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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BY 미개인 2016-08-24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그것은 다른 어떠한 관계와도 같지 않다.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우려를 넘는다.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지속적이고 비통함과 실망을 초월한다.

                   --제임스 E.파우스트--

 

제임스 E.파우스트(1920~2007) 미국.특수단체인(?) 

예수 그리스도교회 회장.브리검영 대학교 이사.교회 교육위원회 부의장(인물백과)

 

나는 스무 살 무렵,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전집류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이었다.

내성적인 데다 수줍음 많은 내가 세일즈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이 사실 나도 신기하기만 한데,세일즈 고수의 말발에 속아서 시작하게 됐고,

결국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기본을 돈 벌며 배우게 된 계기도 됐고,성격까지 얼마간 바람직한 쪽으로 바꾸게 됐으며,

사회를 날로 배울 수 있었고,무엇보다 남들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할 자신감을 얻었다는 등의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될 많은 걸 얻게 됐다.

기본급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최악의 조건이었음에도 ,남들 앞에서 말을 하려면 더듬더듬거리던 내가 도전을 하게 됐고,

선배들로부터 비법(?)을 전수 받은 후 ,한 선배를 따라 필드에 나갔다가 자신감을 얻어 돌아왔고,

선배들을 더 따라다니며 배우라는 걸 마다하고 

다음날부터 생판 모르는 동네에 뛰어들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들기고 들어가 전날까지 외워둔 카다로그의 문구들을 반복했다.

그런데 그 첫 날,오더를 두 건 작성했고,돌아오는 길에서 펄쩍펄쩍 뛰다가 논두렁에 빠져 무릎까지 흙 범벅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상사가 지어준 별명이 굴삭기의 대명사인 '불도우저'였다.

그도 내가 해낼 줄은 몰랐다며 대견해 해줬고,정말 물불 안 가리고 개발에 땀나듯 뛰어다니며 인정을 받게 됐다.

 

그런데 얼마간 익숙해지자 꾀가 나기 시작했고,좀 놀다가 나가서 좀 뛰면 실적을 올릴 수 있다는 타성에 젖게 됐고,

사무실에 출근만 하고 필드에 나간다며 나와선 음악다방이나 당구장을 전전하며 놀다가 퇴근을 하곤 하는 게 일과가 돼 있었다.

기본급도 안 나오는 직장인데,매일 활동비도 가불 형식으로 받는 것이 다였는데,그걸 쓰기만 하고 벌진 않았으니...

방 한 칸 얻어서 살았던 나는 방세까지 밀리기 시작했고,독촉을 받다받다 견디지 못하고 부모님을 찾아 뵙고 ,사고를 쳐서 그렇다며 얼마간의 도움을 청했었다.

그 때 아버님께서 화를 벌컥 내시며

 "내가 너에게 10만 원을 주면 네가 10만 원어치 못쓰게 되고,100만 원을 주면 100만 원어치 못쓰게 되는데,내가 한 푼이라도 줄 것 같으냐?"고 호통을 치시고 ,

정말 돌아올 차비도 안 주셨더랬다.

그때 ,죽을 때까지 다신 아버지를 안 찾겠다며 이를 박박 갈았었는데...

 

어랏?한량처럼 놀고 먹던 세일즈맨을 그만 두고 공돌이로 취직을 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냉정하게 나를 돌려 보낸 것이 그 때의 상황으로선 내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다니...

하지만 거의 30여 년을 고맙다고,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다가 ,파경을 맞고 명절에 찾아 뵌 자리에서 절을 하고 포옹을 하면서 비로소 했다.

사랑한다고,고맙다고...

참으로 원망도 많이 했고,비난도 많이 했었지만,이젠 안다.

우리  아버지께서 풍족한 삶을 보장해주시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독립적 삶을 살 수 있게 됐고,이 정도로 자수성가라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아버지께서 도박을 하시고,어머니와 이혼을 하셨기에 내가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20년 가까이 헌신적인 사랑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도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어 보여주시고 계셔서 내가 더욱 반듯하게 살려 애쓰게 됐다는 것을...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생각되는 행동을 하셔도  이젠 비난을 하거나 원망을 하진 않는다.

