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22

[오늘의미션] 기차에 대한 기억


BY 사교계여우 2022-06-28

 2003년 4월, 학교 안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우리 학교에는 베테랑 택시 기사도 올라가기를 꺼리는 가파른 경사로가 있다. 그곳에서 사고가 났다. 지금처럼 아침엔 쌀쌀한 봄바람이 건물 사이 사이 몰아치는 좁은 도로였다. 그 날은 음악학부 새내기들이 MT를 떠나는 날이었다. 들뜬 학생들을 태운 대형버스가 내리막을 타고 내려오다가 등교 중이던 다른 과 새내기들을 덮쳤다. 입학한 지 꼭 한 달 째였다. 차에 치인 학생들은 흩어져 쓰러져 있었고 주위의 학생들은 혼비백산했다. 차 밖의 목격자도, 차 안의 목격자도 심한 충격을 받았다. 가장 큰 충격은 현장에서 중상을 입은 두 명과, 사망한 세 명의 신입생들이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


 나는 당시 학교 신문사 기자였다. 학내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에 브레이크 굉음을 듣자마자 너무 빨리 현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복학생 선배가 쓰러진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 아이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선배는 다급하게 볼펜을 꺼내어 그 애의 입에 넣고 혀를 눌렀다. 혀가 말려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던 나에게 뭔가를 시켰다. 그 통에 나는 다시 어딘가로 뛰어갔다. 나는 그 심부름 때문에 사고 현장이 어떻게 수습됐는지 제대로 보지 못 했다. 이젠 너무 오래된 일이라 관련 기억을 다 잃었다. 아직까지 떠오르는 것이라곤 추모식 후 신문사에서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던 것과, 우리 학교 학우들을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식집 사장님의 비통한 표정 뿐이다. 비탈진 언덕 꼭대기에 세운 학교는 오랫동안 눈물바다에 잠겨 있었다. 우리는 헤엄쳐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다같이 가라앉아 눈물만 만들어 냈다.

 그렇게 신입생 세 명이 세상을 떠났다. 사고 원인은 대형버스 운전 경력이 두 달이 전부였던 운전기사의 미숙한 브레이크 조작이었다. 버스가 출발했던 건물 앞 작은 화단에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세 사람을 추모한다는 문구와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었다. 비석이 들어선 위치는 마치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걸 감추고 싶은 것처럼, 시간이 지날 수록 빠르게 잊혀지길 바라는 것처럼, 화단 깊숙한 곳이었다. 비석이 세워지고 나의 헌화도 시작됐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19년 동안 4월이 되면 나는 꽃 한 송이를 들고 학교에 갔다. 나는 졸업하고 취업했고,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사내 동호회 활동도 하고, 해고와 복직을 겪었다. 결혼하고 출산했다. 학부형이 됐다. 내가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삼십 대에서 사십 대로 쉬지 않고 나이를 먹는 동안에도, 비석 속에 잠들어 있는 세 후배들의 나이는 그들이 떠났을 때 그대로였다. 언덕을 다 오르면 매우 숨이 찼다. 비석을 바라보며 숨을 잠시 고르고 그 앞에 꽃을 내려놓았다. 4월 초의 그 곳은 유난히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연약한 꽃 한 송이가 날아가지 않도록 항상 신경써서 헌화해야 했다. 성호를 긋고 기도했다. 해가 갈 수록 비석을 향한 내 혼잣말은 내용이 다양해졌다. 사회 초년생이 되었을 땐 너희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말하고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2008년엔 정황이 없어 학교에 늦게 찾아 갔었다. 나는 이듬해 3월 말일 자로 해고됐다. 단박에 달려가 그거 좀 늦었다고 선배한테 이러기냐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시 복직했던 해에는 기분 좋게 헌화하며 나를 보살펴줘 고맙다고 말했다.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을 비석에게 알렸다. 첫 출산예정일이 2월이라 봄엔 산후조리 때문에 못 갈까봐 만삭의 몸으로 미리 다녀오기도 했다. 둘째를 낳기 전엔 두 시간만 진통하고 낳았으면 좋겠다고 비석 앞에서 중얼거렸는데, 정말 정확히 두 시간 만에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나는 그것이 마치 소원 들어주는 바위인 것처럼 내 소망을 말했다.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소원은 계획이 되었다. 나는 더이상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반드시 "잘 있어. 내년에 또 올게."라고 약속했다. 올해는 약속을 지킨지 20년 째 되는 해였다.

