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635

내 아이의 피로도 모자자 다 내 놓으라 하네요


BY 고추잠자리 2006-05-24

 

무엇이...

 무엇이 내게 남아 있었는가..

 아직도 우리에게서 앗아갈 것이 남아 있었던가?

 불쌍한 내 아들의 피로도 모자라 조선일보는 모두 다 달라 하네요.

 15살의 나이로 그 꽃 봉우리를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몇 년을 혈액암으로 고생만 하다 너무나 안타깝게 너무나 허무하게 보내기가 안쓰러워 관에 누이는 그 떨림조차도 고귀했던 불쌍한

 내 아이의 영혼도 모자라 내 가진 걸 모두 다 내노라 하네요.

 아이의 얼굴을 만지고 싶은 마음에 진저리쳐지듯 지금의 이 현실이 너무나 살 떨리게 내게로 섬뜩하게 다가와 다시금 확인하고서야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극이 평범하다면 평범하게 살았고 아니 이 세상의 그 누구 보다고 더 열심히 눈물 나게 산 우리들이 받는 이 처우는 분명 온당하지 못하리라.

 진정코 이 현실은 우리 것이 아니리니 그러나 이것은 현실인 것을..

지난 목요일 바깥양반이 일산 지사장의 호출로 지사를 다녀오며 하는 말 “지국 그만 두란다.”

참으로 우습고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몇 년 째 어려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제일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1년 전인 작년 5월 중순경 이 맘 때 두어 주간 지국의 투입율 조사를 했는데 한 APT에선 투입율이 3등, 다른 APT에선 2등을 했으니 능력이 없으면 그만 둬야 하지 않겠느냐며 일방적인 해지 통보를 지사장과 담당에게서 듣고 와서 제게 하던 말 그대로 같은 말을 던지더군요.

 그래도 그 때는 우여곡절 끝에 이월된 미납분을 목숨보다 더 귀한 돈으로 완납을 해서 무사히 그냥 넘어갔지만 이 번 5월초 공문 없이 신문부수를 70부를 갑자기 줄여 어쩔 수 없이 홍보용이나 기증지로 들어가던 부수를 줄이게 되었는데 5월 15.16일 양일간 새벽 어느 APT투입률 조사를 했던지 투입률이 동아, 중앙보다 못하고 얼마 전 4월에 보고 올린 투입률(자사와 타사 투입 현황률)이 허위 보고라며 지국 해지통보를 하더랍니다.

 급기야는 늦은 밤 신문이 들어가는 독자현황을 몰래 다니며 조사하더니 후임자에게 수순을 밟아 정당한 권리금을 받고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는 절차도 무시한 채 아무런 통보 없이 갑자기 금요일 새벽부터 신문 발송을 끊어버리고 우리가 관리해 오던 배달 직원들도 회유 포섭해 지국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당하고 보니 몰래 조사하고 다닌 독자 명단의 출력한 날짜는 며칠 전 지사로 불려가 해지통보를 받기도 전인 5월 9일 날짜로 너무 계획적이고 역겨운 냄새가 나더군요.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꼭 이런 식으로 아픔을 주면서 빼앗듯 가져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지국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이번 국가에서 새로 시행되는 공동배달제인 신문유통원의 발족에 맞춰 우리 지국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본사의 공식화하지 말아달라는 의견 수렴 하에 일이 순조로이 진행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본사의 의도는 그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현재 모든 지국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새벽부터 하는 일이라 직원 고용이 어렵고 인건비와 비싼 지대, 여타 모든 현 상황으론 살아남기가 어려운 타 지국들도 참여의 뜻을 비추자 새로운 공동배달제를 인정을 하지 않는 조선일보 본사 측에선 참여하는 지국은 강제 해지할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일선의 지국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공동배달에 참여함으로 그 간의 본사의 무리한 부수투입 요구에 과다한 판촉비와 공정치 못한 지대(신문값으로 본사에 지불하는 돈),본사에선 독자들에게 무료로 나간다고 홍보하지만 수능지, 맛있는 한자, 책자 같은 등 이런 것들의 지국 부담금, 여타 등으로 인한 손실을 막아 지국의 운영비 지출을 줄임으로써 살고자 노력하는 지국장들의 발목을 꺽고야 말겠다는 심산이 것이겠지요.

