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해야겠다 7
-할아버지의 죽음(1977년 겨울)
꿈을 꾸었다. 설명할 수 없이 어지러운 꿈이었다. 발등에 닿는 느닷없는 서늘한 감촉에 나는 눈을 뜨고 말았다. 집안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사람들의 웅성대는 말소리가 꿈결엔 듯 들려왔다. 내 발치에 할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기이하게도 하얀 소복에 머리를 어깨 너머로 길게 풀어 내린 헤괴한 모습이었다. “할매....” 하면서 내가 일어나 앉으려니까, 할머니는 내 발등을 쓸어주며 “괜찮다. 더 자그라.” 하신다.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것이고, 다리 건너 사택집에서 주무셔야 할 할머니가 왜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차림새로 이 신새벽에 내 발치에 앉아계신 것인지......윗목 재봉틀 앞에서 양옥집 박씨 아줌마가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며 뭔가를 박고 있었다. 누런 삼베 저고리였다.
“어르신, 띠는 다섯 개만 맨들면 되겠지요?”
박음질을 하다 말고 박씨 아줌마가 할머니를 돌아보며 묻는다. 할머니의 손은 계속 내 발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눈길은 허공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예? 어르신...”
대답 없는 할머니를 다시 한번 채근하는 아줌마. 그제서야 할머니는
“그깟 지지바들 다섯 뿐인데, 그리 하소.”
하신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신다.
“에이고, 불쌍한 양반. 그예 손주도 한번 안아보지 못하고 가싰부맀네. 애닯아서 어찌 눈을 감으셨으꼬.”
할머니가 온 몸으로 울고 있었는데도 할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부엌에는 동네 아줌마들란 아줌마는 모두 집합한 것 같았다. 꼬마 언니네 엄마, 미숙이 언니네 엄마, 은경이 언니네 엄마, 극남이네 아줌마... 가마솥이 마당에 내걸리고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큰 잔치라도 벌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쪽 큰 마루에서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무리를 지어 화투를 치고 있었고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겨울 새벽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른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할머니가 담배를 피워 무셨다.
“할매, 나 눈 매워.”
나는 할머니한테 신경질을 부렸다.
“느 할애비 저승길 혼자 가시는 길에 냄새라도 맡으라고 피우는거여.”
‘할아버지가 죽었나보다.’ 나는 그제서야 집안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가슴은 뛰었지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얼 뜻하는 것인지 나로선 당장엔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밀려오는 새벽잠을 이기지 못하고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엔 빨간 슬레이트 지붕집, 우리집 너른 마당에서 회사 곡괭이 마크가 찍혀 있는 작업복을 입으신, 아버지의 회사 동료분들이 여럿 모여 관을 짜고 상여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계셨다. 부엌에선 아줌마들의 왁자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고 어젯밤에 마루에서 화투를 치시던 아저씨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앉아 화투장을 노려 보았다.
양옥집 박씨 아줌마가 밤새워 만든 누런 삼베 허리띠를 언니와 나의 허리에 꼭 붙들어 매 주었다. 언니와 내 허리에 묶인 베 헝겊을 보면서 나는 언젠가 언니가 읽어준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무꾼이 깊은 산속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와 정면으로 마주 친다. 그는 호랑이 밥이 되지 않기 위해 호랑이 앞에 무릎을 꿇고 호랑이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어머니가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형님인 줄 알고 극진히 대접하라 일렀다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호랑이는 나무꾼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진심으로 나무꾼을 친동생으로, 나무꾼의 어머니를 저를 낳아준 어머니로 믿고는 나무꾼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나무꾼의 어머니를 극진히 섬긴다. 세월이 흘러 나무꾼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호랑이는 식음을 끊고 몇날 며칠을 슬퍼하다가 어린 새끼 호랑이들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어느 날 나무꾼이 산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새끼 호랑이들은 저마다 꼬리에 베 헝겊을 묶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다 죽은 어미 호랑이를 추모하고 있었다.
초상집에서 일곱 살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여기 저기 집안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심심하고 무료했다. 그러던 찰나,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절하러 오래.” 하며 언니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나는 언니와 함께 도랑 건너 사택집으로 갔다. 굴건제복을 한 아버지와 누런 베옷에 새끼를 꼬고 군데군데 베조각을 끼워 만든 관을 머리에 두른 엄마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아이고오, 아이고오...” 곡을 하고 있었다. 제사지낼 때만 제사상 뒤에 가려치던 병풍이 드리워져 있었다. 병풍 앞에는 향이 피워져 있었고 양초가 흡사 통곡을 하는 것처럼 촛농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눈짓에 따라 언니와 나란히 병풍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도 나는 아랫목 쪽 병풍 뒤에 비죽이 튀어 나온 할아버지의 발을 곁눈질 했다. 할아버지의 발가락이 어느 순간 곰지락,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두 번 절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엄마 때문에 정말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는 먹지도 않고 변소에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를 가린 병풍 앞에서 계속 울며 곡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사택 앞 공터에서 상여놀이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를 실은 꽃상여가 아저씨들의 노랫가락에 맞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춤을 추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야, 디야. 북망산이 멀다더니, 그 먼 길을 어이 갈꼬...” 만장을 휘날리며, 상여꾼들의 노랫소리가 흩어지는 가운데 할아버지의 하얀 꽃상여는 동네를 떠나 장지가 있는 솔고개로 향했다.
할아버지를 산에 묻어드리고 돌아온 날부터 첫째동생이 앓기 시작했다. 입술이 다 말라 타 들어가고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지를 못했다. 장례를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엄마와 아버지는 동생의 갑작스런 병치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저러다 말겠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엄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알몸으로 나타나 마구 달려드는 꿈을 한날 한시에 꾼 것이었다. 얼마 후 엄마 꿈에 할아버지가 또 다시 나타나셨는데, 꿈의 장소는 할아버지의 무덤이었다. 할아버지가 동생을 옆에 세워두시면서 ‘이 애는 여기 두고 가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꿈이었다. 아버지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풍수를 잘 안다고 소문이 나 있는 지관 한 분을 모셔다가 할아버지의 무덤을 보여드렸다.
지관의 말이, 할아버지의 무덤을 가리키면서, ‘이 자리는 한 집에서 세 사람이 죽어나갈 자리’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이 못 가 우리집은 할아버지 무덤을 파헤치고 장례를 처음부터 다시 치렀으며 무덤도 지관이 일러준 대로 새로 썼다. 지관이 일러준 대로 장례를 다시 치르고 무덤을 새로 쓰는 일도 처음 장례 때 오셔서 모든 일을 맡아 해주셨던 아버지의 회사 동료분들과 동네 아낙들이 일사천리로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성심껏 일을 해 주셨고 덕분에 두 번의 장례식은 무사히 치러졌다.
사경을 헤매던 동생도 말끔한 얼굴로 뛰어 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