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오랜 시간을 생각했다.
26살에 결혼하여 지금 내 나이가 벌써 38살.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이젠 이미 세상을 버린 내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내 지난 결혼생활에 대한 후회가 교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담담히 여기에 그동안의 내 설움을 털어놓으려 한다.
지금까지 며느리로 살아온 내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서글펐는지는 읽는 이가 판단해주리라.
<함 들어오는 날>
가난하지만 착하게만 살아오신 내 아버지, 8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우리집에 새로 오신 새어머니, 남동생 셋. 가난한 집 장녀로 태어난 나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데다 계모와 함께 사는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사내연애(그당시 나는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로 명문대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님께서는 우리집이 보잘것 없다고, 남편도 모르게 날 홀연히 부르시어 자그마한 가방 하나를 내주셨다.
함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 사주단자 다 들었고, 약간의 옷감과 패물이 들었다고 나더러 혼자 집에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남편도 모르게 함을 가져가는 것이 의아하여 여쭈었더니, 볼 것 없는 집안에 번거롭게 갸(남편) 친구들까지 가게 할 수 없다는 말씀.
민망하여 가방을 들고 처연히 일어서는 데, 마침 함께 있던 시댁어른이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함께 가주마 따라나서셨다.
애써 눈물을 감추며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한번 서글픈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그 분께서는 날 생각하신답시고, 시어머니의 심중을 말씀하셨는데....
결혼후에 전업주부로 들어앉을 내가, 당신 아들이 뼈빠지게 번 돈을 가난한 친정으로 빼돌릴까 무척 우려하고 계시다는 말씀.
하늘이 무너지듯 괴로와 함가방 풀썩 내려놓고, 문잠그고 이불 뒤집어쓴채 숨죽여 밤새 울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함속에 든 내용물. 동대문시장정도에서 아무렇게나 끊어 넣음직한 싸구려 천 몇가지와 세트도 없이 달랑 하나 뿐인 다이아반지. 한복공임은 아예 넣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그 가방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 쉬셨다.
<시집살이에서 처음으로 친정부모 모신 날>
아이낳고 백일을 치루도록 친정부모를 한번도 집에 모시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눈치도 무서웠고, 우리 친정을 무슨 벌레보듯 하는 따가움도 어려워서였다.
그래도 한번은 내손으로 지은 밥 대접하고 싶어, 어렵게 시어머니께 청을 하여 친정부모님을 집으로 모셨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께서 마지못해 허락은 하셨는데, 번거롭게 음식 장만하지 말고 중국집에서 요리 몇가지 시켜 대접하라셨다.
나는 단지 우리 친정식구를 오게해주신 것만도 고마워서, 분부에 따랐다.
우리 부모님께서 드디어 나 사는 집에 오셨다. 결혼 후 2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나는 너무도 기뻤고, 우리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우리 집에 들어오셨다.
별 신통한 대화없이 어색하게 있는데, 시켜온 중국음식이 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당신은 속이 불편하여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 두분 편하게 드시라면서 시어머님께서는 음식이 오자마자 바로 문닫고 당신 방으로 들어가시는 게 아닌가.
그렇지않아도 어색하여 어쩔 줄 모르던 우리 친정부모님은 결국 몇 수저 뜨시지도 못하고 서둘러 돌아가셨다.
놀라운 일은 바로 그 다음에 벌어졌다.
우리 친정부모님이 가시자마자 바로 방에서 나오신 시어머님은 마치 게걸들린 사람처럼 거의 손대지 않은 요리들을 허겁지겁드시는 게 아닌가.
세가지 정도의 요리를 시켰던 것 같은데, 바닥에 퍼질러앉아 거의 굶은 사람마냥 드시는 시어머니를 보며 내 가슴은 다시한번 무너졌다.
그 일 이후 우리 친정부모님은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워하셨는데, 발길은 커녕 전화 한 통 제대로 나에게 못하셨다.
<분가를 결심한 결정적인 사건>
나는 그렇게 6년 가량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내가 사는 집엔 우리 친정식구들 그 누구도 전화 한통 하지 않았다. 내가 하기 전 까지는.