 신문사란 얼마나 고객을 끌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기사 잘 써서 찍어낸 신문을 잘 팔고 그 판 부수만큼 신문값(지대)만 잘 챙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지금의 신문사들은 어떤가요?                                                                     

 수 없는 만남과 몇 달의 서비스와 하다못해 턱 없이 요구하는 사은품까지 안겨가며 힘들게 확보한 독자명단이 일선 지국의 고유한 재산이지 어떻게 그 독자 자체가 신문사 것이 될 수 있나요?                     

 

 몇 달을 몇 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달하다 부러져 부상을 입고도 또 다음 날 배달하다 다시 부러져 가며 본사가 나와서 배달해 줄 독자가 아니지 않나요? 안 그런가요?

  아녀자의 소견으로 본 제 의견이 틀린 건가요?

 공동배달제에 참여 한다고 해서 그 독자 자체의 고유의 명단이 넘어 가는 건  아니지요. 단지 주소와 지명만이 있을 뿐이지. 독자의 고유 명단은 본사의 소유도 신문유통원의 것도 아닌 오로지 지국의 온전한 소유라고 보는 겁니다.

 일본처럼 모든 신문들이 한 지국에서 배달이 되어 보고자 하는 독자 분들도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각 신문을 선택해서 제 값을 치르고 온전히 볼 수가 있게 된다면 종이 한 장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쓸데없이 남아도는 신문으로 밖을 도배하지 않아 외화낭비가 줄게 되고 실제로 보는 독자 수에 맞게 발송되는 각 신문의 제값만 본사에 지불만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강제로 떠안듯 독자에게 무리한 무가지와 선물공세로 인한 가치 없는 지출이 줄어 없어지므로 일선 지국운영자들의 이익초래와 독자들과의 실랑이가 없어진 깨끗한 신문시장이 이루어지게 될것 같네요.

기타 여러 불합리한 부분들도 많이 있지만 각설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어이없이 당한 어제부터 머릿속이 텅텅 비게 멍하니 앉아 있다 그렇게 불쌍히 간 내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울컥 울컥 숨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에 밀려 도저히 이대로는 밀려나기가 너무나 서럽고 서러워 그 간 입에 애써 올리려 하지 않았던 금기 같았던 한을 토해낼까 합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지 않아도 정말 가진 것 별로 없었어도 평화로운 행복한 시절이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행복은 아이 아빠가 조선일보지국을 하면서부터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언론매체의 대표의 하나인 조선일보에 몸 담그고 일선 지국의 지국장으로서 종사하기를 근 10여년, 너무도 소중했던 10년이란 세월을 그 지국에  허무하게 묻어 버렸습니다. 아니 그 10년이 우리의 인생에서 아예 송두리째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들이 경기북부에 속한 지국 중 조선일보 동의정부 지국을 인수 받아 운영을 하기 시작한 것은 IMF직후인 1997년 9월이었습니다.

 처음 그 지국을 인수 받을 때 아무리 두들겨 봐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을 그 곳엔 형님도 계시니 서로 서로 도와주며 살다가 몇 년 뒤면 금오택지가 개발되니 훗날 좋아지지 않겠냐는 당시의 판매지국장의 권유에 1988년 조선일보 판매국에 입사해 근무 중이던 본사를 그만두고 지국 인수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천서 매일 통근을 하다가 지국에 온전히 심혈을 기울여 일을 할 수가 없다며 저를 설득해 식구를 이끌고 낯 설은 북쪽으로  이사를 왔지요.

