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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書


BY ㅁ ㅏㄴㅕ 2003-05-10

어버이날이 아니라 '시어버이날'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삐딱한 태도가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져 홀라당 다 타버렸다. 홀시어머니대 외며느리가 어버이날 서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막상 입에서 그 말들이 쏟아져버리고 나니 속이 후련한 감도 없지 않아 당분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다 이러면서. 시어머니는 생애 최악의 날로 선포했다. 나는 그냥 시집살이 트러블이 좀 크게 있었던 하루 쯤으로 치부하려고 했는데 서로 바라는 바가 달랐던 것 같다.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부르르 화부터 내는 시어머니와 한 집에서 스케줄을, 마음을, 몸을, 돈을, 미래계획을 맞춰 사는 일은 몹시 고단하다. 곁의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장악력, 상대를 좌지우지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타고난 리더쉽 때문에 솔직히 말해 지쳐버렸다. 드러눕고 배째라 이러고 싶다. 그 얘길 시누이인 선희 언니한테 했더니 불길이 삽시간에 번졌다. 시어머니 당장 나가라고 펄떡펄떡 뛰고 남편과는 진지하게 이혼을 고려 중이며 시누이는 달려가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다니고 싶을 만큼 증오의 대상이 돼버렸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용서치 않으리라, 이러면서 눈앞의 며느리를 당장 태워 죽여 마땅한 마녀로 몰아가는 시어머니가 몹시 경멸스럽다.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자 변할 수 없는 가치관이얏! 이러면서 미간을 찌푸리는 남편에게는 오만정이 다 떨어져버려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눈물도 안 난다. 저런 사람인 줄 정말 몰랐다면 미련한 내 탓인가 눈에 뭐가 씌워졌던 운명의 탓인가.

시집살이 어언 삼년째. 낯선 사람과는 도저히 결혼할 엄두도 안 났는데 결혼은 해야하고 그래서 택한 홀시어머니 외아들 더더군다나 효자에 엄마 의존도 상당히 높은 사자성어로는 마마보이라고 일컫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네가 우리 엄마한테 잘 할줄 알았어. 네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이러면서 결국은 나쁜년 못된년으로 몰고가는데 앞장을 서고 있는 저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의 깊이 잠든 숨소리가 심장을 조인다. 너는 대가 세서 똑 부러지고 말거야, 너희 아버지좀 만나서 진지하게 얘기 한 번 해봐야겠다 걸핏 하면 죄없는 친정부모 들먹거리면서 시부모 위세 드날리는 시어머니 오만한 태도에 먹은 것도 없이 구토가 난다.

아파트 십오층 꼭대기서 단숨에 점프!
하는 충동이 정신을 괴롭힌다. 왼쪽 손목부터 어깨까지 마비가 된 듯 감각이 무뎌지고 저리고 마침내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온다. 혼자만의 부엌 갖고 싶다고 내뱉은 것이 죄다. 내 부엌 갖고 싶어요 발언죄. 뭘 해먹든 눈치 안 보고 설사 간이 안 맞더라도 시시콜콜 시누이 귀에 들어가 박히는 흉이 되지 않는 생활을 단 일이년만이라도 마음 놓고 해보고 싶은 작은 소망이 국가내란죄만큼이나 중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집안에서는. 나는 키요틴에 끌고가 무릎이라도 꿇려야 하는 사악한 년이다, 이 집안에서는.

코딱지만한 빌라든 다세대주택이든 아니 단칸 셋방이든간에 내 살림 한 번 스스로 꾸려가면서 기쁨을 맛보고 싶은 욕구를 가진 것이 죄인가. 그렇게 말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하필 어버이날 아니 시어버이날 그렇게 내뱉은 것이 대죄라면 대죄겠지. 그렇다고 시누이 제 시집 어른들도 내팽개치고 한 걸음에 달려와 차마 머리채 잡아 끌고다니지는 못하겠고 내 참는다, 이런 소리 해대는 가운데 시어머니 아이고아이고 내 인생이 억울해서 불쌍해서 어쩔까나 맨날 듣는 탄식 통곡 다시 한 번 들어야 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얼이 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데 저기 저 남편이란 작자 하는 소리, 야! 당장 니네 집에 가자!

벌써 삼년째다. 겨우 삼년째라고 말하지마! 인생의 십분의 일을 이 집에서 병신 등신 오갈데 없는 바보 멍충이로 굽신굽신 살았어. 네 마음에 안 들었겠지만 어쨌거나 결혼한 이상 어쨌거나 선택한 이상 중간에 변덕 부리는 일 없이 아이까지 낳았으니 이제는 서로 믿고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살아보고 싶은 소망 나한테도 있었어. 일방의 희생 일방의 양보 일방의 변화란 것의 미덕을 강요하지마.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나도 좀 변해보겠다 마지못해 생각해 낸 그 아둔한 머리를 믿고 그 무디고 차가운 가슴에 기대 앞으로 더 살아야할까. 그래야만 할까.

죽어버리겠어. 누굴 욕보이려고 이래, 윽박지르는 네 앞에서 죽어버리겠어. 이미 돌아가신 분 마음대로 짐작대로 기억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몰아세우고 핑계대고 있는 너나 시어머니나 모두 미워. 똑같이 해보이겠어. 자 죽어줄테니 두고 봐. 죽은 다음에 또 똑같이 후회하고 그리워해봐.

너를 만난 이후 행복하고 즐겁고 의미있고 기뻤던 일들만 간직할게.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장남의 소명 외아들로서의 책임을 어디 얼마나 끝까지 잘 하나 두고 볼게. 이 네모 반듯한 윤이 나는 감옥 창살 밖에서 지켜줄게 기다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 죽은 이후 남겨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두려운 거지. 지저분한 미련을 걷어내면 모든 게 명료하다.

딸까지 가져봤으니 더 갖고 싶은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살아봤자 언제나 되풀이되는 실망과 미움도 피곤해서 더는 못 견디겠다. 평생 못 고칠 병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쓸모 없는 인생, 불편부당한 요구들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