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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이문옥(역사학자 이이화)


BY siren 2002-05-28

나는 이문옥 후보를 친구로 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의 주변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 내 친구들은 학자도 있고 정치가도 있고 사업가도 있고 소설가나 시인들도 있다. 그들 속에는 존경할만한 인물들이 많다. 하지만 이문옥을 늘 첫 손가락으로 꼽는 것은 그가 이 시대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감사관으로 봉직하면서 내부의 비리를 그야말로 시퍼런 군사독재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고발하였고 마침내 그가 내부 고발자로 밝혀져 이른바 문초를 받았다. 그 때에 내가 먼저 은근히 캥겼다. 혹시라도 그가 부정한 짓을 하지나 않았을지, 털끝만큼이나 부정축재의 혐의를 쓰지나 않을지, 내딴에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 않던가? 그런데 털고 털어도 나올 것이 없었다. 감사관 생활 30여년에 겨우 24평짜리 아파트 한 채, 그것도 융자를 받아서 마련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감사관 생활을 할 적에 서민들은 상상도 못할 향응을 받고 두툼한 봉투를 은밀하게 전달받고 좀 더 큰 건(?)이라면 빅딜도 가능하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그래서 친구들이 만나, 검사 판사 그리고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 근무한다면 “아, 권력 휘두르고 돈도 듬뿍 벌었겠군”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면 상대는 빙그레 웃었다. 감사관도 그런 요직에 들었다. 그런데 50대 나이에 저 변두리 24평짜리 아파트에 산다니 두근거리던 내 가슴이 조용해졌다.


이문옥은 천성이 겸손하다. 내가 어쩌다 그를 만나 “장한 일 했어”라고 말하면 뭘 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금 솔직히 말해 그가 한겨레신문에 내부 비리를 터뜨렸을 때 그 장본인이 이문옥이라는 사실을 알고 불평을 늘어놓는 주위의 친구도 있었다. 노태우정권 아래에서 조금 유화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 동창들이 한창 고위 공직자에 오를 나이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이문옥과 동창이라는 이유 때문에 떨려날까 걱정을 하였다. 실제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이런 분위기와 상관이 없어서인지 그를 열심히 변호하였다. 그리고 예전 역사에 나타난 청백리라고도 말하였다. 우리 나라를 망친 자들은 민씨 세도를 비롯한 부정부패 세력인데 그 타파의 일선에 선 인물이 이문옥이라고 옹호하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를 껄끄럽게 여기는 동창들은 버젓이 일류 대학을 나오고 정상적으로 각종 고시에 합격하고 이 사회에서 출세가 탄탄하게 보장된 자들이었다. 부정을 해서 돈을 벌건, 줄을 대서 권력을 누리건 더 큰 영달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문옥은 호남에서 명문으로 꼽는 광주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이 학교의 입학생은 대체로 전라도 지주나 자산가 아들들이 입학하였다. 이문옥은 지주 아들이 아닌 모양이다. 그가 대학을 가지 않고 먼저 4급 공무원에 합격을 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가 고시 공부를 왜 하지 않았을까, 그도 짐작이 간다. 언제 조용하게 산 속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얻어먹고 공부할 시간이 있었겠나.


가난하게 큰 사람은 두 가지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라 한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 하나는 내가 가난하게 자라면서 부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니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산다는 것이다. 이문옥은 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아무튼 부정부패는 인류 역사가 전개된 이후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였다. 이는 이데올로기와 상관이 없는 원초적 행위였으며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와도 관련이 없는 단순한 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를 척결하지 않으면 정치와 사회가 맑아지지 않고 기본 질서가 흔들리며 능력이 배제되고 양심있는 인재가 좌절하고 만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도 깨끗한 공직자를 청백리라고 하여 기리며 그 자손에게도 여러 혜택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청백리의 표본으로 황희나 맹사성같은 정승을 꼽아 그 일화가 민중의 입으로 전해진다. 또 공직자의 부정을 캐기 위해 암행어사를 보내 수령들의 감시하거나 부정을 캐냈다. 암행어사도 부정을 일삼았는데 박문수는 조금의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척결하였기에 박문수를 암행어사의 한 표본으로 여긴다. 현대의 어느 정권도 부정부패가 만연하면 그 기반이 흔들린다. 이문옥은 현대판 청백리 또는 깨끗한 암행어사의 한 표상으로 우뚝 서 있다.