 큰 아들이 7살, 돌도 안 된 작은 아들을 데리고 처음 시작한 지국 살림은 생각보단 더 암울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생활비는 나오지 않고 더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려워 기저귀도 못 뗀 작은 아들을 영아원에 떼어 놓고 신문지국 전화는 휴대폰으로 돌려놓고 저는 나름대로 제 직장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숨 가쁘게 배달하고 낮엔 생활비 벌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저녁에 지국사무실로 들어와 부랴부랴 정리를 끝내고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와 집안일을 끝내면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기를 반복하다보니 몸과 맘은 늘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새벽별보고 나가고 저녁별 보고 들어온다는 말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내일이 있으리라고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지금의 이 고통도 내일이면 희망으로 바뀌겠지 하면서...

 몸이 움씬 하지 못할 정도로 쑤시고 아파도 기듯이 나와 새벽배달을 했고 수해로 온 마을이 물에 잠겨도 어떻게든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너무나도 힘든 일과에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단 한 번도 애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나름대로 자존심을 가지고 지키고자 했던 조선일보 지국 이였으니까요.

 본사 근무 때부터 자신의 직장을 사랑하고 그리해서 이 지국을 택한 애 아빠의 선택을 존중하니까요.

 그렇게 숨 가쁘게 몇 년을 보살피지도 못했던 식구들 중 큰 아이가 굉장히 아프기 시작하더니 낫을 줄을 몰랐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그러다 서울대 응급실을 경유해 입원을 하여 오만가지 검사 끝에 2000년 4월 10살에 백혈병과 같은과인 재생불량성빈혈, 골수이형성증으로 혈액암을 받던 날 전 그 날이 이 세상의 끝인 줄 알았습니다.

 당장 골수 이식이 필요한 중증 전 단계니 약물로 한 번 치료를 해 보자고하는 교수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요.

 청천벽력 같은 혈액 암 판정을 받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기에 앞으로 택지개발이 되면 지금의 형편이 펴질 것으로 믿고 정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던 그 힘들었던 시절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견뎌냈습니다.

  때론 본사에 제출해야 되는 보고서류들을 작성하느라 아홉시, 혹은 열시가 되어 집에 들어가면 배가 고파 쓰러지듯 지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사분 오분 찢어 질듯 아팠지만 좋은 날 기약하며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제 몸뚱아리도 가누기도 힘들면서도 그래도 형이라고 유아원에서 돌아오는 작은 아이를 맞이해 놀아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끓여 작은 아들과 같이 먹는 큰 아이를 보면서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애꿎은 내 입술만 꼭꼭 깨물었습니다.

 힘들어도 투정 한 번, 땡 깡 한 번 안 부리는 너무도 착한 큰 녀석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 해야만 했습니다.

 1년에 한 번 꼴로 너 댓명의 중앙지국장이 바뀌면서 많게는 1억 4천, 적게는 5천 들어오는 사람마다 대량 물량공세, 고무줄처럼 1년이고 2년이고 늘어지는 S/V개월 속에 맞물려 그 피해는 우리에게도 왔습니다. 

 한 개씩 늘어가는 마이너스대출 통장이 쌓이며 출혈이 커가도 내일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버텨왔는데 이젠 투자할 돈이 없다면 일선에서 물러남이 마땅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하던 조선일보가, 담당이 그렇게 야속할 수 가 없었습니다.

 예전 누가 조선안티니, 타도니 할 때에도 알지도 못하면 얘기 꺼내지도 말라면 반박하며 조선일보를 홍보하며 아는 이에게 심지어는 삼성가족에게도  끝끝내 구독을 종용해 조선 구독계약을 하고 다녔지만 이젠 알아주지도 않는 조선일보에 대한 짝사랑 같은 것에 지쳐 주저만 앉고만 싶습니다.

 2004년 12월 동아,중앙보다 먼저 구독료를 올림으로 인해 하락한 구독자 수에 준해 오른 구독료로 만회가 되어야 하거늘  2005년 2월 올랐던 구독료를 타사와의 경쟁 때문에 갑작스럽게 조선일보가 내림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국의 부담으로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타사는 무이자로 지국에 대출식으로 대 주면서 가격 할인과 파격적인 무가지로 조선일보에 서 떨어지는 독자들을 주워 담고 있었구요.

그런 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타사와는 상대가 안 될 수 밖에요.

 언제나 늘 앞서던 우리 지국이 하향곡선을 탄 것은 그 때 부터입니다.

