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동포의 귀항.. 뉴스를 보다가..눈물이 난다.. 왜 그런 기사를 보면..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걸까.. 나이탓? 고향이 뭐길래.. 이젠 흔적조차 사라진..고향이 뭐길래.. 조국이 그들에게 해준것이 뭐있길래.. 정든 가족들과 눈물로 생이별을 하고 들온단 말인가.. 죽어가면서..조국의 흙한줌 손에 쥐고 가길 소원한다는..실향민들.. 도대체..고향이 뭐길래.. 귀성길고속도로를 보며..그런 일 한적도 할일도 없는 난..항상..한심하다 생각했었다..도대체 고속도로가 완전히 주차장화 되어있는 저 상황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언제부턴가..저렇게 하루 12시간을 넘어.. 24시간을 길에 버리고라도 가야만 하는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었다.. 고향..내겐 그 가슴저린 고향의 기억이 별로없다.. 물론..환하게 다가오는 어릴적 외가의 기억.. 그게 전부.. 그거라도 있는게..그리 고마울수가 없었다.. 귀향(?) 준비. 별빛마을..처음엔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 살리라고 생각을 하진 못했었다 하지만..가끔 남편이 뜬금없이 퇴근이 늦어질때가 잦아졌다. 98년 여름..경기도 남양주 일대의 홍수.. 티비나 라디오에선 그동안 생소했던 수동이라는 지명이 거론되기 시작했었다 수동이 온통 물난리라는.. 그 뉴스가 있고서 다음날 남편이 또 아무말도 없이 늦었다. 남편은 그야말로 팬줄럼맨이었는데. 집안에 별일도 없었거니와 암튼 남편이 무슨일이 있어도 꼬치꼬치 묻는 체질이 아니었기 때문에..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느낌으로 남편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었기 때문에.. 그 해 겨울방학과 시험기간..시간만 나면 남편과 용인 이천 양평쪽을 뒤지고 다니곤 했었다. 그러나 그쪽은 이미 전원주택 단지로 이미 이름이 났던 곳이었고 땅값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졌었다. 그리고 모델하우스 들은 눈이 튀어나올정도로 호화로운 수입건축자재들로 장식되어 있었고..도대체 좋아보이긴 했어도 너무도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집들이었다. 그리고 전원주택 단지들을 돌아보면서 느낀것은..우린 보통 남쪽을 향한 배산임수지역..그러한 주택지를 은연중에 최고로 생각하고 있었지만..그렇게 많이 돌아본 곳에..어느곳에도 그런 최적지는 없었다는것..남쪽을 향한 땅..그야말로 수천년을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그런 덩어리 땅은 무엇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못해 다 쓰러져 가는 축사라도!! 그러니 자연히 전원주택 단지는 그동안 버려졌던 땅, 개발되기 쉽지 않았던 땅들이 서북향이든 동향이든 그 동안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지형에 그럴듯한(예를 들어 명당!! 산 사람에게 왠 명당??) 형용사를 붙여져서 분양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암튼 별빛마을 역시 그렇게 서북쪽을 바라보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나중에 언듯 물어보았다. 당신..마석 갔었어?..남편은 얼굴이 보름달 같이 환해지며..말했다. 다 떠내려 가도..거긴 끄덕없대..라고. 참내.. 수동에 수해가 났었단 소릴 듣고..남편은 당장에 별빛마을에 다녀왔던 것이다. 바로 아랫쪽 수동의 전원주택단지가 수해를 입어 집이 두채나 떠내려가고 노인 부부가 죽었단 소식도 함께 가지고 왔었다. 암튼..그쪽 별빛마을은 건재 하단 소릴 듣고..남편은 더욱 마음을 굳힌것 같았다. 어쩔수 없었다. 이미 남편의 마음은..온통..그곳 별빛마을에 가 있었던것이다. 아이들이 문제였다. 아무리 아이들을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가기 싫다!! 라고 하면 어쩔수가 없는데..일단 아이들에겐 최종적으로 준비가 된다음 말하려고 했다. 너무 일찍 말을 하게되면 여러가지로 좋을게 없었다. 이사라는것이 아이들을 흥분과 기대속에 있게도 하지만,,불안감과 두려움도 동반 할 수 있기때문에... 99년 봄, 별빛마을에 제일먼저 입주해 사시는 ㅈ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었지만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단 소식을 전해들은 ㅈ선생님은 우리 가족을 형제처럼 맞아주셨다. 남편보다 두살인가 위인 ㅈ선생님과 그 부인, ㅈ선생님의 부인은 나보다 한살 바로 위였다. ㅈ 선생님으로 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결코 장미빛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단지분양회사쪽 이야기만 철썩 같이 믿고 입주했던 ㅈ선생님댁은 그 동안 말로 못할 힘든일을 겪으셨다고 한다. 그야말로 처음 입주할때는 분양하는 땅 외에..산책로 텃밭 운동장 수영장등.. 그러나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었고 도로조차 만들어지지 않아 한동안 진흙창 가운데 집하나만 덩그렇게 놓인 꼴이었다고 한다. 거기다가..수시로 지나가던 사람들..옆마을 사람들..산길을 수시로 다니던 사람들은 울타리가 있는 그집 마당을 서슴치 않고 들어서서는 창문마다 코를 들이박고 들여다 보는 바람에..정말 동물원 원숭이가 된기분과 완전히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신경쇠약 까지 걸릴 지경이었다고 했다. 그런사이 한집에 더 들어왔고..이어 두집이 더..그래서 ㅈ선생은 땅주인들에게..일일히 편지와 전화를 해서 입주자 협의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경우없는 분양회사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하지만 97년 겨울의 그 유명한 아이엠에프가 터지면서 분양회사는 부도를 맞았고..단지는 그야말로 혹시나 해서 땅을 사놓은 사람들이 거의 입주를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거래도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우린 정말로 마을 사람들의 호의와 배려속에 땅을 장만하고 집을 짓게 되었는데..집을 지으면서도 다른 문제는 많았지만 우리집을 짓던 소장님도 공사하면서 주변사람들이 이렇게 호의적인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너무나 공사가 편하다고 말을 했었다. 암튼..그렇게 우린 별빛마을 주민이 되기로 하였고..집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생각한 끝에 모든 별빛마을 세대들이 목조주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린 스틸하우스를 짓기로 하였다. 그리고 7년 동안 살던 아파트를 내 놓았는데..집이 나가질 않는것이다 결국 5월에 내놓았던 집은 8월 30일날 기적(?)처럼 적당한 가격에 팔렸고. 우린..빨리 공사착공과 더불어 이사를 해야했는데.. 집 지을동안..우리가 살 집이 문제였다. 어디고..시골이라도 두달만 살겠다고 하는 외지인을..선듯 받아주는 집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시련이 시작되게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