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이상,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자--
공자(BC 551~ BC 479) 노나라.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유교의 개조.
공부자라고도 한다.본명은 공구.자는 중니.
그의 평범한 생애에 비해 수천 년 간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최근 들어 서양권에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그의 성품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자기 운명을 개척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심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는데,인간이 취해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미관말직에서부터 재상에 이르렀지만,너무 혼란한 시대에 분개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제국을 돌며 덕치주의를 외쳤으나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자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데 여생을 바친 그였으나 ,
사후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꽃피게 되고,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브리태니커,위키백과)
난 초등학교 때 부모님들께서 이혼을 하시고 ,바로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의욕은 없었을지언정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었는데,
파경을 맞게 되면서 두 번이나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가 망신만 당한 채 실패하고 말았더랬다.
그리고도 한참을 우울했고,힘들었지만,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생각을 고쳐 먹게 됐고,쉬지 않고 뭐라도 하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희망이 싹트고,자존감을 찾게 됐으며,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됐고 ,그러면서 행복하단 생각을 하게까지 됐다.
내 평생 처음 느껴 보는 이런 기분을 정상에서 느낀 것이 아니라 깊은 고통의 늪 속에서 느끼게 되다니...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리곤 조심조심 위로 올라오면서 참 많은 길들을 보게 됐고,그 길들을 차근차근 섭렵하며 오늘도 조금 올라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그리도 쫓아다닐 땐 안 잡히던 돈이란 놈도 ,무관심해지니까 알아서 들러붙는다.
자그마하나마 목좋은 가게도 하나씩 두 개나 장만했고,그 중 한 가게에서 장사도 하고 의식주도 해결하면서 살고 있었는데,어제 집도 하나 장만했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텃밭이 있고 마당이 있는 집,집 바로 뒤에 동산에 꾸민 공원이 있고,집 앞의 하천변엔 산책로와 천변도로도 있다.
자신이 없어서 아예 생각도 없는 것처럼 말해왔지만,늘 꿈꿔왔던 그런 집이었는데,100평에 가까운 내 땅과 집이 생겼다.
그래도 역시 빚은 땡전 한 푼도 없으니, 2~3년만 열심히 벌면 캠핑카 꾸며서 방랑하다 힘들면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집까지 생긴 것이다.
열심히 일하지도 않았는데,많이 벌지도 못했는데,쉬지 않고,멈추지 않고 꾸준히 뭔가를 추구하며 살다 보니 기적처럼 생긴 일들이다.
누구보다 사랑했고,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했던 가죽들과 헤어지면서 정말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절망했지만,
거듭 두 번이나 자살시도를 했음에도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운명을 저주하고 맥을 놓은 채 1년 여를 보냈지만,
'시간'이란 의사가 이제 그만 쉬고 나서서 뭐라도 해 보라고 권했고,주변을 정리도 하고 ,남은 것들을 챙겨 길을 찾아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걸 잃는 대신 내겐 소중한 자유와 자아가 온전히 내 것으로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자유를 근사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50여 년 간 혹사만 시켜오고 사랑해주지 못 했던 '나'란 친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수완을 발휘해 20여 년 간 꿈꿔오던 목 좋은 자리의 가게도 손에 넣게 됐고,그러면서 생긴 여유를 조금씩 사회활동에 쓰게 됐다.
사회운동도 하고, 후원도 하고, 기부도 열심히 했다.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고,몸이 편해지면 잡념이 많이 샌긴다는 걸 알게 돼서 일상생활 자체를 빠듯하게 짜서 충실히 실천하며 살았다.
그런 나를 보고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를 해오기도 했지만,더는 돈 버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고사했고,쉬엄쉬엄 일을 했는데,
너무 빠듯해서 돈을 쓸 시간이 없었고,그러다 보니 5년 여 만에 또 다시 꿈에 그리던 내 땅과 집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인들은 서둘러도 너무 서두르다 다 빼앗기고 놓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분수껏 살면서 희망의 싹을 조금씩이라도 쉬지 않고 키워가라고 강조를 해 왔지만,이미 돈의 노예가 돼 있고 빚의 올가미에 갇힌 그들에겐 공염불이었을까?