 그 간 정말이지 수도 없는 어려움을 겪으며 수지도 맞지 않는 지국 인수받아 지금껏 어렵사리 키워왔건만 이런 푸대접을 받으려고 불쌍한 내 새끼, 생떼 같은 내 아들 피와 뼈를 여기다 묻은 줄 아십니까?

 백번 천 번 잘하면 뭐 합니까?

 백번을 잘해도 한 번을 잘못하면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인해 백번의 공이 오간데 없이 질타 받는 다더니 수도 없는 어려움을 겪어 왔건만 당시 최근의 부진만 들먹이며 능력 없다 하더이다.

 그렇게 한 번도 밀린 적 없는 지대를 어려운 지국 사정으로 조금씩 이월되어 미납분이 쌓이자 어느 날 본사는 지대 미수를 운운하며 완납이 아니면 지국 해약을 요구해 오더군요.

 길 다면 긴 8여년을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투자한 지국을 포기 할 수 없었나 봅니다.

 

 담당에게 여력이 안 되니 미납된 지대부분에 대해선 몇 차례 분납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지만 그 마저 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합니다.

 모아놓은 것 없어 이제껏 아이의 장 수술비며 진료비를 친척, 학교나 단체 후원금으로 충당해 왔는데 백혈병 어린이 후훤회에서 나온 돈과 보태 수술비로 쓸 마지막으로 남겨 놓았던 집대출금마저 완납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담당의 야멸찬 말에 어쩔 수 없이 내어놓아야 했다고 합니다.

 몇 년의 투약이 아무런 효능을 주질 못하고 점점 나빠져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방법은 골수이식뿐, 그나마 이식의 성공률 50%, 성공해도 생착 성공률 50% 성공해야 만이 살 수 있는 방법만이 남겨져 있었는데 실낱같은 아이의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인 골수 이식 수술비로 남겨둔 대출금마저 지대 미납분을 완납하기 위해 냈다는 소리를 듣는 날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은 8여년을 그렇게 고생하며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죽어가는 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술비조차도 마련을 못하고 그나마 있는 그 돈을 떼어 미납 지대를 내는데 쓸 수밖에 없었던 우리네 신세가 한심하고 서러워 밤이 새고 날이 새도록 이불속에서 몰래 흐느껴야 했어요.

 이식만을 기다리며 살고자 애쓰는 내 아이의 희망의 날개를 꺽어 가며 살아야하는 현실에 정말이지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대한민국 대 조선일보가 생명이 꺼져가는 아이의 수술비마저 끌어다 채워야할 정도로 정말로 재정이 곤궁했었습니까?

 아님 남들이 하는 말처럼 사회란 눈꼽만큼의 눈물도 인정도 있을 수 없는 약한 자 위에 밟고 서는 매정한 곳이라는 말이 정설 이었던 건가요?

 

 아이가 위험한 상황이 닥친 제 작년 이 후로 제가 자주 비게 된 사무실 일이 제대로 척척 돌아갈리 만무하니 요구하는 보고서, 때론 제때 내지 못할 때도 있었고 본사 측에서 보기엔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비협조적 지국이 되겠지요.

 너무나 어이없게도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그 동안 금오택지개발 지역 중 절반이 뚝 잘려 윗전에 잘 보이며 소위 빽 있는 사람에게 빼앗겼을 때에도 사는 게 그려려니 어쩔 수 없으려니 하며 포기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 피땀 흘리며 일군 일터를, 아이 앞에선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밤늦게 몰래 흘린 눈물위에 다져진, 내 아이의 피 값으로 선 지국, 이젠 능력 없으니 내 놓으라 하네요.

 아픈 내 새끼 온 방과 화장실을 피로 물들이게 내 버려두고 어떻게든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벽부터 그렇게 뛰어 다닌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요?

 상태가 좋지 않음을 확인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배달을 하고 돌아왔을 때 방과 화장실에 너무 많은 피를 쏟아내 출혈과다로  혼수상태에 빠져 새어나오지 않는 소리로  엄마 아빠를 찾아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애타게 불렀을 아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숨이 안 쉬어진다고 숨이 안 쉬어진다고 울먹이며 쓰러져 간신히 목구멍의 숨만 붙어 헐떡이고 있는 피투성이 아이를 당신은 본적이 있냐구요?

