하는 소득세법 개정안, 그리고 지난 2월 국회에서도 처리되지 못한 금산분리 완화 법안들입니다. 재벌이 은행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내용인데, 은행이 요즘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로 바뀌어가니까,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두 가지가 함께 같은 내용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법안들입니다.
저는 은행 지분 소유한도를 늘리는 것 자체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지금은 재벌은 은행 지분의 4%까지만 의결권 있는 주식을 가질 수 있고 사모투자펀드를 통해 은행지분을 인수해도 혼자서는 20%, 계열사와 함께는 30%까지만 주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부안은 은행 지분의 10%까지 가질 수 있게 하고, 사모투자펀드를 통할 때는 혼자서는 30%, 계열사와 함께는 50%까지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식소유한도를 늘리면 재벌은 은행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고, 외국 산업자본도 은행 인수전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재벌과 외국 산업자본에게 은행을 내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서 한도를 늘리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협상은 1% 더 내놓으라는 비율 조정이 되었습니다. 현행은 4-10-30이고 정부안이 10-30-50이니 그 중간쯤 하자는 것이지요. 지분소유한도를 8%로 하느냐 10%로 하느냐, 사모투자펀드를 통할 때를 15%로 하느냐 25%로 하느냐를 두고 서로 말이 오갔습니다.
이렇게 1% 차이 가지고 협의하던 중에, 한나라당이 성질 급하게도 정부안과 같은 결과를 내는 10-20-50으로 2월 임시국회 끝나는 날 정무위에서 날치기 처리해버렸습니다. 결국 날치기 논란 때문에 법사위에 발이 묶였습니다.
4월 국회에서 다시 비율 조정 문제로 협의가 계속되었고, 회기 마지막날인 4월 30일 저녁 무렵이 되자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에 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합의가 되었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이미 정무위에서 통과된 법률이니 본회의에서 수정안을 내어 통과시킨다는 거예요. 지난 번 날치기한 안을 9-18-36으로 바꿨답니다. 이 안이 한나라당 의원들이 발의한 본회의 수정안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처리순서가 계속 뒤로 가더니, 11시 30분이 넘어서야 은행법 개정안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수정안이 함께 안건으로 올라왔습니다. 제가 수정안과 개정안 모두 반대해달라고 토론을 했는데, 이게 웬 일, 그 뒤 토론자가 김영선 정무위원장인 겁니다.
김영선 위원장, “차라리 이정희 의원처럼 반대를 하던지...”하면서, 수정안은 원칙 없는 타협이니 원래 정무위에서 통과시킨 개정안대로, 말하자면 정부안대로 해야 효과가 있다면서 강경하게 수정안 부결시키자고 했습니다.
이런, 한나라당 안에서 입장 정리가 안 되고 강경파가 나선 셈입니다. 은행법 수정안 표결해보니 찬성이 54%밖에 안 되었습니다. 한나라당 강경파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 안건이 금융지주회사법인데, 은행법 수정안이 통과되면 금융지주회사법도 같은 내용인 수정안이 통과되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김영선 의원이 또 반대토론을 하는 겁니다. 민주주의를 목청껏 말하면서, 타협의 산물인 수정안 부결시키고 원래 밀어붙였던 원안 통과시켜 달라구요. 날치기 처리한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에 맞는다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시계는 12시 5분전. 수정안부터 표결이 시작되었는데, 찬성이 47%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이변이 있나. 원안 표결이 이어졌습니다. 또 과반수 미달입니다. 결국 수정안도, 원안도 부결되었습니다. 이런 이런, 같은 내용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법 두 건이 각각 다른 내용으로 남은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 나서 쪽박 깬 꼴입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 의석을 향해 합의해놓고 왜 반대하느냐고 소리칩니다. 내부 단속도 못하면서 야당하고 협의는 무슨 협의란 말입니까. 국회 의장의 표정도 망연자실입니다. 강기갑 대표님은 앉은 자리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국회의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사건 아니겠습니까.
이제 국회에 들어온 지 1년 되는데, 두고 보면 볼수록 국회 본회의가 봉숭아학당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아집니다. 거대 여당은 과반수 훨씬 넘으면서도 자기들 힘으로 의결정족수인 과반수도 못 채워 의원들 연신 불러댄 끝에 예정보다 7시간이나 늦은 밤 9시나 되어야 회의 시작합니다. 시간 없고 바쁘니 법안 제안 설명하는 의원이 간단히 끝내면 다른 의원들이 “잘 했어!”하는 소리가 마구 커집니다.
하지만 제가 반대 토론하러 나가면 “왜 또 나와”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옵니다. 급기야 관련된 두 개의 법안을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달리 의결해버릴 정도로 의원 각자가 법안 내용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작년 12월부터 몇 달을 두고 핵심 쟁점이 되었던 법인데도, 내용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밤 12시가 되어 임시국회 회기가 끝나, 봉숭아학당 문이 닫혔습니다. 본회의에 올라왔다가 처리 못한 법안이 20건도 넘게 남았습니다. 12시 30분에 브리핑했는데, “한나라당의 자중지란으로 벌어진 한 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더군요. 참.
한나라당, 협상한 것으로도 양보 못하고 강경하게 원안대로만 가야한다고 하니, 이것이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0:5로 패한 다음 날 나온 태도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이래서야 국회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일까요. 안타깝습니다.
ⓒ 이정희 /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