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온 지 두 달여 만에 드디어 남편이 아파 쓰러졌다.
이미 예상은 한 일이었지만 3일 내내 잠도 못 자고 밥 한술 떠넘기지 못하고 누워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니 왜 이리 화가 나는지...
처음부터 외국에 나오는 것을 반대했던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기면 무조건 "그러게 여기 오지 말자고 했잖아."라는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목이 콱콱 막히던 차에 저렇게 몸살까지 얻어서 나를 고생시키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는 남편이 결코 예뻐 보이지 않았다.
모든 동화는 결혼하자마자 끝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집안 일은 여자들 담당으로 정해있는 알 수 없는 고정 관념 덕에 결혼하자마자 제사니, 집안 식구 생일이니 조카 100일 잔치 할 것 없이 시간이 어찌 지나가는지 모르고 보냈는데 외국에 나와 시누이 댁에 얹혀 사는 처지인 만큼 더더욱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 모든 걸 두고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라온 것만도 억울한데 뭐든지 '네, 네'하며 하기 싫어도 시키면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있으려니 내 몸 속에는 불만이 가득 차 올라서 결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몇 달이 흐르자 남편은 나에게 최대한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며 틈나는 대로 팔 걷어붙이고 설거지니, 청소니 도와주었는데 우습게도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남자가 집안 일을 돕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지내던 어른들이 처음엔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그 동안 힘이 들어 하지 못하고 쌓아둔 일들을 사람 좋다, 성격 좋다 하며 내 남편에게 터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구하기 힘든 배추를 집집마다 2-300 포기씩 농장에서 구해 다가 나르게 하고 씻게 하고 몇 년씩 쌓아둔 창고 정리를 시키고 대청소를 시작하고 가구 배치를 바꾸며 침대를 이리저리 옮기고... 하다못해 아이들 우유 사오게 시키는 일까지.
한 밤중에라도 전화해서 꼭 당장 해야 한다며 불러냈다.
누구네 집에서 김장한다더라, 누가 공항에 언제 도착한다 마중 나가줘라, 누구네 집이 비는데 가서 애들 밥해주고 돌봐줘라 그것만하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고맙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모두들 '다른 사람 네도 일해줬으니 우리네 집도 해줘야지'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습게도 나조차 '남들에게 그렇게 잘해주니 어디 나한테도 좀 잘해봐.'하는 일종의 보상 심리가 생겨서 더더욱 속이 꼬이고 매사가 못마땅해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 집 저 집 다니고 피곤해져서 돌아온 남편에게 수고했다고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솔직히 아무런 소득도 없이 남은 일감을 집까지 들고 오기도 하고 아침밥을 먹지도 못하고 시간에 ?겨 뛰어나가는 모습에 웃음은커녕 화만 안내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기껏 김장 배추 날라주고 땅에 떨어져 너덜너덜한 시래기를, 내일 국거리 생겼다고 웃으며 내미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왜 이리 분하고 속상하던지...
사람이 옷도 없고 번듯해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종처럼 부려먹나 싶어 손으로 주물러 깨끗하게 빨아 입혀 놓으면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막노동 며칠 뛴 사람처럼 지저분해진 채 돌아오곤 했다.
그러고도 매일 매일 어딘 가로 불려 나가던 남편은 드디어 목소리도 못 낼 정도로 몸살이 나서 자리에 드러누웠다.
맛있는 밥이라도 먹여서 기운 차리게 하려고 없는 반찬에 이것저것 고심해서 음식 장만하고 밥을 해놔도 목이 아파 못 먹는다고 밥 그릇 앞에 놓고 10여분 .
그러다가 미안한지 억지로 몇 숟갈 넣다가 화장실로 뛰어가고...
그 다음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추워, 더워, 추워, 더워하며 괴로워하기를 수 차례.
그렇게 아픈데도 사람들은 이일은 꼭 해야 한다, 오늘은 어디 가서 무엇 좀 꼭 해야 한다
며 아프더라도 일을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지 매일 매일 전화벨이 울렸다.
화장실 갈 때도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일어나는 남편이 어떻게든 밝은 목소리로 건강한 척 하려고 애쓰고 "꼭 해야 하는 일이래" 하며 아픈 몸을 일으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차라리 더 아파 버려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궂은 일이라도 먼저 나서서 하는 성격에 자기 몸보다 남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 옆에서 마음 졸이며 요령 없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머리 좋고 남부러울 것 없는 학벌에
무엇 때문에 이 먼 외국에 나와서 남의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고 피하는 일을 왜 혼자 나서서 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그런 그의 장점을 이용만 하려드는 것일까
어찌된 것이 항상 나만 억울하고 속상한 걸까
무엇보다,
왜 남보다 아내의 우선 순위가 낮은 걸까
머리 속에 머리 속에
자꾸 쓸데없고 해답이 없는 질문만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앞에서 열심히 하면 게으른 사람들도 깨닫고 따라 오게 되 있다는 그런 사상을 가진 남편으로서는 지금 이렇게 열심히 남을 돕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람들의 고정 관념은 무서운 것이라서 안 하다가 해주면 고마워 하지만 하다가 해주지 않으면 뒤에서 욕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거기서 벗어날 방법은 정말 있는 것인지, 욕먹더라도 언젠가 이 생활을 그만둘 마음은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편견을 굳게 하기는 쉽지만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행동에 변화를 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착한 남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안 좋은 것인지 정말 뼈저리게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이 일로 깨달은 것은 단 한가지.
이대로 살면 안 된다.
다른 사람과 발맞추어 살아야 한다.
나는 그를 요령 있고, 기회주의자이며, 수득수실을 따질 줄 아는 사람으로 개조하기 위해 매일 매일 열심히, 부지런히 바가지를 긁는다.
바악, 바악, 바악. . . .박박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