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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다녀간 어머니 돋보기


BY 2008-06-27

 

 

햇살이 창가에 와서 짤랑이는 오후, 읽다만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요즘 한창 베스트셀러인 즐거운 나의집이란 소설책이다.가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할 상처와 사랑하기에 이겨내야 할 고통은 감동을 넘어 치유와 회복의 가족이야기다.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어른어른 댔다.

오십 개가 넘는 간이역을 지나오면서 잡다한 것들을 너무 바라보았고

혹은 보지 말아야 할 것도 슬몃 바라본 이유로 눈앞이 흐려졌다.

앞으로 지나야할 간이역이 몇 개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점점 더 눈앞은 흐려질 테고 바람소리도 제대도 느끼지 못하리라.

아! 돋보기가 있었지...생각이 나서 피아노위에 놓여있는 돋보기기를 썼다.

정전 뒤에 들어오는 전기 불처럼 눈앞은 시원한 백사장이 펼쳐졌다.

어쩌면 이렇게 밝은 세상이 있을까. 글씨는 커다랗고 시원하게 잘

보였다.

이 돋보기는 3년 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께서 남기고 가신 유품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나온 돋보기는 울컥 가슴을

뜨겁게 했다

어머니는 이 돋보기를 쓰고 선비의 아내답게 천자 책과 주역서문을 읽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연필글씨로 천자문을 거뜬히 쓰셨다.이 돋보기를 쓰시고 네모 칸이 그려진 공책에 천자문을  쓰시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머니가 남기신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 간혹 어머니의 체취가

어디에 남아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어머니가 만졌을 안경테를 가만히 만져보기도 했다. 

어느새 어머니의 돋보기가 눈에 맞을 나이가 된 딸은 돋보기 너머로 보이던 어머니의 눈빛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어린 시절 겨울밤, 흰 눈이 싸르락 내리는 그 밤, 밤을 소복하게 만들던 눈 오던 밤에 어머니는 옥루몽을 읽으셨다.한 손으로는 잠투정으로 칭얼대는 내 가슴을 토닥이시며 등잔불 심지를 키우며 나직나직 읽으셨다. 어린 나에게는 그 소리가 자장가였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옥루몽과 숙영낭자전 장화홍련전을

어린나이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배 곯린 어린 딸의 작은 배를 

이야기로 채워주셨다.

어머니의 옛날이야기와 소설책 이야기로 배를 불리며 어린 겨울을

보냈다. 배고픈 선비의 아내, 그 아내의 배고픔도 이렇게 달랬으리라.

 

어머니는 또 어린남매들에게 노래를 가르치셨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항상 기쁘다.

아엠 소 해피.아엠소 해피.아엠 소 해피.이프 올로 데이.(이 발음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 발음 그대로 적는다)

와다시와 우레시.와다시와 우레시.와다시와 우레시. 이찌마 우레시

워정꽬라 워정꽬라 워정꽬라 장장꽬라

 

지금 생각하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노래였지만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에게

 저녁이면 이 노래를 가르치시며 행복해 하셨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이 노래를 배운 작은오빠가 초등학교 들어가 이 노래를 불러 인기가 대단 했다고 한다. 노래 좋아하고 책 좋아한 우리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 지신의 몸을 대학병원 연구실에서 기증하셨다.

그리고 2년 동안 대학병원 차디찬 실습실에서 의사를 꿈꾸는 어린

의학도들에게 자신의 몸을 헌신하셨다. 갈기갈기 웃음까지 나누셨을 테고 마디마디 뼈까지 다 의학의 밑거름이 되신 후 배 곯린 자식들에게 해주고 싶은 떡가루 같은 한줌 흰 가루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작년 11월 ,고향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위해 만드신 소영원에 고이 묻히셨다. 소영원...영원히 휘파람 불며 노니는 곳이라지만 그곳에 가면 눈물부터 앞장서곤 한다.

어머니의 몸이 의학발전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다만 어머니 그 숭고한 뜻은 많은 의학도들에게  분명 새로운 질병을 치료하는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어머니의 돋보기를 쓰고 있으니 투명한 그리움이 번져온다.딸의 앞길까지 환하게 밝혀주실 돋보기를 남겨두고 가신 어머니의돋보기 안에 어머니의 온기가 햇살로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