아직 내 말을 듣고 실천해서 희망을 갖게 됐다는 사람은 만나볼 수가 없었다.
내 동생 중 한 친구도 열심히 사업을 해서 얼마간의 여유를 찾았지만,여전히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느라 벅차게만 산다.
그리곤 나더러 조금은 분에 넘치게도 살라고 권유를 해 오지만,난 누구보다 내 분수를 잘 알기에 검소하게 살고 있고,
그러다보니 별 것도 아닌 것들로 노후대책까지를 완벽하리 만치 하게 됐다.
이젠 건강관리나 잘 하면서 ,4년 전에 평생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우리 사회의 암적인 존재인 친일매국노들의 잘못을 부각시키고,
왜 그들을 척결해야 하는지를 알리며 전국을 돌고 또 돌다가 노상객사를 하는 일만 남았다.
빚이란 걸 병적으로 싫어하고,분수껏 사는 걸 부끄러워 해 본 적 없으며,비교 우위를 느끼고 싶다거나 체면치레를 해야 한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가능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남들이 하니 나도 당장 빚을 내서라도 해 봐야 직성이 풀리고,
그렇게 빚의 올가미에 걸려들면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고,잘 해야 빚이나 갚다가 죽을 수 있을 뿐인데,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 괜찮단다.헐~
그런 괜찮은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왜 행복하진 못하다고 아우성을 쳐대는 것일까?
궁궐같은 집에서 살고,세단을 몰고 다니며,명품 옷을 걸치고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서둘러서 남들이 하는 걸 하게 되면 만족감보단 불안감이 커지게 되고,그게 지속되면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짜증이 나고 불안하며 두렵기까지 한 인생은 아무 걱정없이 사는 금수들의 삶보다 나을 게 없잖은가?
그런 마당에 무슨 만물의 영장이 어떻고 ,저떻고를 나불댄단 말인가?
위의 공자의 말씀처럼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다.
순간순간을 얼마나 인간적으로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인간적이랄 수 있을텐데,하나같이 남들의 시선에 의해 살아지는 삶을 산다.
이러면 남들이 흉을 봐서 안 되고,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남의 눈에 들도록 살아야 한다?헐~
오늘 한 지인으로부터 한 중국인의 이야길 듣고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자긴 한국에서 열심히 벌고 모아서 중국 가면 잘 살 수 있는데,한국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돼 있어서 ,한국이 좋긴 하지만 한국엔 살고 싶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한국인들은 100만 원을 벌면 200만 원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듯 사는데,그 이유를 모르겠는데,한국인들은 다 그런 거라고 한단다.
그리곤 만날 쪼들리고 헉헉대며 살다가 망하곤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전언이었는데,하도 적확해서 그 중국 사람은 분석학을 전공한 사람인가 했다.
외국인의 눈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아도 보이는 단점들이 ,우리들 한국인들의 눈엔 띄지 않는 것일까?
아니 나도 그렇고 더러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맞을 게다.
최악이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야 할 때다.
조금 누추하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분수껏 살면 바로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제발 분수껏들 좀 살면서 희망을 갖고 그것을 키워가며 살아가자.
당장 행복해질 것이고,그러면 속도가 그닥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며 ,온전한 내것이 하나씩 생길 것이다.
그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가는 재미도 쏠쏠하고,가진 것들을 조금씩 키워가는 것도 아주 상쾌한 기분을 안겨준다.
거기에 나누는 재미까지 알게 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제발 서둘지 말고,분수껏 살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이뤄가며 살자!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걸 뻔히 보면서도 ,그러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한심하지도 않은가?
그 대열에 끼어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렇거든 얼른 발을 빼고 정도를 걸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