 산소가 모자라 새파랗게 질려버려 허연 눈동자만 뒤집어 진채 사지가 뒤틀려진 채 쓰러져 있는 그 가엽고 여린 아이를... 그 불쌍한 내 새끼를......

 단지 그 불쌍한 내 아이는 부모를 잘못 만난 것뿐인데...

 24시간 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부모를 만난 죄밖에 없는데....

 정말 여유가 안 되어 사고 싶다는 것 한 번 못 사주었습니다.

  남들 입는 멋있는 옷, 메이커 신발은 고사하고 사촌형이 물려준 옷으로 아나바다 운운하며 재활용 운운 하며 입히며 물려주었습니다.

 지국을 하는 10여 년 동안 남들 다 가는 어린이날 그 흔한 대공원 구경 한 번 데려가 주질 못하고 뒷산의 약수터로 만족을 해야 했으며 다른 집 아이들이 아빠랑 축구를 하는데도 우리 집의 축구공은 언제나 집 한 구석을 차지하는 장식품이었을 뿐입니다.

 일하느라 바빠 사랑을 먹고 자라는 그 어린것에게 정성어린 보살핌 한 번 못 주고 남들 다 하는 아빠 노릇, 엄마 노릇 제대로 한 번 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여리고 착한 아이는 그런 부모를 원망하지도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여느 아이들처럼 가지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조르지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더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쓰리고 아픈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가 우리 곁에 있을 때 조금 더 꼭 안아주고 한 번만 더 보듬어 주질 못했는지 마음이 너무 저려오네요.

 오랜 기간의 약물 투약의 부작용으로 간에 크게는 6~7Cm,작게는 2~3Cm 크기의 종양이 6~7개나 생겨났고, 합병증으로 돌아다니다 장에 붙어 괴사를 일으키는 크론병으로 인해 피를 쏟아내기를 대여섯 차례, 그 때마다 119에 의존해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기를 6개월 넘도록 하더니 결국은 위험한 수술로 인해 아이가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가며 2004년 12월 말에 장 절제 수술도 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살인 아들이 오랜 세월 뼈에 혈액공급 안되어 무혈성괴사라고 고관절 뼈에 괴사가 와 언제 무너져 내려 평생 걷지도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60대 할아버지 뼈를 그 아이는 가지고 있었지요.

 하루 빨리 골수이식수술이 안되면 불쌍한 내 아이의 몸은 바다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게 된다고 하더이다.

 하나의 병도 부족해 이제는 종합병원이 되어버린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죽을 고비만 넘기면 하얗게 창백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제게 농담을 거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까짓 거 죽기밖에 더 하겠냐고 하며 씩씩하게 절뚝거리며 가다가 몇 발자국 못가 헉헉 숨을 몰아쉬는 그 불쌍한  한 번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병원에 갈 때 마다 아들의 친구가 아님 아는 아이들이 하나 둘씩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에 그 말을 차마 아이에게 얘기할 수 없는 부모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보셨습니까?

 몇 번의 수술시기를 놓치고 기다리던 중 병원의 급작스런 수술 날짜를 통보를 받았지요.

 2005년 6월 15일 입원 29일 이식이 잡혔다고 연락을 받던 날,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이 세상의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뻐하며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거는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유일하게 남겨져 있던 친구에게 ‘야! 나도 너처럼 건강해질거야. 수술만 받으면 아빠랑 축구도 할 수 있어. 기다려.’라며 전화를 걸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모자란 수술비는 나중 생각키로 하고 우선 수술이 먼저였기에 그렇게 서둘러 입원을 하였지요.

