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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년 여름에도 약속 꼭 지킬게요..


BY 나쁜새댁 2009-08-27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만에 내려간 고향은 이렇게 작은 동네였나 싶을 정도로

건물들도 나즈막하고 사람들도 조용하고 한적한 모습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십니다.

이토록 오랫만에 내려온 딸내미가 밉지도 않은지

몇일 전 술에 취해 보고싶다며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만 보내달라던 아빠는 마냥 방실방실입니다.

감정 표현에 서툰 엄마도 왜 이렇게 살이 쪘냐는 투박한 말 뒤에도 뭘 자꾸 먹이려 하시네요.

뭐 얼마나 좋은 회사 다니는 딸이라고, 뭐 얼마나 큰 돈 버는 딸이라고

그 사이 아빠는 가게 일을 도우시는 이모님들께 팔불출마냥 딸 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맞벌이로 집에 혼자인 시간이 많아 독립 후에도 부모님 품 크게 그리워하지 않으며 잘 적응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요즘은 명절 때나 내려가는 고향입니다.

잔정 없이 지금도 엄마 아빠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닥 하지 않고 사는데도 독한 딸인데도

오랫만에 느끼는 부모님 품이 참, 한없이도 따뜻하더군요.

 

 

 

그리고 모처럼 여행을 떠났습니다.

직업군인으로 일하는 동생과 저, 그리고 엄마 아빠..

정말 오랫만에 네 식구만의 여행이었네요.

 

고등학교 때 한차례 부도로 크게 힘들었던 우리 가족,

이렇게 우리 식구 넷이 여행을 떠나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한번 모시고 여행을 가긴 했는데,

아직 사위가 어려우신 지 편해하시진 않으시더군요 ㅎㅎ

 

그래서 이번 여름엔 우리 네 식구의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어느새 훌쩍 자란 동생이 운전을 하고 아빠는 내내 잔소리를 합니다.

엄마는 내 선글라스까지 뺏어 끼고 연예인마냥 창문을 열어 부는 바람에 머리를 내어놓습니다.

 

친구들끼리는 이제 지겨워서 안 간다는 안면도.

엄마는 그 곳을 한번도 못가봤다고 했습니다.

그 곳에 네 식구가 도착했습니다.

 

 

내게는 이제는 너무 흔한, 예쁜 인테리어의 팬션..

파도 치는 바다.. 갯벌에서 조개 캐는 사람들..

처음 가 본 안면도 정취에 엄마는 너무 신나합니다.

 

바다에 처음 발을 담궈본 아이처럼 파도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네요.

젖은 발에 모래 묻지 않도록 엄마를 업어주는 다 커버린 아들의 등이 너무 넓다며

갓 연애를 시작한 여인처럼 수줍은 듯 웃기도 하십니다.

카메라를 가져다 대자 양쪽 볼에 입맞추는 아빠와 남동생의 애정공세에

세상 더 부러울 것 없는 표정이 일품입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처음봤다며 까만 인화지에 사진이 피어날 때까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신기해 하십니다.

 

조개를 구워주는 절 보며,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냐며 너무 맛있게 드십니다.

맥주를 기울이며 행복이 절로 묻어나는 웃음꽃이 얼굴 가득 피어납니다.

매번 동생이 담배 피는 것을 볼 때마다 욕을 마다 않던 엄마인지라

기분 좋은 술자리 중 담배 냄새 베어 들어온 동생에겐 "그것 좀 피지 말래두.."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순 없었나봅니다.

실없이 장난치는 동생과 저를 보며

이런 저런 문제로 친척들과도 마음앓이를 해야했던 지난 시간이 생각났는지

"그래, 너희는 평생 그렇게 우애있게 살면 좋겠다.." 뒷말을 흐리기도 합니다.

적잖이 술에 취한 엄마를 아빠랑 예쁜 방에서 같이 자라며 밀어넣어도

끝까지 아들내미, 딸내미랑 같이 자보자며 다 큰 자식들을 부둥켜 안고 놓지를 않습니다.

 

여행 내내 아이와 엄마와 여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엄마의 모습이

우리 가족 모두를 낯설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했네요..

 

 

돌아오는 길을 아쉬워하며 해변이 보일 때마다 차를 세워

피곤에 절은 가족들을 뒤로 발 한번씩은 꼭 담궈보는 엄마를 보며

아빠가 한 마디하십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살면서 한 번을 못 데려왔네.."

 

그러게요..

저렇게 좋아하시는 걸..

친구들과 여행은 가도 엄마랑은 한 번을 못했네요..

잘 찍은 한 폭 사진처럼

바다에 진 일몰 가운데 웃고 있는 엄마 모습이 너무 시립니다.

가슴이 먹먹해 순간 눈물을 쏟을 뻔도 했어요..

 

늘,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좋은 곳 많이 돌아다니고, 좋은 것 많이 보고 살라던 엄마..

엄마가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보상이었음을

우둔한 딸은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론 알지 못했나봅니다.

미리 알았다면 일년에 1박 2일이 그렇게나 어려웠을까요..

 

이제 종종 엄마를 모셔봐야겠어요

때론 신랑 데리고 풍성하게..때론 모녀 둘이 오붓하게..때론 이번처럼 우리 네 식구 단촐하게..

 

휴가를 마치고 일터로 돌아온 저에게 걸려온 엄마 전화..

수화기 넘어 엄마의 목소리가 하루새 그리움에 차있습니다.

 

 

참 독하게도 "엄마, 보고싶어~"라는 말 한마디 없이 통화하던 딸이

오늘은 그 말을 입에 내어봅니다.

지금 혼자 한 약속, 저 잘 지킬 수 있겠죠?

 

 

지금의 약속을 지킬 내년 여름을 그리면서

엄마처럼 또 열심히,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