가끔 너무나도 막가는 발언을 하시면 언쟁을 하긴 하지만 끝엔 반드시 고마워 하고 사랑하며 끝을 맺는다.

내가 부모가 돼 보니 ,애지중지 자라오신 아버지가 저러시는 건 어쩌면 조부모님 탓일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당신께선 내가 당신을 닮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셔서 저리도 철저하게 망가진 삶을 사시는 것은 아닐까 싶어 미안하고 측은해지기도 한다.

 

나도 내 두 딸의 어머니와 이혼을 했고,끝까지 알아서 기며 꾸준히 지원도 하고 용돈도 줘야 했는데 주지 않아 왔다.

직접 만나서 주는 것도 아니고,나를 만나는 것도 싫어하면서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을 시켜주는 용돈은 낼름낼름 받아먹는게 아니다 싶어 끊은 것이었다.

사업 상 가끔 만나던 아이들의 이모가 아이들 용돈 좀 계속 주라고 요구했지만,녀석들이 직접 필요하다고 요구하거나 와서 타가라고 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러지 않았고,5년?6년?잘 모르겠다,여튼 그 정도를 서로 연락도 안 하고 있지만,

글쎄,녀석들이야 어쩔지 모르지만,나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녀석들에게 원만한 부모상을 보여주지 못한 것과 ,

원래의 꿈이었던 여행작가의 꿈을 편안하게 이룰 수 있는 지원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 하고 있다.

지원을 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원한다며 사회인으로 나섰는데,내가 그래 봐서 그 기분을 아니 응원만 할 뿐이다.

그리고 큰 딸과 약속한 것처럼 언젠가 녀석들이 "아버지!"하고 찾을 때가 오면 멋있게 쨘~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애를 쓰면서 살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의무감이나 약속에의 부담 때문이면 참 고역일텐데,애를 쓰면 쓸수록 정신도 맑아지고,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다행히 건너건너 들리는 바로는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지만,지금은 아닌 걸로 알고 있고,이젠 녀석들도 모두 사회인이 돼서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 한결 편하다.

 

이제 나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녀석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아서 ,

언젠가 비통함에 빠지거나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켜 외면을 당하더라도 변함없이 버텨줄 일만 남은 것 같다.

다행히 내 생전에 승승장구만 하면 좋겠지만, 무의식적으로 내 전철을 밟고 있는 녀석들이라고 봤을 때,분명 위기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악담을 하잔 것이 아니라 기쁘기만 한 인생도 없고,슬프기만 한 인생도 없다고 봤을 때,

그리고 어떤 강사의 말처럼 인생은 시계추처럼 좋은 쪽에서 나쁜쪽으로,또 나쁜 쪽에서 좋은 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라고 나도 공감하기에...

기쁠 때야 굳이 나설 필요가 없겠지만,슬플 때면 슬쩍 손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고 품어줄 것이다.

두 딸들을 생각하면 늘 안타깝고 미안하고 간절하다.

부디,나를 반면교사 삼아 ,내가 나의 아버지보다 조금 진화 했듯,나의 딸들도 나보단 훨씬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어떤 물고기인가는 알인가 새끼를 낳고 나면 자신의 몸을 뜯어먹고 살게 한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많이 갖지 못해 물려주기까지 할 것도 없겠지만,만일 가지고 죽게 되더라도  녀석들에게 물려주진 않을 것이고,

대신 나의 인격을 비난하고,비판하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 애쓰는 삶을 살아주길 바란다.

나도 녀석들이 울궈먹고 또 울궈먹어도 또 울궈 먹을 게 있도록 여생을 인격도야에 힘쓸 것이고,

나의 딸들이 살아주길 바라는 방향의 삶을 살아 보이려 애쓰길 그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