 입 안이 목구멍이 타 버려 물 한 모금 먹을 수 없는 항암제 맞기를 꿋꿋히 잘 견뎌 주었고 2주 3주 먹지를 못 해 영양주사로 버티는 애들이 태반인데 아들은 언제나 창문 너머의 커다란 축구장을 열망하는 맘으로 제 스스로 밥숟가락을 들어 까맣게 타서 너덜 너덜하게 다 헤져버린 입 안으로 한 수저라도 더 우겨 넣었으며 그러다 노란 위액까지 다 토해내도 한 수저 밀어 넣고 또 토해 내면서 그 힘들고 고통스런 무균실생활을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으며 너무도 대견스럽게 견뎌 주었지요.

 항암이 끝나고 29일 이식을 무사히 끝낸 날도 제 스스로 수저를 들어 한 마리의 세균조차도 허용이 안 되기에 소독하고 또 가열하여 맛도 없을 밥을 반 공기나 비우더군요..

 

그 만큼 아들에겐 이식 수술이야말로 이 세상을 잇는 유일한 출구였던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잘 견디며 버텨주던 아들이 그리 살고자 열망했던 내 아들이 이식 후 일주일째 전날부터의 복통이 계속 이어져 7월 9일 아침 배가 터지고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 너무도 힘겨웠던 그 동안의 모든 것을 놓아 버렸습니다.

 극도의 항암제로 본인 고유의 단 하나의 면역세포도 남아 있지 않았던 몸은 아이의 삶에 대한 열망과는 반대로 이식 휴유증을 이기지 못했고 불쌍한 내 아이는 그 동안 너무나 힘겹게 붙들고 있던 생명줄을 놓아 버린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그 무수한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또 넘기며 살려고 그리 발버둥 치던 아이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버거웠으면 그렇게 꼭 움켜잡고 있던 세상으로의 열망을 접고 그 고통 속에서 묻혀서 울부짖는 에미를 뒤로 두고 가버렸습니다.

 서울대 8층 병동이 발칵 뒤집히고 수많은 의료진들이 몰려와 앰브백으로 산소를 공급하고 아이의 갈비뼈가 다 부서지도록 심폐소생술을 해도 아이의 손은 움직일 줄 몰랐고 자꾸만 차갑게 식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고생한 것이 아깝지 않니?”

 “이 번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 더 이겨내자 알았지?”

 “이번만 견디면 앞으로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잖아 그치?”

 “우리 진환이 그 동안 잘 했는데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지? 그렇지? 맞지?”

 “진환아? 진환아!”

  아무리 애타게 불쌍한 내 아이의 이름을 불러도 그 앤 대답을 안 했어요.

 아무리 흔들어 그 애를 깨워도 더 이상 감은 눈을 떠지를 않았어요.

 그 아인 내겐 푸념을 안 했지만 참 많이 힘들고 버거웠었나 봐요.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그만 잡고 있던 줄을 놓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그렇게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아들의 마지막 순간도 같이 하지도 못하고 지켜온 일터였습니다.

 애써 힘들여 공들여 지켜왔지만 이젠 본사의 일에 걸림돌이 되니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함이 옳다하니 본인의 젊음을 지국을 일구는데 고스란히 쏟은 사람은 아랑곳없다 하네요.

 정말이지 한 때도 편한 날 없이 지내온 시간만큼 내게 돌아오는 것 없었으며 온 맘과 정열을 쏟아 일궈냈던 만큼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았습니다.

 근근히 버텨주던 병중의 아이가 2004년부터 혈액 수치가 너무 떨어져 잦은 몸 안 밖으로 출혈을 했고 위로,코로, 장으로 혈관이 터져 온 화장실과 방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다량의 출혈로 인해 숨이 몇 번이나 넘어가는 것을 119구급차에 의지해 때론 생명의 위협을 받아 중환자실로 올라가며 생사를 오락가락 할 때도 전 날 독자와의 약속 생각에 그 와중에도 전화를 걸어 약속 이행을 전달했을 정도로 사무실 일을 잘해내려고 노력했던 자신이 너무나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끌어 내리려는 손길이 있었고 하물며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땐 안 지국장 이젠 돈 없어 지국 못할 거라며 깍아 내리는 소리를 하는 이도 있었다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지국을 해서 영화를 보았습니까?