 세 후배들은 역병이 온 세상을 휩쓰는 날들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리라곤 살아 생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나도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갈 줄 알았더라면 재작년에 비석 앞에서 백신이 어떻고 경제가 어떻다며 잘난척 좀 하고 왔을텐데. 지난 겨울부터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확산된 탓에 나는 대단히 바쁘게 살았다. 동료들은 본인이나 자녀의 확진으로 회사에 나오지 못 했다. 나는 내 업무 외의 일들까지 챙기느라 다소 지치고 예민해졌다. 일에 대한 회의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면역력이 떨어질대로 떨어져 몹시 피곤했다. 3월 끝물에 그리웠던 동료들이 하나 둘 돌아왔다. 나는 비로소 4월 초에 예정돼있던 가족 여행에 신경쓸 수 있었다. 남편에게 여행 전 날 꼭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니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을 봐달라고 당부했다. 후배들을 보고 올 참이었다. 그러나 그 날, 둘째가 고열로 식구들을 모두 깨운 새벽에 가족이 동시에 확진된 것을 알았다. 격리가 끝난 후 첫 일요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채비하고 학교로 향했다.

 기차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전통시장을 거쳐 갔는데, 나는 차창 너머로 꽃 파는 아저씨를 보았다. 일요일 아침 7시 30분이었다. 크기가 비슷한 화분끼리 열 맞춰 반듯하게 길 한 켠에 정돈되어 있었다. 그 끝엔 마른 체격의 늙수그레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볕 좋은 곳에 자리잡은 식물들은 막 공연을 마친 연극배우처럼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연 모종사에서 누군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 나이 먹었으면 징징거리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다.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나를 이 시간에 움직이게 만든 20년 된 약속, 시장을 통과하는 버스 노선, 부지런한 사람들, 초록색 생명들. 나는 다시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가장 걱정했던 것은 휴일 오전에 꽃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운 좋게도 역에 내리자마자 문 연 꽃집을 발견했다. 그 곳은 예전에 신발가게였다. 1년에 한 번 학교에 가는 이맘 때. 역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 새로 생긴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사라진 꽃집들을 추억했다. 그래서 학교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모든 꽃집 위치에 빠삭해졌다. 헌화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시절엔 주로 하얀 꽃을 샀다. 국화 아니면 카라, 흰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갔었다. 한번은 너희 성년의 날도 못 보내고 갔을텐데 이런 꽃도 받아보라고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놓아준 적이 있다. 이번엔 다시 하얀 장미를 골랐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1년이다. 후배들을 빨리 보고 싶었다. 이제 몇 발짝만 가면 숨을 고를 수 있겠지. 그랬는데..

 비석이 없었다.

 화단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갈 때마다, 비석은 세월이 흐를수록 구석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랐는데 아무도 잡초를 제거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간 나는 비석을 자세히 보기 위해 화단의 돌을 딛고 잡초를 헤치다시피 하여 겨우 인사를 나누고 왔었다. 비석은 그렇게 깊숙이 뒷걸음치다 화단 어딘가에 완전히 묻힌 것이 아니었다. 학교 측에서 치웠구나. 비석을 없앤다는 얘기를 몇 년 전부터 들었던 것 같다. 20년이면 기릴 만큼 기렸다고 치워버렸구나. 나는 화나지 않았다. 다만 당황했을 뿐이다. "잘 있어. 내년에 또 올게."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는데. 언제 들어냈는지 시기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세 후배들에게 주었던 내 마음은 갈 길을 잃었다. 그곳에서 한참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 그건 열차를 타러 오는 길에 이미 봤어. 나는 좋은 나침반을 가졌어.

 그들 인생에 최고로 빛나던 시절의 신입생들을 앗아간 그 비탈길을, 울면서 내려왔다.
 
 선물 같았던 아침 풍경을 잘 간직해야지.
 그리고 검고 차가운 비석에서 그 애들을 꺼내어 내 가슴 속에 넣어둬야지.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