나역시도 친정에 돈 빼돌린다는 그 말이 맺혀, 특별한 일이 없을 땐 전화도 삼갔고, 1년에 2번 (설날, 추석) 잠시 들러 점심한끼씩만 먹고 왔다.
친정이 멀어서였을까? 천만에.... 시댁에서 차로 20분 거리. 그야말로 왕복 1시간도 안되는 거리.
내가 명절에 친정에 가려하면 늘 내 뒷통수에 대고 그러셨다. 당신은 친정에 가서 궁둥이 한번 제대로 붙여본 적 없이 그야말로 없는 듯이 사셨노라고. 명절이라고 굳이 가야할 이유가 뭐냐시면서......
그래도 내 아버지 얼굴, 내 동생 얼굴 그리워 그 따가운 소리를 들으면서도 친정에 잠시 잠깐이나마 다녀왔었다. 돌아오는 길엔 눈물범벅이 되곤 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래도 내 시어머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잘해드리려 애썼다.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다보면 좋은 날 있으리라 믿으며.
시어머님도 그런 나의 충정을 아셨다. 언제나 남앞에서는 딸같다느니..... 내 살같다느니.....
내가 착각한 것이 있다면, 나는 내가 그렇게 시어머님께 잘하면 그분도 어느 때는 감동하여 나도 며느리이기에 앞서 딸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날. 기억하기도 쓸쓸하다.
시어머님께서 친구분을 만나러가신다기에 차로 모셔다드리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다급한 목소리로 친정아버지께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장롱위에 올려둔 것을 꺼내려 의자위에 올라섰다가 낙상하셨는데, 다리가 부러졌는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데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당신을 병원에 좀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친정 새어머님께선 출타중이셨고, 집에 혼자 계시다가 그런 변을 당하셨는데, 집이 외진 곳에 있던 터라 택시잡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때 당시는 택시는 커녕,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여서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전화도 내게 하신 모양이었다.
난 당연히 시어머님께서 보내주시리라 믿고, 아버지께 조금만 기다리시라며 전화를 끊고 시어머님께 말씀드렸다.
그랬는데.....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신 친구 만나러 나가는 데 날 바래다줘야지, 무슨 친정을 가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친정은 왜 시집와서 잘살고 있는 딸을 허구헌날 못 불러대서 안달이냐는 거냐며, 역시 없는 집안은 할 수 없다는 .......
그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6년 동안 내가 시어머님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그 순간 너무도 허망하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난 결국 아버지께 가지 못했다. 그때 당시 이미 고혈압이 심하셨던 내 아버지는 방향감각에 문제가 있으셨던 거고, 그 충격에서였는지 얼마 뒤 뇌출혈이 되어 아예 응급실로 실려가셨고, 그렇게 약 1년을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끝내 친정아버지께 내손으로 따뜻한 밥 한번 제대로 지어드리지 못한 채 아버지를 여의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더 ......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노라고. 내가 당신 어머니에게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듯, 난 내 아버지에게는 하나뿐인 딸인 것도 사실이라고.
여자는 시집가면 딸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하는 거냐며, 나는 남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리고 분가를 하든, 이혼을 하든 결정하라고 했다.
정말 더 이상은 그런 분을 한 가족으로 생각하며 섬기며 살 수없었던 것이다.
자기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도 그러하거늘, 오직 당신 몸 하나 편한 거 외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지나친 이기심이 나를 상처주었다.
.......
나는 여자로 사는 삶에, 특히 며느리라는 짐을 진 여자에게 과연 21세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싶다.
우리가 구닥다리라고 업신여기는 조선시대. 며느리가 그 당시 노비들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나는 지금도 왜 내가 그때 그렇게 참기만하고 언젠가는 좋은 날 오겠지란 헛된 꿈을 꾸고 살았나 후회한다.
내 아버지 묘소에 갈 적마다, 난 끊임없이 솟아나는 내 설움의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난 지금 시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그 삶의 한가운데에 다시 서고 싶지 않다.
물론 내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절대로 내가 겪은 이 서글픈 사연을 내 며느리에게까지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내 며느리를 내 아들의 소중한 사람으로만 대접해줄 것이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그 며느리 또한 다른 부모에겐 너무 소중한 딸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고 대할 것이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