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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뭔 죄 있다고 잡아가 때린대요?"


BY dumani 2002-04-07


어느 월북자 아내와 되살아난 '연좌제'의 공포


박영란 기자 dlleya@hanmail.net

2000년 8월말의 일이다. 나와 가깝게 지내던 비전향장기수들이 고향에 돌아가기 며칠 전. '광주 통일의 집'은 장기수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다. 나도 '통일의 집' 한 켠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더니 "김동기 선생이 이산가족들의 편지를 받아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김 선생을 만나러 서울서 왔다"고 했다.
마침 김동기 선생이 다른 손님들을 만나고 있어서 내가 있던 방에서 기다리게 했다. 할머니가 기다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다른 장기수 한 분이 그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그 어른이 저쪽 방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얘기가 길어지나 봅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나한테 얘기해 보세요."
"우리 영감을 찾고 싶어서 이름자를 전해주려고 왔어요."
"북에 가족이 있어요?"
"예. 우리 영감이 해주에 산다는 말을 들었어요."
"해주 어디에?"
"그건 잘 몰라요."

할머니는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쪽지를 쥔 손을 꽉 움켜 쥐고 펴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 김 선생한테 말하는거나 나한테 말하는 거나 똑같아요. 그 분이 지금 바빠서 시간을 못내니까 나한테 말을 하라는 거여. 그런데 있다가 김 선생을 만나더라도 이름만 달랑 말하면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 원래 고향은 어디고 영감님이 뭔 일을 하다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자세한 얘기를 적어놓아야 찾기가 더 쉬워요. 내가 종이에다 잘 적어서 전해 줄테니까 나를 믿고 얘기하세요."

다른 장기수가 "걱정말고 말씀하시라"는 얘기를 몇 번 하자 할머니는 참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이는 월북자의 아내였다. 면사무소에 다니던 청년에게 시집 가서 애 낳고 살고 있는데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며칠뒤 남편이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자 몸으로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던 어느날 경찰이 찾아왔다. 남편이 월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경찰의 감시가 시작됐다. 잊을만 하면 찾아와서 남편한테서 연락이 오지 않았느냐고 족쳤다. 어떤 땐 경찰서까지 잡혀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애들은 어떻게 하구요?"
"애들이고 뭣이고 사정을 안 봐 줘. 잡혀가서 때리면 맞는 거야."
할머니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세상에, 할머니가 뭔 죄가 있다고, 할머니를 잡아가서 때린대요?"
전후에 태어났고 연좌제의 상처를 겪어보지 않았던 나로선 상상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남편의 월북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은 아내를 감시하고 두들겨 패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냉전시대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국가폭력'이었다.

결국 어린 아이들은 자라지 못한 채 죽었다.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거두지 못하니, 병 들어 죽었다. 홀로 살던 할머니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보려고 몰래 이사를 해보기도 했으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경찰이라고 하면 징글징글 해. 이사를 가도 어떻게 알고 다시 찾아와. 어떤 집주인들은 그걸 알고 방을 빼라고 하기도 하고. 제일 가슴 아픈 건 친척들의 냉대야. 경찰에서 그러니까 친척들도 나를 뱀 보듯 대했거든. 자기 애들 취직하고 하는데 지장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나는 경찰이 언제까지 그렇게 쫓아다녔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경찰이 찾아오지 않은 지가 십 몇 년밖에 안된다고, 환갑이 넘으니까 경찰이 찾아오지 않더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증언은 연좌제가 폐지된 시기와 대체로 일치했다.(연좌제가 폐지된 것은 80년이지만 오랜 세월 쌓인 관행과 기록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80년대 후반까지 연좌제가 적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2000년 9월 17일 MBC가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분단의 너울, 연좌제'는 87년 6공화국 헌법 13조 3항에서 연좌제 폐지를 명문화 해 선포한 것은 5공정부에서도 계속 연좌제가 적용되고 있었음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할머니는 60년대에도 경찰서에 불러간 적이 있는데 그때 남편이 해주에 산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이 잡혔는데 그 사람한테서 남편 얘기가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남편의 이름자를 들고 파주에서 광주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라도 알고 싶어서, 만일 죽었다면 제사라도 한번 지내주고 죽으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할머니의 면전에서 나는 줄줄 울었다. 월북자 남편을 둔 아내에게 국가가 가한 '폭력'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한 여인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이 안타까워서 울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남편의 이름자가 적힌 쪽지를 쥔 채 두려워하는 그녀를 보니 연좌제가 남긴 상처의 깊이를 헤아릴 것 같았다.

한동안 그 할머니를 잊고 지냈는데, 어제 민주당 인천 경선 실황을 보다가 다시 그 할머니 생각을 하게 됐다.
'남로당 선전부장으로서, 전향하지 않고 감옥에서 옥사한 사람의 딸이 영부인이 되면 군의 사기에 지장이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연좌제의 망령'이 되살아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남로당에서 활동하던 시기, 열 살이 채 안된 딸아이가 남로당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오십 년이 지난 후 그 딸의 남편이 '장인의 일'로 공격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이고, 남편에겐 남편의 인생이 있고, 아내에겐 아내의 인생이 있는 법인데, 오십 년전 아내의 아버지가 한 일을 빌미삼아 남편을 공격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온당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식의 발언'이 선거인단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 80년대 초반 캠퍼스에 사복경찰이 상주하던 시절에 대학을 다닌 내가 '레드 컴플렉스'를 완전히 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개표를 기다리는 동안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만일 최고통치자가 된다면 가까스로 트인 통일의 물길을 넓히기가 힘들겠다'는 불안감도 스쳤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연좌제'로 인해 수십 년동안 가위눌린 채 살아온 이들의 가슴에 다시 생채기를 내는 '야만'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