자, 작심하고 막걸리 한 잔 먹고 진솔하게 쓸려고 하였더니 너스레가 길어졌다. 다른 말로 옮겨가자. 그를 정치판에 끌어들인 것은 광주 시민이었다. 그때 광주 민주인사들은 서러운 삶을 살았다. 야당 국회의원 신기하는 변호사 출신인데 변호사 시절에는 민주운동을 한 투사들의 변호를 기피하고도 자신이 다 한 것처럼 떠벌이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국정보다 엉뚱한 짓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광주의 민주투사인 조아라 안진오 이상식, 그리고 오종렬 지선 등 종교계 학계 인사들은 신기하의원을 공천에서 제외해달라고 공식 요청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를 외면하였다. 시민대표들은 시민후보를 물색한 끝에 김중배(현 문화방송 사장)와 이문옥을 떠올렸고 마침내 이문옥을 후보로 결정하였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아주 뜰떴다. 시민후보는 정당 공천이 아니니 그는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


‘92년의 일이다. 마침 부산에서는 노무현후보가 야당인 민주(?)당으로 입후보하였다. 나는 두 사람을 당선시킨다면 지역갈등을 해소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된다는 판단하였다. 나는 이를 깨기 위해 <한국의 파벌> 따위의 책을 써서 주장을 폈지만 하나의 메아리로 그쳐 현실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문옥과 노무현이 당선되면 지역갈등을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나는 이문옥을 돕기 위해 주변에서 돈을 모았다. 당시 나는 성심여자대학(현 카톨릭대학교)에 출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학 교수와 강사들에게 모금을 하였다. 유승원 안병욱 박종기 이순근 등 교수들과 여러 강사들이 성금을 내주었다. 또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는데 서중석 부소장, 장두환 역사비평 발행인, 김동춘 윤해동 등 연구원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최소 만원, 최고 몇 10만원씩을 지원 받았다. 이들은 전혀 이의를 달지 않고 성금을 내주었다.


이 돈 2백 몇 십만을 들고 광주로 내려가니 열기가 확 달아올랐다. 나는 이문옥 부부가 거처하는 허름한 여관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꼬박 1주일 동안 선거운동에 나섰다. 계림국민학교에서 찬조 연설에도 나섰다. 오직 부정부패를 척결할 인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 벌인 선거운동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말하지만 정치 혐오증에 걸린 사람이다. 좋은 정치를 바라다가 좌절한 사람이 가지기 쉬운 증상이다.



아무튼 그에게 광주와 전국의 시민들이 작은 섬금을 보내주었고 미국 동포들도 몇 천 달러를 보내 격려하였다. 하지만 어림없는 선거자금이었다. 민주시민들과 학생들은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차비하고 밥 사먹었다. 마지막 일주일 앞까지 이문옥의 승리는 확실하게 보였다. 그런데 광주에는 김대중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신기하를 공식 거명하고 부산에서도 김영삼이 같은 소리를 하고 바람을 몰고 지나갔다. 이것으로 판세는 끝이 났다. 나는 결과를 보지 않고 올라왔다.



그 뒤 월간 <신동아>에서 수필 하나를 써달라기에 <이문옥과 노무현>이라는 수필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써주었다. 그 뒤 이문옥은 나의 우거(寓居)를 찾아왔다. 그는 반민주적 행태를 보이는 김대중을 깨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에게 동참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나는 역사를 쓸 일이 남아 있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그가 <부패방지법>을 관철키 위해 띠를 두르고 거리마다 다니면서 다시 동참을 요청하였으나 나는 서명을 해주는 것으로 도피하였다. 그는 이 시대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온 몸으로 뛰는 정열가였다.


나는 마무리 말을 해야겠다. 그가 민주노동당 부총재가 되었을 때 나는 조금 우려하였다. 나는 정서로는 민주노동당의 정강에 동조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 민주노동당은 발붙일 토양이 거의 없다. 아직 분단구조에서 “덫 칠”하는 보수세력의 작란을 민중들은 현혹되기 일쑤이다. 우리는 이를 극복하는 길은 우선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왜곡된 언론과 맞서고 역대 독재정권에 빌붙어 온갖 이권을 누려온 기득권세력의 금권을 차단하는 일이다.


이제 소박하나마 이 두 가지 기본 축을 깨뜨릴 여건이 조성되었다. 노무현이 뜬 배경은 사회변화와 변화를 갈구하는 시민의식에 그 토대를 두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다. 진보 보수나 좌파 우파의 논쟁보다 더욱 심각한 과제는 여러 분야에서 자행되는 부정부패와 원초적 지역 갈등과 혈연 학연일 것이다. 이문옥은 부정부패 척결의 기수이며 혈연 학연을 타파할 수 있는 의식과 행동을 줄기차게 보여 주었다. 정약용은 부정부패는 나라와 사회를 망치는 근본으로 보았으며 신채호는 이를 결국 일본에게 먹히는 가장 주요한 요소로 보았다.


김대중정권도 최규선(?)게이트로 일컬어지는 부패 스캔들로 말기를 장식하고 있지 않는가? 대통령의 주변 인물만이 아니라 아들들까지 관련되어 국민들은 온통 분노하고 한탄하고 있다. 아무리 다른 공을 세워도 부패를 막지 못하면 도루묵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이문옥, 우리 이 시대의 대안이다. 내 감히 말하거니와 그가 서울 시장으로 선출된다면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표본이 될 것이며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것이다. 서울 시민들 사람을 알아봅시다. 서울 시민 여러분, 이문옥 후보가 서울 시장으로 뽑히는 날, 나는 시장에게 할당된 판공비에서 지불한, 소주 한 병을 곁들인 합계 만원 짜리 청진동 해장국을 얻어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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