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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생활과 김치철학


BY kyou723 2008-03-17

 

독일 와서 첫 김치를 담글 때 눈물났었다. ‘나도 김치를 담을 수 있다니’ 생각하며 너무나 감격해서~~ 마치 양가집 규수의 첫 신부수업처럼 말이다.
한국에 살 땐 친정과 시댁에서 번갈아 맛있는 김치를 담궈주셨다.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절인 배추’ 한 번 만져보지 못한 것을 합리화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기에 서슴없이 낼름낼름 받아먹었다. 게다가 혹여나 내가 만들 기회가 생겨서 그동안 공수해먹었던 맛깔스런 김치맛과 비교될까봐 노심초사했었다.

그러나 외국생활에 돌입하다보니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맛있는 김치에 단련된 우리 가족의 입맛도 서서히 내 어줍잖은 손맛에 안착시켜할 판이었다.
처음 김치를 담글 때 빈 그릇이 요란하다고 제법 타당한 변명도 많이 늘어놓았다. ‘재료가 영 형편없어서, 물맛이 안 좋아서, 배추가 우리 것이 아니어서’라는 그럴 듯한 핑계가 먹혀 들어가는 상황이었기에 어떠한 결과물이든 너그러이 양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자 요리에 제법 노하우가 생기고, 가속력이 붙는 양상이 흥미로왔다. 아마도 ‘고래도 칭찬하면 춤춘다’는 말이 있듯 나의 형편없는 요리솜씨에 달작지근한 당근공세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일등공신은 당연 일등 조련사 우리 영감이다. 다국적, 다각적 입맛에 길들여진 울 영감은 항상 내 반찬솜씨가 최고라고 너스레를 떨어준다. 결국 돈은 필요 없지만 그 가치는 무한한, 서슴없는 칭찬을 연발해주니 사기충천한 의욕이 불일 듯 이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요즘은 김치를 담글 때 조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해주니 이보다 더 좋을소냐. 김치를 씻고 물을 빼는 작업이나 김치통을 옮기는 힘든 작업을 자칭 ‘마당쇠’라 칭하는 남편이 감당해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다.

 ** 김치를 얼마나 절이느냐가 참 중요하더이다

 ** 앙증맞은 레디쉬 김치의 매력

 ** 무우 한 개로 깍두기를 만들었다.

 ** 사실 채써는 기계가 있는데,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렇게 손수 썬다. 그래서 더 맛있을까?

 ** 김치 고수님들이 보면 뭐라 하실지~~ 내멋대로 양념~

 ** 레디쉬는 많이 버무리면 풋내 나서 안되징!!! 가볍게 살살~~

 ** 둘째 뚱이가 침을 질질 흐르고~~

 ** 아~ 배고파~~ 지금 이 글 쓰는 시간이 딱 점심때네~~ 다시 한 번 군침 돌고~

어제는 김치를 담궜다. 제법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이제는 눈대중으로도 김치가 짤지 싱거울지 대강은 알 것 같다. 한석봉 어머니와 한판승부를 겨뤄도 제법 승산이 있어 보인다. 이참에 하산이라도 해야 하나.
2주일에 한 번 정도 행해지는 김치 담그는 날은 우리집 잔치날이다. 김치종류도 많거니와 그날은 시래기를 넣어서 얼큰한 된장국이 밥상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워낙에 김치류를 좋아하는 김치가족들 탓에 오히려 독일 속에 작은 대한민국을 방불케 한다. 큰 딸 똑이(똑순이의 준말)가 무지 환장하는 빨간 정열의 레디쉬 김치와 둘째 딸 뚱이(귀염뚱이 준말)의 열혈반찬인 깍두기김치, 가장 기본이지만 절대 빠질 수 없는 배추김치까지.
가끔 혀꼬부라진 소리로 ‘나랑 김치 중에 누가 더 좋아?’라고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할 때, ‘둘 다 좋아~헤헤’라고 맞받아치는 우리 낭군님은 배추김치의 지독한 중독자다. 배추김치 없으면 차라리 밋밋한 빵을 먹는 사람이니까.
배추를 제법 많이 담는 것 같은데, 막상 먹다 보면 금새 바닥을 헤맨다. 게다가 유학생 후배들이라도 올라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한 포기씩 떠밀기 때문에 가고나면 남는 게 없다. 이곳 유학생들도 김치를 담아먹는 이들도 있지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가게에서 파는 김치는 참치캔 정도보다 조금 큰 유리병에 거의 한국 돈으로 1만원 정도는 줘야 한다.
외국에 살다보면 제법 짠순이가 되는 것 같다. 물론 그럴 듯한 기업체 가문이나 그혈족들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자연스레 이곳 절약문화에 포섭되는 것 같다.
어떤 유학생이 했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제법 잘나가는 집안의 딸인데, 이곳 독일에서 오래 유학하다 보니 절약이 몸에 배였단다.
그런데 가끔 한국에 들어가서 보면 엄청 놀랜다나. 자기 부모님이 해놓고 사시는 것 보면 ‘와 내가 부자집 딸이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고....

물론 그중에 알뜰이 절대 둥지를 틀지 못하는 럭셔리파도 있다. 이곳으로 유학온 십대 중에도 유명한 이태리 명품지갑을 주저없이 구입하고, 명품 브랜드 끼고 사는 사교계 아이들도 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김치를 사서 먹거나 아니면 한국식당을 매일 전세될지 모르지. 아니면 독일문화에 완전 함락되어 자우어 크라푸트나 소시지만 입에 물고 있거나~
아무튼 김치는 집에서 직접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배추를 버무리며 인생을 버무른다. 시간을 느낀다. 절이는 시간을 통해 인내와 기다림을 배운다. 해야 할 것과 멈춰야 할 것을 배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맛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서 아직은 설익은 김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맛이 삼삼하게 배인 맛있는 김치가 될 것을.... 내 인생의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삼삼한 맛이 우러나오는 맛있는 김치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박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