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독서
-자운영독서회 팔월모임
매미울음은 아직도 그칠줄 모른다.
되려 뜨거운 태양열 아래서도 그 벅차오르는 생명력을 과시함인가.
아니면 아직 제 짝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에 가슴 찢어지도록 외쳐대고 있는가.
이것도 한때뿐일터.
아스팔트에서 뜨거운 열기가 속옷 사이로 스며들고 훅훅 콧바람이라도 불어대보지만 더위는 삼복더위만한게 더 있으랴.
엊그제 말복이 겨우 지났다.
자운영회원들을 본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헤어진지 한 달쯤되는 이맘께면 슬금슬금 떠오르는 얼굴들.
향숙언니, 현자언니, 숙자언니. 수정언니, 가츠꼬언니, 숙영이 언니, 영희언니, 배진, 슈우꼬, 은숙씨, 신환오빠,.......
늘 함께 해오던 일이라 우린 꼭이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야 한다는 불문율을 안고 있다.
정해진 필독서를 아직 다 못읽었어도 먼저 읽은 이들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가 서로의 게으른 독서생활을 뒤돌아보게 한다.
대개 팔월 휴가 기간동안의 동아리활동은 어디나 잠잠한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학창시절도 아니고 아저씨들 음주나 낚시동아리도 아닐바엔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거른적 없는 팔월 모임.
이틀전에 미리 부회장인 정향숙씨가 문자메세지를 날렸다.
"17일 금요일 10시 문화원에서 자운영 모이기로 합니다. 생활속에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시는 날 되시길........"
회원들은 제 각기 하던 일을 멈추고 문자를 들여다 본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서회군!'
'아차 난 그날 마침 가족들과 나들이 가기로 했는데.......'
'어? 아직도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의 수발을 들어야하는데 어떡하지?'
제각기 많은 사연들 속에 못나오게 된 이들은 못나오는 이유를 총총히 전한다.
누구든 회원들은 다들 입장들 비슷한 사정을 한두 번은 겪고 있기때문에 못 나온다는 사정을 전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록새록 정이 든다.
(필독서에 관한 복사물 자료를 서로 나누고 있다.)
8월 17일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회의는 진행된다.
회의라고 하면 자칫 딱딱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사실은 이만한 결속력이 있는 모임도 드물다.
청일점인 김신환회원은 여느때처럼 문화원에 올적마다 음료수를 가지고 온다.
회원들을 만나는 반가움에 대한 깊은 사려를 느낄수 있다.
이날 필독서는 지난 달에 읽은 <향수>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또 하나의 작품 <좀머 씨 이야기>와 유치환의 <쫓겨난 아담>이다.
헤르만 헤세 이후 최고의 독일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2차세계대전 후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씌어졌고, 좀머씨가 그 참혹했던 전쟁경험으로부터의 도피행위가 어쩌면 '밀폐공포증'환자로 만들었으리라.
긴 그의 문장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동화속 세계로 접어든다.
좀머씨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뛰어날뿐만아니라 비오기 직전 또는, 비가 오는 모습을 마치 세밀화를 보듯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도 참 매력적이다.
주인공이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 또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풍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등 흥미로운 사건들이 주인공에겐 소중한 추억들인 셈이다.
동화의 마지막 끝맺음의 잔잔한 여운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필독서인 청마선생의 산문집<쫓겨난 아담>을 한 회원이 낭독하고 있다.)
이어 청마 유치환선생의 작품인 <쫓겨난 아담>에 대해 나눌 차례이다.
광복절 즈음해서 이 책을 읽은 것은 그 느낌이 다른 때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을 공부할 적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친일문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디 문학 뿐이랴. 문화 예술 기술 기업 교육 정치 등 우리의 근대 역사 자체가 깡그리 친일 아니었던게 있었을까?
어릴적 소위 교과서 인물들 대부분이 친일파명단을 장식하고 있다.
이광수 모윤숙 최남선 주요한 유치진 서정주 김기창 현제명 홍난파 김인수 민복기.........
철부지 문학소녀의 꿈을 꾸던 시절 우상들이.
공책에 정성들인 글씨로 따라쓰던 그 시가.
우리의 아름다운 예술가들이.
청마 유치환 선생은 통영출신으로 어린시절 형인 동랑 유치진 선생과 함께 한약국을 운영하시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유학 생활을 했다.
부산과 경상도에서의 교편생활을 하면서 시창작활동을 하셨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믈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 전문 (조선문단 1936년 1월)
<깃발>를 시작으로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바위>, 사랑을 담은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의 <행복>, "십이월의 북만 눈도 안 오고...." 로 시작되는 친일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수> 등 많은 청마선생의 알려진 시들을 회원 한 사람씩 개성있는 목소리로 낭송하는 멋도 누린다.
산문집의 표제작인 <쫓겨난 아담>에서 나이 든 청마선생이 어느날 자신의 젊은 날을 보냈던 그 주변의 신촌 이화대학을 찾았을 적의 심회를 쫓겨난 아담으로 표현하셨다.
선생이 또 다른 글 속에 사람의 나이에 대한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어디선가 생떽쥐베리는 '사람의 나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전 생애를 요약한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숙은 천천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애물과 싸워 이기고 나서, 수많은 중병을 치르고 나서, 수많은 심로을 견디고 나서,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한 많은 위험을 겪고 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많은 욕망과 희망과 비탄과 망각과 사랑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의 나이라는 것은 경험과 추억의 훌륭한 축적을 뜻하는 것이다'고, 사람의 쌓은 연령에 대하여 이같이 값 친 일이 있었는데 지극히 옮은 말이다. 이 말을 우리가 수긍할진대 이토록 값진 노령 뒤에 오는 죽음을 회의하고 귀의하기 전에, 죽음이란 그같이 값진 나이보다도 얼마나 고귀한 대가를 지불하고 비로소 우리가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를 먼저 깨달아야만 옳을 일이 아니겠는가? <무용의 사변>에서
(성숙자회원이 자신이 젊을 적에 타자기로 타이핑해두었던 문구를 낭독하고 있다.)
독서열기는 점심시간까지 이어진다.
가까운 식당에 모여앉아 성숙자(62세)회원의 낡은 노트를 들여다 본다.
습관의 중요성에 대한 짧은 일화를 감상하고 서로의 견해를 나누기도 하였다.
회원들의 만남은 꼭 독서이야기뿐아니라 육아나 집안문제 또는 건강관리나 인생상담까지 다양한 화젯거리들을 즐긴다.
이날 이틀 전에 귀국한 야마모또슈우꼬씨는 삼 년만의 친정나들이에 대한 감회를 이야기했다.
신입회원으로 박선자씨가 가입해서 회원들의 사기를 북돋기도 했다.
이날 참석 못한 김선영회원이 못내 아쉽다.
병원에 입원한 남편이 내일 퇴원할거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원들은 너도나도 병문안을 가자고 합의한다.
독서생활을 통해 맺어진 인연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해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교감이 아닌가.
고동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