 창피하게도 이제껏 생활비가 없어 따로 나가 벌어야만 했고 후원해주는 남의 돈으로 아이 병원비를 해결하며 살았습니다.

 어디 가서 둘이 24시간 막노동을 하며 벌어도 2배는 벌었을 것이며 이처럼 밑 빠진 독의 물 붓기 식은 아니었을 겁니다. 판촉물비며 인건비며 재투자 비용이 만만찮게 들어갔고 정말로 너무나 힘겹게 버텨 온 지국이었습니다.

 끝까지 조선일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길 바라는 지국장들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내친다면 과연 진정 조선일보를 아끼고 사랑하며 지켜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장사꾼만 득시글거릴 조선일보를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네요.

 이대로 내몰리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눈물로 일궈 낸 그 곳, 하물며 불쌍하디 불쌍한 내 새끼의 생명의 피 값이 서려있는 그 곳을 지키기 위해서 전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영화를 주지 않을 지국일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도 내 지국에 강제 접수하러 들어온 그 어떤 이가 막말을 하네요. 자식 팔아먹은 놈이라고.

 그래요. 자식까지 팔아먹으며 한 지국이니만큼 더 더욱 그냥 물러나 주저앉고 싶지 않군요. 

 혼자서 저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애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이렇듯 내몰리듯 나가야 하는 것에 너무 속이 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새끼 잃은 엄마 사슴의 울부짖음 같이 어쩌면 속 좁은 아녀자의 소갈머리 없는 짓일 진 몰라도 넋두리하듯 늘어놓아 봤습니다.

 할 일마저 잊고 멍청하게 앉아있자니 아들놈이 하는 말이 생각이 나네요.

“모든 일이 하느냐, 안 하느냐 선택은 두 가지뿐인데 기왕이면 좋은 쪽, 하는 쪽을 선택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라며 웃음을 머금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아들이 지금 옆에서 한심한 듯이 질책하네요.

 암담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해 살아가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 내 인생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아들 앞에선 깔깔거리고 웃었고 행여나 좌절할까봐  항상 긍정적인 생각만을 심어주었습니다.

 지금보단 내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이 할 일은 끝까지 남에게 기대지 않고 하기를 종용했고 한 번 터진 혈액은 지혈제를 쓰기 전엔 멈추지를 않는 아이였지만 잘못을 한 경우에는 여느 일반아이와 마찬가지로 호되게 매도 때려가면서 그렇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아주 엄하게 키웠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아픈 것을 때린 손끝이 아리하게 저려와 가슴을 후벼 파네요.

 이렇게 일찍 갈 줄 알았더라면, 이토록 가슴 찢어지게 아플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더 듬뿍 아니 없던 것도 만들어서 사랑을 줄 걸을 왜 그다지도 엄하게 아이에게 대했는지...

 다 저 잘 되라고 한 짓이라지만 다 옳다고 생각해 한 것이라지만 못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술수가 없어요..

 그래도 새파랗게 질려서 마지막까지 찢어질 듯 배가 아프다고 뒹굴던 내 아이의 아픔만큼은 안 되겠지요?

 차갑디 차가운 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는 아픔만큼은 아니겠지요?

 그렇게 사지를 뒤틀며 고통에 못 이겨서 가늘고 긴 손가락의 끝 손톱이 다 부러져 피멍이 들도록 시트를 쥐어뜯던 내 아이의 고통의 반도 안 되겠지요?

 그렇게 가는 순간까지 몇 시간 그 어둡고 긴 고통의 터널 속에 혼자 있다 간 그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요?

 웬만한 것은 다 참고 또 참고 견뎌냈는데 얼마나 아팠으면 그리도 소리를 질렀을까요?

 얼마나 아팠을 것이야? 그 것이 얼마나 아팠을 것이야?

 그 아픔을 나누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워...

 너무나 한이 돼...

 행운의 네잎크로바와 새빨간 꽁지의 고추잠자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니가 이렇게 가슴이 타들어가도록 보고 싶을 땐 어떡하라고 너 혼자 그리 훨훨 가버렸니?

 어떡하면 좋니... 사랑하는 내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